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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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스민 문학]
세월호와 <노인과 바다>
(사진 출처: 동양신문)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073일 만이라고 합니다. 드러난 몰골은 검붉은 녹이 온 몸에 돋아 있고 생채기가 난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옆으로 뉘어져 있는 세월호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속 앙상한 뼈만 남은 거대한 물고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적당한 언어로 표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룻밤이면 될 것을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침몰. 구조 실패, 늑장 인양. 모든 것이 잘못돼 왔음을 세월호는 앙상한 뼈만 남은 거대한 물고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노인과 바다>속 노인 산티아고는 84일째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먼 바다까지 배를 끌고 가 낚싯줄을 내립니다. 그런데, 조각배보다 훨씬 크고 힘이 센 물고기 한 마리가 낚싯바늘에 걸리죠. 노인은 꼬박 이틀을 그 물고기를 뭍으로 가져오기 위해 사투를 벌입니다. 너무 꼭 쥔 나머지 손에는 쥐가 나고, 낚싯줄에 쓸려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결국, 마실 물마저 다 떨어지자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잠시 동요도 합니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죽을힘을 다해 싸웁니다.
물고기야, 네가 날 죽일 작정이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너도 그럴 권리가 있지. 나의 형제여, 난 너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상한 존재를 결코 본 적이 없다. 자, 어서 와서 날 죽여라. 누가 누굴 죽이든 난 이제 상관없다. (p.96)
기쁨도 잠시, 뱃전에 밧줄을 묶어 매달아 놓은 물고기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들이 노인의 배를 쫓아옵니다. 그는 남은 기운을 모두 짜내어 상어 떼와 싸우지만 겨우 뭍으로 돌아와 확인해 보니 물고기는 머리와 몸통의 등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부들은 노인의 뱃전에 매달린 거대한 뼈를 보며 감탄하고, 어린 소년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먹을 것을 싸 들고 노인의 집으로 갑니다. 노인은 소년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잠이 듭니다.
신문 1면에 나 있는 사진을 보며, 영국인 친구와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야기했습니다.
“왜 한국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직 침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 나는 타이타닉호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데, 그 사건의 경우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얘기하고 있는데.”
친구와 저는 신문을 보면서 한 숨을 깊이 내쉬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300명 넘는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사라진 대형 참사가 일어난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너는 나서서 얘기를 못 하는 거니? 이제 겨우 3년인데.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수록 더 해야지. 앞으로 100년 동안은 해야 하지 않겠니?”
어떤 분은 이야기합니다. “인명을 귀하게는 여기지만, 바닷물에 쓸려갔을지 모르는 그 몇 명을 위해서 수천억을 써야 겠냐”고.
9명의 시신을 구하기 위해서 수천억을 쓰는 것이 맞느지 않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월호는 단순히 경제적인 논리로만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 역사에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9명의 시신을 위해서 건져낸 것이 아니라, 이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경제적 논리로만 따지자면, 노인은 중간에 물고기를 놓고 얼른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상어떼가 몰려드는 그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그가 평온한 잠을 들 수 있었던 것도 1000억 이상을 썼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생에 맞서는 태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를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 그리고 어딘가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망망대해에서의 망자들에 대한 따스한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그래도 이렇게 되고 보니 저 물고기를 죽인 게 후회스럽군, 노인은 생각했다. (p.108)
정재엽 드림. j.ch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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