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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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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4일 01시 11분 등록

< 개구리 풍경 >

 

늦은 밤 창문 열어 봄비를 바라본다

봄비는 쏴아 쏴아 유난히 들떠있고

바람은 수줍은 듯 조용히 잦아든다

창틀엔 먼지 쌓인 개구리 風磬 하나

목 놓아 개굴개굴 외로운 風景 되어

 

 

# 청개구리와 주홍글씨 #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시골 집이 있던 청송 초막골에는 개구리가 참 많았다. 흔히 비가 올 때 개구리가 제 어미의 무덤이 떠내려 갈까 서글피 운다고 하지만, 내 기억에는 봄에는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울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요상한 개구리들은 내가 근처에 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같이 알고 울음을 멈춘다. 그러다 내가 조금만 발걸음을 옮길라치면 또 사정이 목 놓아 운다. 난 개구리가 아니라서 그 봄날 목놓아 울던 수 많은 개구리가 기뻐서 우는지, 슬퍼서 우는지, 아니면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것인지 알아차릴 방법은 없었지만, 한 가지 또렷하게 느꼈던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간절함 이었다. 간절히 기뻐했고, 또 간절히 슬퍼하는 듯도 보였다. 만약 그것이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소리였다면 그 간절함은 차라리 초혼(招魂)에 가까웠다.

 

나는 청개구리와 인연이 제법 많은 편이다. 우선 어렸을 적 별명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꼴통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청개구리였다. 꼴통은 주로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별명이었는데, ‘청개구리는 주로 누나들이 나를 부르던 별명이었다. 만화가 허영만은 대표작 식객을 통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의 수는 모든 어머니의 수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 그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아마 이 세상 모든 청개구리는 아들로 태어난 남자의 수와 같다는 말로 변명을 삼고 싶다. 그렇다. 남자들은 모두 한 때 잠시나마 청개구리에서 종래에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특이한 종족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 한해서만 우리는 진화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철이 든다라는 표현을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청개구리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게는 청개구리와 관련 된 지독한 트라우마가 있다. 계기는 내가 예닐곱 살 즈음 되었을 때, 청개구리 한 마리를 죽이고 나서부터였다. 장소도 뚜렷이 기억이 난다. 청송 초막골 골안 큰 아버지 댁 뒷마당이었다. 혼자서 무료하게 놀고 있었던 어느 날, 나는 뒷마당에서 청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지금도 내가 그 당시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날 나는 뒷마당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대나무 죽창을 쥐고, 그 청개구리 한 마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찌르고 비틀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뻐근하다. 나는 당시의 나의 행동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어린 아이의 호기심과 철 없는 행동이라는 말로도 나는 당시의 나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한 생명이 갔다.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세상에는 수 많은 죄악이 있다. 잊고 살려면 잊혀지기도 하지만, 그 옛날 청개구리의 그것처럼 끊임없이 나에게 잘못을 따져 묻는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영문학자이자 교수이며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던 장영희 교수는 그의 대표작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자신이 한 때 한 남학생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마음의 성역(Sancity of the Human Heart)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하며, 19세기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대표작 『주홍글씨』를 소개한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 헤스터를 둔 늙은 남편 칠링워스는 어느 날 딤즈데일 목사가 아내와 불륜을 범한 사실을 알고는 교묘하게 딤즈데일 목사에게 접근해 그의 영혼을 고문하게 된다. 간통녀를 상징하는 주홍글자 “A”를 가슴에 달고 묵묵히 살아가는 헤스터와 괴로움에 날로 쇠약해 져가는 딤즈데일 목사 그리고 이들의 영혼을 괴롭히는 칠링워스. 괴로워하는 헤스터에게 딤즈데일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은 죄는 남을 해치지는 않았으나, 냉혹하게 남의 마음의 성역을 칠링워스야 말로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이요!”

 

작가는 누군가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것을 가장 악한 죄악이라고 말한다. 오래 전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적이 있었다. 내 영혼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봐 주었던 한 친구에게 지키지 못할 많은 약속을 했고, 우리는 작은 개구리 모양 풍경(風磬) 하나씩을 서로 나눠가졌다. 시간이 지나고 그 약속들이 지닌 의무의 무게가 현실로 다가올 때 즈음 나는 현실에서 도망쳤다. 그를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도, 언어가 다른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겁이 많았고 이기적이었을 뿐이었다. 친구는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죄를 범했다.

 

봄비가 세상을 품고, 머리를 쓰다듬었던 어제,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오늘 같은 날이 좋겠다고 생각이 될 즈음, 방 안에서 문득 창 밖을 보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투두둑하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창문을 반 틈 정도 열었더니, 봄바람은 허락도 없이 방안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 제멋대로가 싫지는 않았다. 수 많은 생각들은 살랑하고 부는 봄바람을 타고, 창 밖 저 멀리 날아가는 듯 하다, 다시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참을 날아 나의 과거를 자책하기도 했고, 또 오려면 한참이나 남은 미래로 날아가 불안함에 괴로워했다. 그러기를 한참, 살랑하고 봄 바람이 다시 부는가 싶더니, ‘딸랑하며 창틀에 매달아 둔 풍경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청개구리였다.

 

봄비와 바람, 개구리 풍경과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외로운 풍경이 되었다.

 

IP *.87.107.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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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5 10:52:26 *.18.218.234

나랑 띠동갑인 동기막내가 쓴 게 아니라 어디 조선조 선비가 어린 시절을 읊조리며 쓴 거 같은.

시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뭔가 가락이 느껴지는 글.


어린 아이들이 동심만 갖고 있다는 건 어른들의 착각.

개미나 벌레 등을 상대로 잔인한 본성을 휘두른 기억은 다들 하나씩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청개구리는 덩치가 크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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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7:42:34 *.81.34.124

살면서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라고 묻고 싶네요.

이 글을 읽으면서' 저도 타자들에게 셀 수 없이 알게 모르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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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8:44:32 *.129.240.30

철학적이면서도 시적인 칼럼..^^  오락가락 불안한 봄 날씨를 빗대어 혼란스런 작가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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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7 10:15:07 *.106.204.231

그 청개구리는 이렇게 괴로워 하는 정욱님을 보면서 용서를 해주었을 겁니다. 친구 역시 마찬가지일겁니다.

저 또한 오늘 하루  마음을 침범한 사람들에게 제 마음속 깊이 용서를 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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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8 22:45:32 *.234.136.166

그날밤 내가 도착한 곳.

아무도 반기지 않는 곳.  논밭 한가운데 유일하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넨 존재 개구리.

개굴개굴.

어찌그리 서글프게 마음에 젖어들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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