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윤정욱
  • 조회 수 1020
  • 댓글 수 5
  • 추천 수 0
2017년 4월 16일 23시 40분 등록

# 기숙사 그리고 주말 오후 세시의 짧은 단상 #

 

 

나는 회사 기숙사에서 산다. 2011 6월부터 살기 시작했으니, 곧 만으로 6년이 다 되어간다. 회사 기숙사는 원래 처음 살기 시작하고 2년이 지나면 별도로 집을 구해서 나가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신입사원이 차츰 줄다 보니 어쩌다 6년의 시간이 지났다. 내가 사는 이 곳 창원은 계획 도시답게 모든 것이 반듯하다. 전라도의 논과 경상도의 논을 두고 비교를 하자면, 전라도의 그것과 가깝다. 드넓은 평야에서 자란 모와 물길은 끝 간데 없이 뻗어있고, 반듯하게 각이 져있다. 넓은 땅에서 효율적으로 작업을 하려면 곡선으로 굽이진 땅 보다는 직선으로 쭉쭉 뻗은 땅이 일하기도 편하다. 경상도는 전라도와는 달리 산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래서 밭 농사를 짓는 곳이 많지만, 한 두 마지기 논을 부칠 땅이 있다면 물길을 돌리고 굽이치게 하더라도 최대한 공간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직선으로 가득 찬 계획 도시 창원, 그 가운데서도 시내 중심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곡선으로 된 야트막한 언덕과 작은 숲 그리고 그 사이를 빼곡하게 메운 높은 소나무들. 그 언덕과 숲으로 둘러 쌓인 곳에 한 뼘 오아시스 같은 나의 생활 공간이 있다. 나는 직선과 곡선이 만나는 곳,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구례나 하동 즈음 되는 곳에서 산다.

 

광역시를 준비하는 이 곳 창원에서도 그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기숙사. 이 곳에서는 밤이면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기숙사 출구를 기준으로 정면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어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하는 동네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기숙사를 나와 왼쪽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4월 봄 날, 진해 군항제 축제도 부럽지 않은 아름드리 벚꽃길이 충혼탑 사거리까지 500여 미터나 이어진다. 해마다 4월이 되면 뭘 조금 아는(?) 창원 사람들은 벚꽃 구경을 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는 진해를 대신해서 이 곳을 찾기도 한다. 4월 둘째 주말까지만 해도 아침 저녁으로 하루 종일 꽃비를 뿌리다가 지금은 많이 잠잠해졌다. 한 바탕 벚꽃의 축제가 끝이 난 후,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쓸쓸함이 기숙사 주변에 내려 앉으려는 찰나에 창원 병원 방면으로 5분만 걸어가면 나오는 외동 옛터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바탕 노란 유채꽃 바다가 펼쳐진다. 정말 노란 빛깔로 사방이 난리가 난다. 시내 한 복판에 그 넓은 땅이 빈터로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넓은 땅에 그렇게나 많은 유채꽃 물결이 흐를 수 있는지도 놀랍다. 바람이라도 한 번 불라치면 금빛 파도가 여기저기서 넘실거린다. 옛날 시골 마을에 한 번씩 찾아와 시끌벅적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서커스 공연단이 벚꽃의 매력이라면, 외동 옛터 유채꽃밭의 매력은 그 공연을 몰래 훔쳐 보는 장터 국숫집 막내 딸의 그것과 같다.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하고, 그 매력은 은은하고 또 오래 간다.

 

4월 중순의 봄 햇살을 받으며 다시 외동 옛터에서 창원 병원을 왼편으로 끼고 조금만 더 걸어오면 금방 기숙사로 돌아온다. 기숙사는 봄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품에 안긴다. 4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한 영국 시인은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온통 초록으로 가득하고 천지가 약동하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4월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갖는 고민과 번잡함은 변하지 않았음을, 그 부조화를 말하는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시 기숙사로 눈을 돌려보면, 주변에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반갑다. 그래서 주말에는 정오의 태양이 기숙사로 그대로 떨어진다. 왠지 그런 날은 작아진 그림자만큼 나도 작아지고, 괜히 사람 겸손한 척 마음이 변하기도 한다.

 

내가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숙사 주변을 둘러싼 숲과 그 안에 빼곡히 들어 선 높은 소나무들 때문이다. 심지어 낮에는 끊임없이 새 소리가 들린다. 나는 길을 가다 나무에서 새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의 범인을 꼭 찾아보곤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이지 쉽지가 않다. 분명히 새소리를 들었고, 그 뒤로 새가 다시 푸드득 하며 날아간 적도 없는데, 소리의 주인을 찾기가 참 어렵다. 열 번을 찾아보면 주인을 찾는 것은 다섯 번 정도가 고작이다. 하물며 숲 속에서 나는 새 소리는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주인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듣는다. 날이 좋으면 낮에 창문을 다 열어두고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침대에 누워 창틀에 발을 올리고 잔다. 대단한 이유도 없고, 대단한 목적도 없다. 그냥 잔다. 대신 조금 천천히 잠들려고 노력한다. 햇살만 들어와도 너무 좋은데 바람까지 살랑하고 불어주면 그걸로 끝이다. 내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풍만한 행복감이 온 몸을 지긋이 누른다. 침대가 녹으면서 나를 자꾸만 밑으로 끌어당긴다. 저항할 힘도 없이, 그렇게 할 의지도 없이 나는 깊은 잠에 빠져 든다.

 

오후 세시. 잠에서 깬 후 빈둥거리기를 좋아하는 나도 고민이 많아지는 시간이다. 진정한 술꾼은 술에 취한 몸을 술로 깨우듯이, 진정한 잠꾼은 잠에 취한 몸을 여분의 잠으로 깨우는 법이다. 하지만 나 같은 프로 잠꾼도 아무리 낮잠을 자고 또 자도 오후 세시를 넘기기는 힘들다. 허리도 아프지만 내심 무엇이든 하라는 내 안의 무언가로부터의 무언의 지시이자 압박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오후 세시를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이르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했다. 주말 오후 세시는 딱 그런 시간이다. 혼자 있기에는 남은 하루가 길고, 누군가와 새로 약속을 잡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주말 오후 세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주말 오후 세시에 일어나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결국 남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많이 닮았다. 이 질문의 핵심 주제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며, 이 질문에 답을 할 때 우리는 누운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답변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일종의 의무와 같다. 우리는 다시 잠을 청할 수도 있고, 책을 읽고 나서 글을 쓸 수도 있고, 다른 약속을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을 하던 그 행동은 전적으로 나의 결정에 의한 것이어야만 한다. 자신의 결정에 따른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행동에 따른 책임도 함께 지겠다는 의미다. 잠을 자기로 결정했다면 하루를 마무리 할 때 많이 잔 것에 대한 후회가 없어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했다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하루를 마무리 할 때 다른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가 결정해서 한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물로부터 적게나마 배울 수 있고, 이것은 다시 우리의 경험이 되어 그것이 축적되면 결국 우리의 자산이 된다. 가장 잘못된 것은 잠을 자기로 스스로 결정했으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며 낮에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지 않겠다는 것이자,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어느 주말 오후 세시에 일어난 지금,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했다. 연구원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고, 나는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빠른 것도 없고, 늦은 것도 없다. 오늘은 그냥 나의 인생에 주어진 주말 오후 세시같은 하루일 뿐이다. 내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오직 나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의미는 행동 속에서만 존재 한다. 또한 모든 답 역시 행동 속에서만 존재 한다. 질문에 대한 반복 된 고민은, 고민에 대한 또 다른 무의미한 질문만 낳을 뿐, 그 안에는 아무런 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질문에 대한 의미와 답은 '구체적인 행동'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잠에서 깨어 이른 오후 세시를 맞이했고, 오늘 저녁 잠들기 전에 하루를 어떻게 돌아 볼지 매우 기대가 된다.

IP *.87.107.169

프로필 이미지
2017.04.17 10:59:21 *.146.87.24

티올아~~ 너는 정말 무슨 철학자 같아! 깊어 깊어^^ 왠지 나한테 질문하는 거 같기도 하고

일단 나도 움직이련다!!

프로필 이미지
2017.04.17 12:08:05 *.106.204.231

가벼움으로 시작해서 묵직하게 끝나네. 백번의 고민보다는 한번의 행동이 낫다?

프로필 이미지
2017.04.17 19:25:11 *.39.102.67

알콜좀비에 대한 서정적 찬사? ㅋ

프로필 이미지
2017.04.21 13:10:26 *.94.41.89

오후 세시에는 님께 전화해서 저녁 약속을 잡고 싶네요! 화이팅

프로필 이미지
2017.04.23 19:38:52 *.5.22.92

기숙사에서 ;막걸리 한잔 나누면 카~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32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6] 보따리아 2018.01.15 1027
4831 개발자의 오만함(Hubris) [7] 불씨 2018.04.29 1027
4830 #30 사장님 나빠요~ (경영자의 독선) [2] 불씨 2018.12.09 1027
4829 [칼럼1] 마흔에 채운 책에 대한 허기(정승훈) [5] 오늘 후회없이 2017.04.16 1028
4828 [칼럼 #7] 거위의 꿈(정승훈) file [11] 오늘 후회없이 2017.06.04 1028
4827 칼럼 #17 처음 불려간 선도위원회 (정승훈) [7] 정승훈 2017.09.02 1028
4826 칼럼 #20 골뱅이무침과 칭찬의 기술_윤정욱 [3] 윤정욱 2017.10.02 1028
4825 6월 오프모임 후기(김기상) [2] ggumdream 2017.06.20 1029
4824 또 다시 칼럼 #24 소년법을 폐지하면...(첫 번째) file 정승훈 2018.11.04 1029
4823 싸움의 기술 박혜홍 2018.11.26 1029
4822 1주1글챌린지_아이와함께하는삶_05 [8] 굿민 2020.06.21 1029
4821 혼자 하는 녹화 강의 여러 버전들 정승훈 2020.09.05 1029
4820 1주1글챌린지_아이와함께하는삶_03 [6] 굿민 2020.06.07 1030
4819 <칼럼 #4> 대한민국을 희망한다 - 장성한 [6] 뚱냥이 2017.05.08 1031
4818 5월 오프모임 후기_이수정 [5] 알로하 2017.05.23 1031
4817 #1 자기소개 - 희동이 [6] 희동이 2020.05.24 1031
4816 [칼럼#6] 꿈에서 걷어 올린 물고기 한 마리 (윤정욱) [5] 윤정욱 2017.05.29 1032
4815 #24. 폭력에 관한 고찰 [2] ggumdream 2017.11.06 1032
4814 또 다시 칼럼 #1 화해조정위원에게 듣는 피가해자 관계회복(정승훈) [11] 정승훈 2018.04.10 1032
4813 어쩌다 남중생 수업풍경-야! 이 개새끼 씨빨 새끼야 [4] 지그미 오 2020.08.30 1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