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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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말해요 – 두번째 이야기
지치지 않는 직장생활이 있을까요? 며칠 전 상사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서 맥이 풀려 퇴근을 했습니다. 상사도 답답했던 거지요.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위태로워 졌으니까요. 소위 ‘노오력’을 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엉망진창 마음 상태로 퇴근 전철을 탔습니다.
지친 마음을 달래줄 것을 찾아봅니다만 아쉽게도 앉을 자리도 없습니다. 가방도 자켓도 벗어 선반에 올려 놓고 넥타이도 풀었습니다. 깊은 숨을 몇 번 내쉬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열고 콘텐츠를 찾습니다. 그러다 문득 몇 해 전 썼던 자작시가 기억났습니다. 시를 쓴 날도 오늘만큼이나 엉망진창인 마음상태로 퇴근 전철을 탔던 기억이 납니다. 자판기에서 뽑은 식혜를 마시다가 문득 시를 썼습니다.
[ 잔칫집 식혜
]
보아라
뉘 집 잔치인지도 모르고
식혜는 또 삭고 있지 않더냐
그 맛이
또한
맛나지 않더냐
몇 번 반복하여 읽었습니다. 식혜 맛이 입안에 퍼집니다. 웃음이 나옵니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이룩한 결과물을 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것이 결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분노하며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어보기도 합니다. 허탈함에 술잔을 기울여 보기도 합니다. 그런 직장생활을 십 수년 반복하며 근성이 생긴 건지 다음 날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일터를 향해 왔습니다. 분명 내일 아침이면 저도 늘 그래왔듯 툴툴 털고 일어날 것입니다.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해봐야 깊어집니다. 오늘 마음 아픈 일을 계기로 제가 좀 더 깊게 성장하기를 희망합니다. 여전히 마음은 아픕니다. 그래도 시 덕분에 웃었습니다.
블로그에 기록해 놓은 제 시를 찾다가 작은 딸이 쓴 시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름 식혜]
달달한 숲 속에
싹이 돋아나
무럭무럭 자라서
쌀이 돋네요.
작년,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책이 나오고서 꽤 여러 도서관에 초대받아 강연하러 다녔습니다. 한번은 충남 태안도서관을 방문했습니다. 아내가 강연을 하는 동안 두 딸을 데리고 식당을 찾았습니다. 장시간 운전으로 지친 만큼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후식으로 식혜가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작은 딸이 식혜를 몇 모금 마시더니 시를 지어 보겠답니다. 조심스럽게 읊조리는 걸 제가 받아 적었습니다. 지친 딸에게 한 모금 식혜가 그리 맛났나 봅니다. 제목도 ‘식혜’ 보다는 ‘여름 식혜’라고 붙여 달라고 했습니다. ‘여름’이라는 단어 하나 붙였더니 시에서 시원한 청량감마저 느껴집니다.
딸의 시를 몇 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딸이 이 시를 읊조리던 소리가 다시 들려옵니다. 딸이 경험하는 세계로 이끌립니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딸 손에 들린 작은 식혜 그릇에 그만 풍덩 빠져 버렸습니다.
퇴근길 전철에서 작은 딸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지치고 힘들어도 제 뒤에는 제 가족이 있습니다. 저에게 가족은 제가 깊어질 수 있는 근원입니다.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날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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