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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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가정경제가 흔들렸을 때가 있었다. 부모님 중 누가 원인 제공자고, 누가 억울한 피해자인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매일같이 반복되는 부모님의 다툼(전쟁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수 있겠다)으로 인한 ‘정신적 학대’를 내가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등교로 포장된 ‘지옥에서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천국을 뒤로 한 채 등교하는 가장 친한 친구 김00을 만났다. 친구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더 크게 웃었다. 내 얼굴에 거짓 행복을 치장하고서 말이다. 친구와 비교했을 때 행복하지 못한 나의 모습에 화가 났다. 분노했고, 부모를 원망했다. 그 당시 아버지는 퇴역군인으로 막말로 ‘놀고’있었고, 반면 친구의 아버지는 은행지점장이었다. ‘은행지점장 아들이라 행복한가?’ 그래서 은행지점장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분노’라는 친구와 처음 사귀게 되었다.
10여년이 흐른 30대 초반, 나는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내가 ‘실패한 이혼남’이라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에 의한 상처는 나를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가둬버렸다. 누군가의 웃음이 나에 대한 비웃음으로 들렸다. ‘나는 살 가치가 없어’라는 소리가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내가 세상에 다시 편입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에게 이런 아픔과 시련을 준 신을 증오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소리쳤다. 결국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사회에 대한 분노,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의 작은 충고와 조언에도 분노하게 만들었다. 나의 분노는 나를 잠식해 들어갔다. 내 안에 순풍을 타고 순항하던 ‘행복선(船)은 결국 침몰했다.
분노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와 ‘나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보다 넘치는 것도 ‘나’이고, 부족한 것도 ‘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과한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그냥 온전히 ‘나’다.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로 인해 불행이란 치명상을 입게 된다.
또한 분노는 열등감에서 온다. 열등감은 비겁함이다. 자신의 한계를 제한하고 그 속에 숨어버리는 비열함이다. 세상에 ‘나’를 던지는 것을 무서워하는 치졸함이다. 실제로 주위를 둘러봤을 때, 본인을 욕하거나 삿대질하는 사람은 없다. 겁을 주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걱정하고 응원하고 있다. 만약 그것을 보고, 듣지 못한다면 역시나 분노가 창궐하여 불행을 가속화 시킨다.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상심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그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인간은 우주를 통제할 수 없다. 즉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소우주는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세상과 소통해 볼 수 있는 시도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조건’이 된다. 세상의 이치가 조건이 있으면 그 조건으로 말미암아 ‘결과’를 양산한다. 지금 내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조건’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쉽다.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것은 분노다. 지속적인 분노는 당연히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 지속된다는 것은 습관이라는 것이다. 즉 분노도 습관이 된다. 분노를 통한 감정의 표출이 사람을 평온한 상태로 이끌고, 원인을 해결한다는 통념은 틀린 것이다. 분노를 표현하면 화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쌓이게 만든다는 과학적인 연구결과가 있다. 분노에 대한 역치가 낮아져 나중엔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분노는 일상을 힘들게 만들고 불행의 안내자가 된다.
행복을 원한다면 분노의 습관을 과감히 끊어야 한다. 그리고 행복의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물론 고통이 따른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혀가 꼬부라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몸짱이 되기 위해서는 달리기와 아령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기에 우리는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포용하는 인내다. 행복은 나 뿐만 아니라 누구에나 궁극적인 목표다. 우리는 행복 습관을 체화하기 위한 즐거운 고통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분노조절은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감을 고양시키기 위한 첫걸음이다. 화내지 말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