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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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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5일 01시 06분 등록

 

지난 주 편지에서 나는 낯선 도시, 서울의 한 건물 화장실에서 휴지가 없어 겪은 곤란에 대해 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지도, 본 적도 없는 한 사람이 편의점에서 휴지를 사다가 내게 건네고 총총 사라졌다는 경험을 말하며 자비(慈悲)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떠올렸다고 말했습니다.

 

자비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자애로운 생각과 행동을 취하는 것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의 본뜻은 타자의 슬픔을 나의 것처럼 여기는 마음과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해야 오히려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를 도왔던 그 사람은 다른 칸에도 휴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말없이 화장실을 빠져나가 편의점으로 향했고 자신의 돈을 들여 여행용 휴지 한 통을 사다가 조용히 건네고 사라졌습니다. 얼핏 보면 그런 행동이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칸에도 휴지가 없는데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라고 말하고 자신의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돈을 들여 휴지를 사고 그것을 내게 건냈습니다. 이 행동은 화장실에서 휴지가 없을 경우 겪을 그 곤란을 그 자신의 그것처럼 생각할 때에만 나올 수 있는 행동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말없이 휴지를 건넨 뒤 총총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슬픔과 곤란을 돕는다는 의식조차 없는 상태로 누군가를 돕는 그런 행위를 불가(佛家)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보시 중에 최고 경지의 보시가 바로 이 무주상보시입니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을 줄 때 우리의 무의식은 어떤 보상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물질적 보상은 아니더라도 내가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자기만족적 심리보상을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주상보시는 이 계절 나무와 풀들이 각각 낙엽을 만들거나 제 줄기와 잎을 숲의 바닥으로 되돌려 놓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예컨대 거대한 팽나무 한 그루는 이 계절이면 봄부터 만들어낸 무수한 잎을 낙엽으로 만들어 떨궈버립니다. 그것은 다시 양분으로 썩어지며 흙의 힘을 북돋웁니다. 하지만 그 낙엽들이 오직 팽나무의 뿌리를 위해 썩어지지는 않습니다. 낙엽 중 많은 잎들은 바람과 중력과 어떤 개입에 의해 다른 공간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는 팽나무의 낙엽이, 저기서는 산벚나무나 단풍나무, 비목나무 따위의 낙엽들이 그렇게 떨어지고 또 흩어집니다. 결국 숲의 구성원들은 서로의 낙엽을 공유함으로써 비료 없이도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무주상보시의 경지를 이뤄내고 있는 셈이지요.

 

휴대용 휴지가 지닌 돈의 값어치야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준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않고 나의 곤란을 해결해 주기 위해 사다가 건네준 그 휴지의 고마움을 나는 이제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자비와 무상주보시를 체감한 나 역시 언제고 누군가가 요청할 어떤 도움의 순간을 외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들이 각자에게 들어서고 드넓게 확산될 때 세상은 살아있으면서도 천국을 경험하는 아름다운 날들이 되겠지요. 순박하게도 나는 그런 날의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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