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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5일 15시 24분 등록

정재엽, 파산수업, 비아북, 2016

 

 

그에게서는 천재의 기미가 느껴졌다. 10년 전 구본형연구소의 2기 연구원으로 함께 발탁되어 처음으로 올린 글에서 그는, 유명한 위인 4명을 불러내어 그들이 토론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식으로 글을 썼다. 그때까지 일기 정도의 글을 끼적이고 있던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업인 제약회사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으면서 문학과 클래식에 박식한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형 인간으로 보였다. 재기발랄하고 순발력있게 토론을 이어가며 높은 목소리로 웃어제끼는 그의 모습에서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모습을 떠올린 적도 있었다.

 

 

막강한 독서력과 유려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책은 늦어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구본형선생님이 작고하신 이후 선생님의 유고집을 내는데 참여했지만 그 때는 자료를 정리하는 차원이었으니 진정한 첫 책은 이 책을 잡아야 할 텐데 그는 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획을 갖고 있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능통한 만큼 카프카나 헤세처럼 유명한 작가의 작가론이었다. 그 때 원고를 읽어보았는데, 책 한 권에서 유수한 작가들의 작가론을 다루는 그의 해박함에 놀랐다. 하지만 그의 기획은 엎어졌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출간계약까지 하고 진행하다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원고마감이니 출판사 사정 같은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감히 말한다면, 그의 원고에 혹시 한 방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세상에 잘 쓰는 글은 많다. 그것도 너무 많다. 출판계는 날마다 어렵다고 하지,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극적인 요소가 갈수록 범람하는 세태에서 한 권의 책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저자와 편집자로 하여금 나머지 모든 조건을 무릅쓰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혹시 이 점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가정이다. 절친한 사이는 아니라도 10년을 지켜보며, 타고난 예술가형인 그를 강타한 부도가 너무 드라마틱해서 새삼 산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부도가 났고, 5층짜리 사옥과 강남의 아파트는 남의 손에 넘어 갔으며, 크고 작은 소송이 33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부정수표방지법에 의해 구속 수감되어 많은 일을 그 혼자 처리해야 했다. 3년간 기업 회생신청을 하고 M&A에 이르기까지 채권자와 법원을 오가며 혹독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놀랍게도 그는 책을 읽는다.

 

 

채권자들이 욕지거리를 하고, 서류 뭉치를 제게 집어 던진 날, 저녁에 혼자 카프카의 <변신>에 귀 기울였습니다. 직장 동료였던 사람이 제가 활동하던 인터넷 공간에 부도 사실을 폭로하고 저를 비방했을 때, 저는 사과의 글을 남기고 그 공간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교보문고로 가서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한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을 손에 들었습니다. 사고 싶었지만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 채로 읽어 버렸습니다.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도 같습니다. 소매로 콧물을 닦았던 것 같고요. 옆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좀 민망했습니다. 공금횡령사건으로 조사를 받으러 간 검찰 로비에서는 <소공녀>을 읽었고, 무죄판결을 받은 날, 도토리 중고서적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수필집 <두레박>을 읽었습니다. (파산수업 중에서)

 

 

그렇게 다시 읽은 책들이 “파산”이라는 극한상황의 켜켜이 스며들어 진면목을 발휘한다. <데미안>이나 <기탄잘리>처럼 유명한 책으로부터 <비밀의 화원><작은 아씨들>같은 동화에 이르기까지 문학이 도서관에서 잠자는 퇴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혼령인 것을 증명하는 독후감들이 정말 좋다. 파산에서 얻은 열 아홉 개의 깨우침이 주옥처럼 빛난다. 이제 그의 문장을 가득 채운 절실함을 읽는다. 예전의 그의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은 망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문학으로 이겨내는 사람은 드물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결집한 사람이 소중해서 하는 말이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수려하되 이제 독자를 꿈틀하게 만드는 힘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 힘은 회사의 위기를 헤쳐나간 경험에서 나왔으며 오랫동안 사랑해온 문학의 세례를 받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함을 갖추게 되었다.

 

 

회사의 파산보다 더 위험한 것은 감정의 파산이다. 그는 문학이라는, 유사이래 가장 풍성한 보물창고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에 크나큰 위기를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었다. 절대로 쉽게 하는 말이 아닌데도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는 파산을 겪었기에 특별해 졌다. 예를 들어 문학을 말할 수 있는 회생전문가가 그리 많겠는가! 그는 겪음으로써 진짜가 되었다. 행여 남은 일이 있다면 기운차게 해결해 치우고 새로운 꿈을 꾸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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