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한 명석
  • 조회 수 126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6년 7월 20일 12시 20분 등록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독교학교를 10년이나 다녀서 예배형식에 익숙하지만 나는 종교를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가끔 혼자서 주기도문을 외우곤 한다. 언젠가 무심히 주기도문을 떠올렸다가 그 짧은 문장에 들어 있는 엄청난 의미에 매료된 탓이다. 우선 아버지”, 내 생명의 근원인 개인적인 아버지든, 세상을 있게 한 신적 상징이든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를 때 심경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낀다. 나를 뛰어넘는 커다란 존재에 의지하고 싶은 이런 마음이 종교성의 기본이리라.

 

그런데 그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하늘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온갖 부조리와 미흡함과 악행이 지워진 곳일 것이다. 존재 만으로 주변을 정화시키는 아기들의 미소와 꽃의 아름다움과 나무의 푸르름과 하늘의 광할함과 바람의 소통...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곳일 게다. 그토록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하늘의 상태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은 얼마나 파격적인가! 자유와 자연과 소통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배격해야 할 터이니 그건 현실의 대부분을 뒤엎어버리는 도전과 혁신이며, 때로 무서운 투쟁도 불사하는 엄혹한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구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에서 나는 잠시 얼음이 되고 말았다. 땅 위에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제1원칙 다음에 나온 것이 용서였던 탓이다.

 

용서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었어! 그건 용서할 일이 온 땅을 뒤엎을 만큼 많다는 얘기도 되겠고,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도 되겠네. 오직 용서함으로써만 나 역시 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이토록 단순하고 명료한 수칙이 거대종교의 제2수칙인 것에 나는 그만 놀라버렸다. 그 뒤로 심란하거나 마음을 모을 일이 생기면 눈을 감고 최대한 정성스럽게 주기도문을 외우게 되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의 짧은 기도인 셈이다. 엊그제는 애들 아빠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헤어진 지 10, 그는 아직 쌀을 대 주고, 애들 고모들과 모여서 하는 김장을 해다 준다. 아이들이 있으니 당연하다고 해도, “늙어가는 아버지의 쓸쓸함을 알 것 같아 자꾸만 미안하다.

 

배운 여자 데리고 살 수 있어요?”

농촌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젊은날, 내가 지역도서관 활동을 하던 마을의 청년이 자꾸 눈에 밟혔다. 부모의 집을 떠나고 싶던 20대 후반,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결혼하면 집이 생기고 아이도 생기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 인정받으니까. 몇 번의 눈마주침이 있은 후 확실하게 진도를 뺀 것은 나였다. 남매를 키우며 농사를 거들던 8년 간 우리 부부도 여느 가정과 다름없는 가부장적 질서 아래 별 문제가 없었다. 내가 가방끈이 길다고 해도 농사일에서는 그의 경험과 지혜가 압도적이었으니까. 그러다가 호된 고부갈등의 해결책으로 내가 읍내에 나와 차린 학원이 대박이 나면서, 차츰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잘 나가는 학원의 원장이었고 그는 봉고맨이 된 것이다. 결국 15년 만에 서울여자는 제가 온 곳으로 가 버렸다. 시작도 내가 하고, 끝도 내가 낸 결혼생활의 기억은 두 아이- 이제는 성인이 된 자녀가 남았을 뿐이다.

 

그런 그가 한 번 다녀가면 온갖 물건이 쌓인다. 쌀과 콩이야 늘 고맙고 요긴하지만 육류와 생선은 골치가 아프다. 내 손으로 얼린 것이 아니라 조금만 미심쩍어도 먹을 수가 없다. 돼지고기가 모두 여덟 뭉치, 소뼈가 한가득, 이름 모를 생선과, 이름 아는 생선들로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가득한데, 냉동되었다고 해도 색깔이 선명하지 않은 돼지고기 세 뭉치와 영 손길이 안 가는 생선을 모조리 버린다. 여기에 대추가 한 보따리, 대추로 담근 술도 큰 통으로 하나. 상태 좋은 백설기가 두 뭉치, 상태 좋지 않은 가래떡이 두 뭉치. 한 개에 2kg씩은 됨직한 고기덩어리를 버리려니 아깝기도 하고 귀찮아서 전 같으면 투덜댔을 테지만 이번에는 덤덤하게 내 할 일을 한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킨 사이 아들과 둘이 나른 수고만 해도 크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게다가 이사한 집에 처음 와 보는 것이므로, 이번에는 부적 비슷한 것도 있다. 어디 점집에서 해 왔는지 무명실로 오만원짜리를 질끈 동여맨 것을, 아들딸과 내 것 해서 세 개나 해 왔다. 무슨 돌날도 아니고 실과 돈으로 무병장수와 부귀를 빌어준 상상력이 단순해서 피식 웃다가도, 나까지 챙겨준 마음씀이 고맙다.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다. 살다보니 힘겨울 때도 있고, 삶이란 게 정말 별 것 아니란 생각도 들어서다. 그도 나도 용서 받을 일이 있을 것이나,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것을 알 만한 세월도 흘렀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는 데서 우리의 인연은 끝났다. 그러고도 시골 친척처럼 계속되는 그의 배려에 마음이 짠하다.

 

쌀자루 위에 부적을 올려 놓고, 자신이 가져온 대추술 한 잔 부어놓고, 일주일은 그렇게 두라고 했단다. 그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공손하게 조아리고 주기도문을 외운다. 종교의 형식으로 보면 이상한 조합이지만, 떨어져 사느라 살가운 맛도 별로 맛보지 못하는 아이들과 전처를 생각하는 그의 지순한 마음만큼이나 간절하게 나도 빌어주고 싶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종교가 있든 없든 자신의 삶에 선한 마음으로 임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결혼생활이 남긴 빈 자리가 그에게 더 크다는 점에서 내가 더 용서받을 일이 클 지도 모르겠다.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더 많이 용서해야겠구나.... 젊어서는 성실은 기본이요, 여유있는 재치가 돋보였는데 이제는 무슨 시골할머니같이 구는 그에게서 세월이 느껴져서 눈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질 것 같았다.


 


 

*** 제가 주도하는 <글쓰기를 통한 삶의 혁명>카페에서 글쓰기강좌 합니다.


삶에 필요한 100가지 기술 같은 것이 있다면 글쓰기는 그 중 으뜸입니다.

글쓰기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삶과 유리되지 않으므로

최고의 지원군이요, 가장 든든한 친구요, 무기거든요.

http://cafe.naver.com/writingsutra/14255

IP *.153.200.10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56 “나, 돈 안 벌 거야!!” 김용규 2016.06.23 1262
1855 예순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다섯번째 토크쇼 [2] 재키제동 2016.06.24 1348
1854 마흔아홉,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완장(腕章)이란? [1] 書元 2016.06.25 1285
1853 엔딩 노트, 당신의 정말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file 차칸양(양재우) 2016.06.28 4986
1852 머스매같던 그녀가 블록버스터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섹시해진 이유 file [1] 한 명석 2016.06.29 1292
1851 열 살에 삶의 길을 결단한 남자 김용규 2016.06.30 1260
1850 예순한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상반기 결산 재키제동 2016.07.01 1165
1849 브렉시트, 과연 신자유주의 균열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차칸양(양재우) 2016.07.05 1227
1848 좋은 삶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김용규 2016.07.07 1252
1847 예순두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시험 재키제동 2016.07.08 1368
1846 마흔아홉, 일곱 개의 사다리 [1] 書元 2016.07.08 1178
1845 베트남 투자 한번 해보실래요? [2] 차칸양(양재우) 2016.07.12 1526
1844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은 까마귀가 된다 한 명석 2016.07.13 1322
1843 몸 기억으로 채워지는 좋은 삶의 진수 김용규 2016.07.14 1174
1842 예순세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여섯번째 토크쇼 [2] 재키제동 2016.07.15 1473
1841 인생 후반전을 ‘전성기’로 맞게 될 그를 응원합니다 차칸양(양재우) 2016.07.19 1522
» 그를 위한 기도 한 명석 2016.07.20 1262
1839 불혹과 지천명에 도달하기까지 김용규 2016.07.22 2844
1838 예순네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서른 즈음 재키제동 2016.07.22 1360
1837 마흔아홉, 삶은 수련입니다 書元 2016.07.23 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