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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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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7일 23시 48분 등록

 

어제는 아직 어둠이 가시기 전에 길을 나섰습니다. 서울 동작구가 운영하는 공공 교육시설로부터 받은 강연 초대 때문이었습니다. 오후 일정 때문에 차를 가져 가야하는데 노량진에 있다는 시설에서 아침 일찍 시작하는 강연 시간에 맞추려니 출근 시간의 서울 도로가 어떨지 몰라 아예 일찌감치 길을 나선 것입니다.

 

나의 생리적 시계는 아주 정확한 편입니다. 잠드는 시간이 몇 시든 나는 여덟 시간을 잘 때 가장 몸이 개운합니다. 일곱 시간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지만 여섯 시간 이하로 잠을 잘 경우 오른쪽 어깨 부분이 종일 뻣뻣하고 편치가 않습니다. 배는 늘 정해진 시간에 고파오고 끼니를 거르는 것을 몸이 아주 싫어합니다. 내 몸은 육식보다는 채식에 더 기뻐하고 육식을 할 때도 고기보다는 해산물을 선호합니다. MSG나 인공적 색소 등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머리가 아파오거나 어딘가 불편을 호소합니다.

 

배변도 정확합니다. 일어나서 15분을 넘기지 않아 화장실로 갈 것을 요구하지요. 화장실에 앉자마자 5분 내에 전날의 소화물들을 시원하게 만나게 해줍니다. 책을 펴놓고 한두 대의 담배를 피운 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줄 때 내 몸은 완전히 깨어나고 가벼운 아침 식사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 먼 길을 떠날 때 내 몸은 그 리듬을 따르지 않습니다. 새벽밥을 해먹거나 사먹고 출발하더라도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화장실에 가자는 요청이 발생하지 않는 편입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가벼운 아침꺼리와 과일, 그리고 큰 사이즈의 텀블러에 커피를 챙겨 출발했고 운전을 하며 차 안에서 순서대로 커피와 과일 후식까지 기쁘게 아침 식사를 마쳤는데도 나의 배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량진의 그 교육장소, 그러니까 어느 거대 학원의 건물 2층에 세 들어 있는 장소를 찾아 주차장에 차를 딱 정차하자마자 나의 배는 정확하게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강의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복잡한 건물을 헤매다가 상가가 들어서 있는 1층의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칸 이 비어 있었고 나는 가장 안쪽 창가 쪽의 장소를 선택해 변기 위에 앉았습니다. 오늘도 여지 없이 쾌변이었습니다. 담배도 책도 즐기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얼른 일어나 강의실용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의용 장비를 설치, 점검하고 느긋하게 밖으로 나와 몰려드는 학원생들 틈에 섞여 담배와 남은 커피를 즐겨볼 생각이었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어쩌면 좋습니까? 화장실에 화장지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런 경험 있으신가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 사이 화장실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난감했습니다. 생각하다 못해 119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도 진짜로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 세면대에서 누군가 수돗물을 틀고 손을 씻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절박한 마음에 얼른, 그러나 차분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기요, 죄송한데 여기 화장지가 없어 그러는데 혹시 옆 칸에 화장지 좀 건네 주실 수 있을까요?” 대꾸가 없었습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1, 2. 나는 답답해졌습니다. 그리고 서울이란 곳이 원래 이렇게 타인에게 무심한 곳이었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인간에 대해 약간 섭섭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5분 쯤 흘렀을까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화장실 문 앞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기, 화장지 어떻게 드릴까요? 옆 칸 어디에도 화장지가 없더라고요.” 눈물겹게 반가웠습니다. 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문 위쪽으로 좀 건네주세요.” 문 위를 넘는 휴지는 새 것의 여행용 휴지 한 팩이었습니다. 겉에는 편의점의 상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 온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휴지를 고맙게 받아들며 내가 얼른 말을 이었습니다. “저기 죄송한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바로 나가서그 휴지값을 지불하고 커피라도 한 잔 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역시 즉시 대꾸했습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기척도 없이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난제를 해결하고 얼른 밖으로 나왔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 일을 겪고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말이 바로 자비(慈悲)였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였습니다. 글이 길어져 다음 편지에 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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