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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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연대기가 바뀌는 시기가 갱년기(更年期)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장의 연대기에서 성숙의 연대기로, 확장의 연대기에서 심도의 연대기로, 욕망하는 시기에서 욕망을 바라볼 수 있는 시기로…. 신체적 변화가 여럿 있습니다. 차츰 노안이 깊어지고, 밤 운전이 피곤하고, 번다한 환경이 불편하고, 장황한 것들에 피로를 느끼고…. 무엇보다 자주 여기저기 아프고!
지난주에 아팠습니다. 왕복 1,000km의 거리를 오가는 강연 후유증을 제대로 앓았습니다. 도저히 목요 편지를 쓸 수가 없어서 그냥 몸을 달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해를 구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나는 ‘어쩌다 어른’이 된 우리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아빠의 고민도 잠깐 이야기 했었지요? 애비의 눈에 너무도 한심한 구석이 많고 그 장래조차 염려가 돼 딸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도 하고 엄포도 놓고 달래도 보지만 그럴수록 딸은 아슬아슬한 태도를 보여 답답하고 버겁다는 고백을 한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 기억나시지요?
나는 그에게 뭘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차라리 그 아이와 함께 놀 궁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딸에게 감히 조언이라니요? 그런 아버지를, 선생님을, 어른을 아이들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차라리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 있으면 그것을 함께 즐기세요. 차라리 함께 영화를 보거나 노래방을 가거나 떡볶이 집을 함께 가세요.’
‘나는 그랬습니다. 나는 어쩌다 어른이 된 놈임을 자각했기에 내가 아이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아이는 아이가 가진 렌즈로 세계를 인식하고 나는 내가 가진 렌즈로 세계를 인식할 뿐임을 알아챘습니다. 나의 렌즈가 아이의 렌즈보다 훌륭하다고 확신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래요. 다만, 아이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내가 먼저 보았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분위기가 되면 다만 물어봐 주죠. “그게 전부일까? 지금 네가 믿고 있거나 보고 있는 것이 그것의 온전한 실체일까? 그 뒷면에는 혹은 옆면에는 윗면이나 아랫면에는 혹시 무언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잘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그것을 다 살펴 판단하고 결정하기를 권했습니다.’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존재요, 자신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어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체 세상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 역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 자들은 억압을 동원하고 심지어는 전쟁을 불사하기까지 합니다. 그 무지막지한 신념은 종종 폭력으로밖에는 관철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던 시대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과 유신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지금 치매를 앓고 계시는 아버지는 그 시절 감당해야 했던 억압과 폭력이 몸에 아로새겨져 있는지 가끔 그 시절의 청년처럼 말하고 행동하시기도 합니다.
나의 조언을 들은 그 아버지는 미소를 띠었습니다. 딸고 탁구를 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친구가 되는 일부터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다수는 나이를 먹으면서 어쩌다 부모가 되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그것이 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우리에게 새겨진 신념과 행동양식이 절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고 믿고 있는 세계가 어쩌면 실체의 절반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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