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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8일 04시 24분 등록

신화의 힘

 

조셉 켐벨 / 빌 모이어스(이끌리오)

 

저자에 대해서

Joseph John Campbell(1904.03.26~1987.10.30)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교신화학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메리칸인디언에 대한 책을 읽고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토템 기둥에 매료되면서 평생의 신화 탐구를 시작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중세문학으로 석사와 학위를 받고 파리와 뮌헨의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34년부터 새러로렌스 대학 문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대중적인 강연으로 알려졌다. 198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저자는 개인적으로는 비교신화학자라기 보단 오히려 철학자이자 종교적 지도자와 같은 느낌이 든다. 저자는 신화라는 키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구성 원리와 신비에 접근한 듯한 느낌이다.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 더욱 더 그런 느낌이다. 대공항이라고는 하나 그 시절에 숲에 들어가서 홀로 독서를 통해서 세상의 비밀을 추적해 나간 삶은 그 선택과 결정 자체로 다른 범인들과의 차별점을 가져오는 듯 하다. 그는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를 설명해 주고 있는 듯 하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세상의 비밀을 문틈으로 나봐 아주 조금 그 실체를 보고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거대한 그 모습을 다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아니 보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내가 본 적이 없는 것이기에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주요저서

  1.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2. 신화의힘

  3. 신의가면 (1~4)

  4.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

  5. 신화와 함께하는 삶

  6. 신화의 세계

  7. 야생 수거위의 비행

  8. 신화 이미지

  9. 여신들

  10. 네가 바로 그것이다.

     

    *신화의 힘에 대한 이야기

    조셉 캠벨은 전설적인 인터뷰어이자 아이디어 수집가이기도 했던 빌 모이어스와 마주앉아 긴 대화를 나누는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지 루카스의 스카이워커 랜치(Skywalker Ranch)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해를 넘겨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으로 이어졌다. 24시간에 걸친 날것의 결과물은 한 시간 분량의 에피소드 여섯 편으로 나뉘어 1988, 캠벨이 영면에 든 지 얼마 안 되어 PBS에서 방영되는데, 이는 공중파 텔레비전의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시리즈물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모이어스와 PBS 제작팀은 텔레비전 방송으로 제작되지 않은, 4분의 3에 달하는 미 편집 대화분이 대중의 주목을 받을 만할 뿐 아니라 보존할 가치가 있을 만큼 풍부한 깊이를 지녔다고 판단되어, 방영 직후 완전한 대화 기록이 <신화의 힘(Power of Myth, 퍼블릭 라이브러리)>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는데, 이는 자아의 신화와 문화적 신화 및 심리적 원형들과 영성에 관하여 캠벨이 들려주는 입체적인 논의를 보여준다. – Brainpickings 인터뷰 중

     

    *저자의 삶

    뉴욕에서 태어날 당시 캠벨의 집안은 상위 중산층 가정이었으며 미국에서는 드문 가톨릭 가정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캠벨은 어느 날 아버지가 데려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보게 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맨해튼에 있는 미국자연사박물관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특히 박물관 한 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고. 그는 곧 인디언 사회의 여러 측면에 공통적으로 신화가 엮여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신화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1921 코네티컷의 캔터베리 스쿨을 졸업한 캠벨은 다트머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1925 중세 문학 석사, 1927 영어 문학 석사 학위를 수료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캠벨은 1927년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특히 1924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동안 선상에서 만나게 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금강경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힌두교인도 신화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관심 분야가 넓어지자 기존의 전공이었던 중세 영문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박사 학위 과정을 중단한다. 이후 대공황이 닥쳐오자 5년 동안 무직 상태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는데, 본인은 훗날 기본 독서와 공부는 이 시기에 거의 다했다며 회고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소설가 존 언스트 스타인벡과 해양생물학자 에드워드 플랜더스 로브 리케츠와 교류하였다.
    1934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세라 로런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4)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식도암 합병증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들은 물론 1900년대 중반의 학문적 성과에 기반해 있다는 시대적인 한계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창작 지망생이나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으며, 스타워즈 시리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나 다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 역시 그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사후 출간된 대담집 <신화의 힘> 등이 특히 밀리언셀러로 유명한데, 아마존에 들어가봐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인기가 대단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들이다. 그 외에 <신의 가면> 4부작과 <신화와 함께 살기> 등도 유명하며, 조지프 캠벨 재단에서는 그의 유고와 강의안, 대담집 등을 정리한 유작을 계속 출판하고 있는 중이다.
    나무위키 중 발췌 정리

     

    * 죠셉 캠벨이 말하는 신화와 교감하는 방법

    "읽고 또 읽는 겁니다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베스트 셀러를 기웃거려도 안됩니다. 

    붙잡은 작가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그런 다음에는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그러나 이 작가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이렇게 하면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190)

    [출처] 조셉 캠벨 - 신화의 |작성자 성장연구소

     

    대담자  빌 모이어스(BILL MOVERS) 
    미국 저널리스트. CBS 뉴스와 PBS(사회교육방송)를 통해 시청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사상가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과 학문적 성과롤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역자 : 이윤기

한국의 소설가·번역문학가·신화학자.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등 움베르트 에코의 번역으로 유명하며 신화학 저서로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등이 유명하다. 《숨은 그림 찾기 1》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두물머리》로 제8회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주요저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1·2·3(2000~2002),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신화》(2002), 《숨은 그림 찾기 1(1998), 《두물머리》(2000)

역자의 삶

1947 5 3일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출생하였다.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이후,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가 1996년까지 미시간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을 지냈으며, 1997~2000년 동대학교 사회과학대 비교문화 연구원을 지냈다.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약 200권을 번역하였는데, 토머스 불핀치(Thomas Bulfinch)의 《그리스·로마신화》(1989)를 비롯하여, 《그리스인 조르바》 《뮈토스》 《변신이야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등이 있다. 특히 1980년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열풍을 몰고온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은 그의 번역으로 유명하다. 신화학 저서로는 각각 신화를 이해하는,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키워드로 풀어 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1·2·3(2000~2002)가 대표적이다. 이외에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신화》(2002)가 있다. 장편소설로는 《하늘의 문》(1994), 《햇빛과 달빛》(1996), 《뿌리와 날개》(1998), 《나무가 기도하는 집》(1999), 《그리운 흔적》(2000) 등이 있으며, 소설집으로는 《나비넥타이》(1998), 《두물머리》(2000)가 있다. 연작장편소설로는 《내 시대의 초상》(2003)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무지개와 프리즘》(1998), 《어른의 학교》(1999),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2000), 《이윤기가 건너는 강》(2001) 등 다수가 있다. 19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 1》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한국번역가상과 소설집 《두물머리》로 제8회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비록 역서라고는 하지만 만만치 않은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우리 번역문학의 한 차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번역은 새로운 창작에 버금갈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번역작업에 오래 종사하면서 언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깊이 천착해 온 작가답게 그의 문체는 가장 우리말다운 표현을 잘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보편적인 상징과 은유체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서술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만치 않은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

특히 우리 소설가들이 이야기의 서술에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지만 인물들의 대화를 재현하고 생동감 있게 만드는 데 다소 부족하다는 일반적인 경향을 감안할 때, 그의 작품들은 늘 살아 있는 인물들이 직접 대화에 참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대화’로 구성되어 무척 신선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대화의 구조가 간명하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장면을 연출하는 힘은 오랜 습작기와 다수의 외국 문학 작품의 번역을 통해 얻은 작가수업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윤기 [李潤基]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네이버 지식백과] 이윤기 [李潤基] (두산백과) 중 발췌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난 지금까지 저자가 교수인줄 알았다. 이번에 저자를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사회에 편견에 맞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리고 나 역시 그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구나란 반성을 했다. 주요 해외 명저를 번역할 정도면 당연히 교수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윤기는 세상의 기준이라는 잣대와 싸우며 자신만의 바이오그래피를 만들어 왔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조셉캠벨과 이윤기의 저자 조사를 통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싶다는 마음을 접게 되었다. 이윤기작가가 인터뷰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첫 목적은 종교학 박사학위였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박사학위란 것은 ‘현미경 수술’이었다. 유장한 학문의 강물, 그중 물방울 하나를 콕 찍어 7, 8년을 물고 늘어져야 하는 고심참담한 일. 깨끗이 포기했다. 대신 많은 책을 읽기로 했다. 괜찮은 소설도 쓰고 싶었다. ‘이제 내 목소리를 내겠다, 나보다 못 쓰는 인간의 책은 더 이상 번역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리고 1994, 첫 장편소설 ‘하늘의 문’( 3)을 상재했다.”

그의 말에 공감이 가면서 역자의 삶에 경이를 표한다.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10

부서진 질 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신화가 우리의 의식체계의 자리잡고 있어서 중요한다는 것인가?

 

P10

재판관이라는 위치가 단순한 직업적 역할만을 상징한다면 그 사람들은 굳이 검은 법복을 입을 필요 없이 회색 양복을 입고도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신화의 사회화, 우리의 사회의 축적된 역사 속 구성원간의 함의를 담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신화화된 권능을 본인의 권력이자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안따깝고 화가 난다.

P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2

아이러니컬하게도 켐벨에게 영웅 역정의 끝은 영웅의 자기 확장이 아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모습은 더 성숙해진 영웅의 모습이 아니였던가요?

 

P15

바로 캠벨이 그렇게 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정말 귀를 기울인다면) 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 경험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려면 듣는 사람도 상당한 내공이 필요해 보인다.

 

P16

즉 곡물의 씨앗이 영원한 주기를 표상하는 고귀한 상징이 된다. 곡물은 죽고 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씨앗이 그 곡물을 재생시킨다.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당하고 만다.

놀랍다. 식물의 원리가 이런 것이었나? 아니 식물의 원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놀라운 것인가?신기할 따름이다.

 

P18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을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신의 가면은 네 권으로 되어 있는 그의 주저主著의 제목이기도 하다- 옮긴이)이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심오한 뜻을 다 이해하기란 참 어렵고 힘든 듯 하다.

 

P28

모이어스 왜 당신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캠벨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난장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것겁니다.

머리가 크고 몸이 작아 뒤뚱거리는 아이의 모습은 웃음을 짓게 만들면서 사랑스럽니다. 그런데 질문의 대답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다. 하나의 단편만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P29

캠밸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모이어스 그러니까 신화가 그 실마리라는 것이지요?

캠벨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P30

캠벨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어떻게 경험하실 수 있었습니까?

캠벨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지 시작하지요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자기 문화속의 신화를 믿음으로 생각하기에 오해가 시작되고 반목이 생기는 것 같다.

 

P33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중국에서()을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陰陽), 남성의 원리와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도교이 문장을 그동안 별 뜻 없이 봐 왔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에겐 익숙한 태극모양의 변형쯤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렇게도 보이고 해석될 수 있다니 신선하다.

 

P34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캠벨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캠벨은 결혼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캠벨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처럼만 된다면 한층 성숙한 사람들이 신중함 속에서 서로를 선택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현실에선 많은 이들이 결혼 생활을 통해서 과연 영적인 수련을 겪고 있을까? 그냥 시련이 아닐까?

 

P36

캠벨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서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P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로써 판사가 지니게 되는 완전무결함, 즉 그 역할의 원리로 대표되는 완전무결함이지, 저마다 나름대로 생각과 편견을 지닌 판사들의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에서 대부분은 역할을 본인의 인격과 동일 시 한다. 그것부터가 상호간에 불신의 씨앗이 되는 것 같다.

 

P43

캠벨 그래요. 보수 종교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어요. 보수 종교는 퇴화한 어떤 형태. 더 이상 삶을 섬기지 못할 어떤 모습을 지향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셔도 괜찮으셨는지요? 종교계에서 많은 공격을 받지는 않는지요? 어쩌면 우리 사회의 종교가 너무 폐쇄적이고 공격적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P45

이 임무야말로 신비 여행처럼 보입니다. 이 임무에는 신비 여행의 전형적인 요소가 모두 고루 들어 있어요. 첫째, 거기에는 세속적인 삶과 유리되는 단계가 있어요. 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실제 생활에서 저지른 과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해야 한답니다.

지난 장례식 수업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P46

캠벨 테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멀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내 머리가 이런 기능을 하는지 의심스럽다.

 

P32

캠벨 아닙니다. 아니에요.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신화가 어떻게 가르침을 주는 지 궁금하다. 이해는 하지만 어떻게 알려주는지가 상세하게 안 나오는 것 같다.

 

P54      

모이어스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뭐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 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미국인들에게 <스타워즈>가 인기 많은 이유가 이것일까? 나 역시 <스타워즈>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열광하는 정도는 아닌데.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신화코드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P58

캠벨 거기에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내가 늘 생각했던 주제이다. 왜 종교인들이 싸우는가? 종교의 가장 큰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가 아닌가? 종교 때문에 싸운다면 종교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P64

캠벨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미합중국이 좋은 예입니다. 애초에 미합중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열세 개의 조그만 식민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은 무시하고 오로지 상호와 이익을 위하여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면서 태동합니다.

캠벨은 좋은 말로 하면 애국자이고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중간중간 몇 군데서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동양의 문화와 사고 방식을 존중하는 듯 하면서 은근히 서열을 매긴다고나 할까?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일까?

 

P71

캠벨 그렇지요 인류는 기원전 5백년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만일에 노자가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설이 옮다면)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P74

캠벨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모이어스 그럼 신화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캠벨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는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화애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신화가 정말 이런 기능들을 하는 것일까?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기능을 하는지가 딱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P78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하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한 자락 한 자락, 풀바트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곳이올시다.

내가 너무 자본주의라는 체제 속에 길 들여 있었지 않나 싶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 사람이 땅을 사고 팔죠? 그러게요. 왜 자연을 한 인간이 소유하는 거죠? 이 자연은 우리 자신인데요?

 

P80

캠벨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제서야 내가 자연의 일부이고 땅의 일부임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P81

캠벨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연에 일부임을 안다면 모두 다 겸손해질 것 같다.

 

P84

캠벨 뱀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붙박여 사는 동물입니다. 독수리는 영적인 비상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 두 동물의 싸움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늘상 체험하는 갈등과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이지요. 이 양자가 하나가 되면 놀랍게도 용의 이미지가 됩니다. 용이라면 날개 달린 큰 뱀이 아니던가요?

~ 용이 그런 것이었나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신기합니다.

 

P89

모이어스 신화는 왜 꿈과 다릅니까?

캠벨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캠벨 그들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신성한 잉여의 아름다움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인 로빈슨 제퍼스가 쓴 표현이라네. 이 말은 아주 멋지지

 

P96

캠벨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물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서양에서 뱀의 이미지가 우리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는 듯 하다.

 

P98

캠벨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정말 종교계에서 공격을 안 받으신 건가요? 새로운 해석과 접근에 흥미롭습니다. 뱀이 에덴동산의 실질적인 신이라니요? 정말 그런 걸까요? 신비롭습니다.

 

P105-1

캠벨 물론 없었지요.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P105-2

경험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무섭네요. 정말 이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가요? 어쩌면 상상의 경험이 아닐까요?그러나 여기서 뜻하는 바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체로서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P107

모이어스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캠벨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무아(정신적 상혼)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P112

캠벨 하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들은 끊임없이 그 짝을 찾아서 원초적인 합일 상태를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도 원래의 반쪽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을 전력한다는 겁니다.

자신의 반쪽을 찾아 평생을 헤메는 인간이란 존재

 

P114

캠벨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그렇다면 나는 아는 것인가?

 

P115

켐벨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종교의 좋은 측면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몰고 가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P117

켐벨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그 신비는 바로 우리 자체입니다만)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줍니다.

이 사다리를 올라타고 신화 넘어 신비의 세계에 올라가고 싶습니다.

 

P119

모이어스 재림 혹은 환생이라는 관념은 무엇을 암시하는지요?

캠벨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P123

캠벨 그렇지요. 그러나 가시적인 측면의 배후에 있는 실제성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신의 가면 이 단어 자체가 은유이자 최고의 메타포인 듯 하다.

 

P135

캠벨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우리의 삶은 이렇게 무서우면서도 이 무서움이 또한 삶의 진실이다.

 

P143-1

캠벨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중년의 문제 언급에 왠지 공감이 간다.  

 

P143-2

캠벨 그리스 신화가 특히 그렇지요. 우리는 신화하면 그리스 신화와 성서 신화를 떠올리지요. 이 두 문화권의 신화에는 인간화 경향이 있어요. 말하자면 인간에게 아주 큰 엑센트가 주어지지요. 특히 그리스 신화는 인간성과 젊음의 아름다움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요.

 

P145

켐벨 즉 매장 의례는 가시적인 삼 너머에 있는 다른 삶의 존재에 관한 관념,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P148

캠벨 그런데도 먹기 위해서는 죽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목축을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아끼는 소가 한마리씩은 꼭 있습니다.이들은 다른 쇠고기는 먹어도 이 소의 고기만은 먹지 않습니다. 친구의 고기를 먹는다는 식인 습속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시인들은 친구의 고기도 곧잘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심리적 보장 작용이 있어야 했을 테지요. 그런데 신화가 그걸 돕게 됩니다.

모이어스 어떻게요?

캠벨 초기 신화는 삶에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신화는 어쩌면 우리 초기 사회의 규범이자 법률적 기능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P150

캠벨 내가 짐승을 잡은 것은 자연의 뜻에 따른 것이지 나의 개인적인 의도와는 상관없는 것이다.이런 뜻을 지닙니다.

 

P160

모이어스 그 동굴은 어떤 일에 쓰였을가요?

캠벨 학자들은, 소년을 사냥꾼으로 입문시키는 의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소년은 사냥하는 법도 배워야 겠지만, 짐승을 두렵게 여겨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례도 배워야 하고, 이제 자신이 더 이상은 소년이 아니라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냥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동굴은, 의례를 통해 소년에게 더 이상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음을 깨우쳤던 그 시대 사람들의 성소였던 것입니다.

원시인들의 단순한 동물벽화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런 사회적 의제를 갖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P164

캠벨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한 몫의 여자가 되는 거지요. 여자라는 게 뭡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 됩니다.

여자는 생명을 나르는 수레이다.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이다.

 

P165

고대의 의례가 지는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서구의 문화적 기반인 개인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조셉캠벨은 이 서구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높이 평가하는 듯 하다.

 

P179

캠벨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건 인생에는 여백이 필요한 것 같다. 그 여백은 낭비, 허비가 아닌 다시 채우기 위한 비움이다.

 

P189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라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서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방법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 좋은 충고를 캠벨이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읽고자 한다면 한 작가를 아는 대만도 쉽지 않은 일일 듯 싶다. 그러니 캠벨이 대단한 것이 아닌가 싶다.

 

P194

캠벨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씨가 죽고, 여기에서 새 식물이 움트는,말하자면 식물의 경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농경 신화는 내계 지향적입니다. 사냥꾼에게는 동물이 신화를 촉발합니다. 권능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동물이 나타나 권능과 지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P198

캠벨 신화를 읽다 보면 가장 놀라운 게 바로 그 점이지요. 나는 평생 이 짓을 해왔습니다만,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 밖에요? 차이가 있다면 옥수수와 야자의 차이 정도라니까요.

놀랍다. 신화는 어느 특정 민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이야기가 형태만을 달리한다는것이다.

 

P206

캠벨 희생에 대한 옛 관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요. 마야 인디언은 의례의 마당에서 농구 경기 비슷한 시합을 합니다. 승패가 결정되겠지요? 그러면 이긴 팀의 주장은 진 팀의 주장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물로 희생됩니다. 목을 잘리는 거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모이어스 이긴자가 희생된다는 관념이 우리에게는 낮설군요. 오늘날의 우리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갖지 않습니까?

캠벨 마야 인디언의 이 의례에서 시합의 승자에게 내려지는 상은 거룩하게 희생될 수 있는 자격입니다.

정말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신기한 일이다. 정말 그 시대의 관념에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내가너무 지금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건 아닐까 싶지만, 다른 사례보다 제일 이해가 안 되는 사례이다.

 

P212

모이어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게 죽은 것은 속량전, 혹은 벌금을 무는 행위가 아니라 화해, 즉 하나됨의 행위라고 한 12세기 철학자 아벨라르의 견해에 동의하시는 것군요?

 

P217

캠벨 이것이 신하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뚤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 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P226

캠벨 정말 멋진 시절었죠.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내가, 이 세상에서 가정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 ‘취트’, ‘아난다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란 말은 천복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천복을 쫓는 삶이 진정한 삶이다. 이것이 신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삶의 지혜인가?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를 알게 되면 이런 우리 삶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P229

캠벨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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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9

모이어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어쩌면 영웅의 기질이나 자격 같은 것이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캠벨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 영웅이 될 기질, 잠재력이 있다. 우리 내부의 무엇을 찾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P249

캠벨 이 세계 모든 문화권, 많은 시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행동에서 하나의 전형적인체계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원형적인 영웅상은 하나밖에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의 원형적인 영웅상이 많고 많은 사람에 의해 모든 지역에서 베껴졌다는 것이지요.

 

P259

캠벨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하느님은 글자 그대로 저기게 있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하느님 말씀이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워지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지요.

 

P261

아기에게는 그 조그만 몸에서 나오지 않는 의도라고는 없어요. 말하자면 아기의 몸은 제 모든 의도를 뿜어내죠. 그래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기의 삶은 생명의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기는 온 몸으로 이야기한다. 아기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P267

캠벨 <스타워즈>는 단순한 도덕적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거나, 부서지거나, 억압되는 생명의 힘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스타워즈 자체가 하나의 신화가 된 것 같다. 스타워즈를 다시 한번 꼼꼼히 봐야겠다란 생각이 든다. 어느날을 잡아서 한편 한편 다시 보겠다.

 

P270

캠벨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1

캠벨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가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와 같아요. 이런 능력은 우리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우리 모두 내면에 잠재된 힘이 있다고 믿는다.

 

P272

캠벨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 정도의 단계에 올라서는 기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P273

캠벨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세상 이 우주의 시작이자 근본은 결국 내 자신이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P282

캠벨 이것은 영국의 가터 훈장의 기원 전설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가터훈장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근데 정말 이게 기원 신화인가?

 

P296

캠벨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항해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배가 가장 안전한 곳은 항구이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만 하고 있는 배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모험을 하기 위해서, 고통 속에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면서 가느냐가 인생이다.

 

P301

캠벨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우리 모두가 특별한 존재이다. 우주 그 자체이다.

 

P303

캠벨 아니에요.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의미에 대해서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P305

캠벨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식과 더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까닭이야 간단하지요. 우리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의 경험을 어머니와 함께 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결국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P335

캠벨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P336

캠벨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P337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티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체가 우주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 하나하나는 우주의 시작이자 끝이다.  

 

P345

캠벨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갑자기 조셉캠벨 선생님의 결혼 생활이 궁금해 집니다. 진정한 영적인 결합 동일성을 인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P359

캠벨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P365

캠벨  더 정확하게는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 말뜻을 알겠지요?

네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P373

캠벨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모이어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캠벨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랑 자체가 인생의 축소판이란 의미 같습니다.

 

P377

캠벨 우주의 생명인 궁극적인 에너지에서 오지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그런 에너지를 생성시키는 어떤 존재가 있기는 있구나”, 이렇게 응수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나는, “왜 궁극적인 신비가 비인격적인 자연이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게 될 테지요.

결국 세계는 초 자연적인 힘인 건가요?

 

P379

캠벨 언어 밖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하느님의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합니다. 분석 심리학자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P395

캠벨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것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 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P409

캠벨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두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내 속에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속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P413

캠벨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모이어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

캠벨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인생은 결국 삶이라는 여정 그 자체이다. 인생의 목표는 오늘을 사는 것이다.

 

P415

모이어스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 것 없는 이간은 이 하잖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벨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인생은 결국 자연 그 자체이구나. 나는 이 자연의 일부요 우주 그 자체인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대담집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은 되나 내용이 조금은 겹치면서 반복되는 측면이 있고 비슷한 내용의 문답이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되다 보니 같은 주제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가 되는 듯한 내용의 문답이 조금씩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그 문답과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점이 될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다소 혼란이 생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리고 신화의 힘에 대한 처음 여행을 하는 독자들을 위해서라면 조금 단계별로 신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단계별 재 구성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답의 선후관계가 뒤 바뀌고 전체적인 내용이 뒤섞일 수 있는 문제점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이해가 쉽고 신화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도록 내 다름대로 구성해본 목차는 다음과 같다.

 

현목차

재 구성 목차

신화와 현대 세계

내면으로의 여행

태초의 이야기꾼들

희생과 천복

영웅의 모험

조화여신의 은혜

사랑과 결혼 이야기

영원의 가면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의 탄생

영웅의 모험

현대 사회 속의 신화

사랑과 결혼 이야기

조화 여신의 은혜

영혼의 가면

 

2. 보완이 필요한 점

저 멀리 진실이 있는 것 같다. !!

신화의 힘을 힘겹게 다 읽었다. 이 책을 완독하는 것 만으로도 어쩌면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의 느낌은 저 멀리 진실이 있는 것 같다.”이다. 그래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 그러나 사실 어렴풋이 잡힌다. 아직 내 가슴 속에 그리고 내 머리 속에 내 손에 잡히지는 않는 무형물의 존재인 듯한 느낌이다. 어렵다. 문맥의 뜻은 알겠으나, 딱히 이것이다라고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아주 대단한 것을 문 틈 사이로 보고야 만 기분은 든다. 그래 난 일단 보긴했어~!! 내가 본 것이 근데 정말 그 것이 맞는 것일까?

 

단어의 정의 및 해설의 보강

아무래도 번역서이다 보니 단어의 의미가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리고 전문적인 용어들이 많다. 이 단어에 대한 각주를 달아서 조금만 더 설명해 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자 조셉캠벨의 지난 책들이 자주 언급이 되는데 주요 문구나 내용은 책 뒤에 별첨으로 달아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3. 이 책의 장점

이 책은 신화의 의미가 단순히 전래동화가 아니라 인류 문화의 원형질, 인류의 기본적인 구조적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이 단지 각 문화권의 전통적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란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신화의 근간에 이런 심오한 인류 문화의 정수가 숨어있는 줄 몰랐다. 신화에 대한 그리고 우리 문화, 사회의 기반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 물론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한번에 소화하긴 힘들 것 같다. 두고두고 꼽씹어 보면서 그 의미를 소화해 내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신화와 종교와의 관계가 이렇게 밀접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아니 어쩌면 신화와 종교는 거의 한몸으로 보인다. 종교에 대한 그 동안의 고민과 의문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해소되면서도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조셉 캠벨은 어찌보면 신화학자라기 보다는 철학자라는 생각을 들었다. 신화를 통해 인류의 비밀에 접근하여 삶의 본질에 대해서 깨달은 철학자, 우리 시대의 현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화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삶에 근본적인 질문과 그것에 대한 해답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해답은 객관식의 정답이 아니다.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큰 우주적인 의미를 내포한 해답니다.

실제 조셉 캠벨은 우리에게 신화를 통해 알게 된 삶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천복을 쫒아라.”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는 신화라는 창을 통해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근간을 구성하고 있는 원리와 종교적 근본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신화학자라기 보단 철학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신화가 주는 교훈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대한 지혜와 자세까지도 조언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제자에게 이야기 하듯이 순차적인 접근하는 서술이 어떨까 한다. 물론 저자는 중간에 진정한 스승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제자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신화적 해석에 낯설어할 초보 여행자들을 위해서라도 신화의 의미부터 조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을 것 같다. 가령 빌모이어스가 계속 질문했던 일반 독자들이 궁금해하고 이해가 빠른 <스타워즈>의 신화적 해석이라던가 다른 영화에서 보이는 신화적 요소와 해석이 곁들어 지면 독자들이 처음 신화의 길로 빠져 드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는데 중간 중간 보이는 동서양 신화의 근본적인 구성의 차이를 조금 더 상세하게 비교해가면서 설명해 간다면 서구 문화권 뿐 아니라 동양 문화권의 독자들에게도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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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0 08:03:59 *.124.22.184

저도 책을 보면서 종교에서 가졌던 의문들을 풀었어요. 그리고 저의 신앙생활에 대해 중심을 잡았구요. 역시 대단한 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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