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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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땅끝 마을과 보길도에 대해서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생 때, 그 곳을 다녀온 선생님으로부터 였다. 그 때만 해도 노처녀로 분류되던 30대 초반의 여선생님은 휴일이면 전국의 이곳 저곳을 놀러다니고, 가끔 수업 시간에 여행다닌 곳의 얘기를 재미있게 들려줘서 어린 소녀들의 가슴에 여행과 자유로운 삶이라는 불을 지피시곤 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런 저런 곳 중에서도 특히나 땅끝 마을은 이름이 맘에 들었는지, 나는 그 곳이 너무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었기에 당장 갈 수는 없었고, 대학생이 되면 꼭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바빴는지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땅끝 마을과 보길도를 못 가봤다.
내년 졸업여행에는 꼭 보길도와 땅끝 마을을 가보고 싶다.
우리나라의 땅끝 마을은 못 가봤지만 대신에 나는 유럽의 땅끝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지브롤타(Gibraltar) 라는 곳에서 잠시 살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지브롤타는, 지리적으로는 스페인에 속하지만 정치, 행정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영국령의 도시 국가다.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의 홍콩과 비슷한 경우인데, 홍콩보다는 훨씬 작은 인구 약 3만명 정도의 아주 작은 나라다.
이곳에서 나는 2002년 11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년이 조금 안 되는 동안 살면서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맞았다. 2003년 12월 31일, 새해를 환영하는 불꽃놀이를 보면서 ‘나의 20대는 이렇게 가는구나, 잔치는 끝났네’ 라며 한탄하기도 했었다. 한달 후 진짜로 서른살이 되는 생일 즈음에, 20대를 보내는 아쉬움과 서른을 맞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생일 파티 대신에 뭔가 다른 이벤트를 하고 싶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마흔이 되는 친구가 자신도 기념할 만한 일을 하고 싶다며 지금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 금기를 깨는 도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며칠 간의 고민 끝에 친구가 생각한 일은 문신이라고 했다. 그 때까지 한번도 문신을 못해봤다며 마흔이 되는 기념으로 문신을 하겠다고 했다. 마침 용띠인 친구는 어깨에 용 문신을 하겠단다. ‘뭐라고? 용 문신이라고?? what the h...,
내가 원한 건 그런게 아니었는데… 친구 따라 나는 호랑이 문신이라도 해야하나.’
하지만 나는 문신을 할 정도의 과감함은 없었기에, 10년 뒤에 마흔이 되는 기념으로 문신을 하기로 약속했고, 대신에 이번에는 배꼽에 피어싱을 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두가지 모두 한 숍에서 가능했다. 떨리는 몸과 마음으로 치과 침대 같은 데에 누웠는데, 배꼽 피어싱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버렸고 얼음 찜질을 잘 해서인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이렇게 나의 이벤트를 금세 마치고, 문신을 새기고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이제 막 시작했다는데 친구는 벌써부터 눈물을 참아가며 아파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용 그림은 아니고 한자로 ‘용(龍)’자를 새긴다고 했다. 유럽인들에게 한자는 문자라기 보다는 그림처럼 보인다더니, ‘龍’자가 멋있어 보였나 보다.
동독 출신의 180cm가 넘는 큰 덩치의 여자였던 친구는 평소에 동료들이 ‘동독비밀경찰’ 출신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엄격하고 무서운 매니저였고, 나는 회사 밖에서 그녀와 친구로 지내는 몇 안 되는 직원 중의 하나였다. 그런 친구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문신을 새기는 걸 보니 그 고통이 가히 짐작되었다. 뭐라고 위로해줄 수도 없고 축하하기도 뭐한 그런 시간이 흐르고 용문신이 완성되었다. 친구는 고통을 참아낸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며 용이 잘 보이게 민소매 옷만 입고 다니겠다며 나에게도 피어싱이 잘 보이도록 배꼽티를 입고 다니라고 했다. 실제로 친구는 그 후에 회사에 민소매 옷을 입고 보는 사람마다 용 문신을 자랑하고 다녔지만 나는 차마 배꼽티를 입고 출근하지는 못 했다.
나의 배꼽 피어싱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엄마의 온갖 구박 속에서도 6년 이상 유지됐었는데, 2010년 초에 갑자기 살이 너무 찌면서 뱃살이 피어싱을 눌러서 배꼽 주변이 곪는 바람에 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의 충격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3개월 동안 15kg을 뺐었다. 그 후 피어싱은 배꼽 주변에 흔적만 남았고, 나는 피어싱도 마흔이 될 때 하겠다던 문신도 잊은 채 바쁘게 살았다.
서른 맞이 이벤트를 했던 해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2014년, 나는 직장을 그만둔 뒤에 유럽과 모로코를 여행하기로 했고, 친구들이 살고 있는 지브롤타를 방문했다. 매니저였던 친구는 그 사이에 회사에서는 부사장이 되었고, 막 첫 돌이 지난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엄마를 닮아 딸도 일찍 아이를 낳았다며, 쉰 살에 벌써 할머니가 되었다고 투덜댔지만 행복해 보였다.
하필 겨울이라 긴 소매 옷을 입고 있어서 어깨의 문신을 볼 수는 없었다. 용문신은 잘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랬다가 혹시라도 내게 마흔이 된 기념으로 호랑이 문신을 하라고 할까봐 차마 못 물어봤다.
문신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흔이 되던 해부터 나는 매년 한 가지씩 그동안 한번도 못 해봤던 일에 도전하며, 스스로에게 씌운 금기를 깨려고 한다. 마흔에는 자발적으로 백수가 되어 파리에서 한 달간 낮술과 (가위 없이 잘 수 있는)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5개월간 돈벌 생각 안 하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마흔 하나가 되던 해에는 달리기를 시작했고 생전 처음 달리기 대회에 참가해서 5km를 뛰었다. 그리고 마흔 둘이 되던 해에는 벨리 댄스 공연을 했다.
이제 마흔 셋이 되는 해에 나는 처음으로 나의 일을 시작하기로 했고, 변경연의 연구원이 되었다. 마흔 넷이 되는 해에는 아마도 나의 첫 책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쉰이 되는 해에는 등에 호랑이 문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