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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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힘
(나를 찾기 위한 방법#3)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나는 모든 것을 오로지 묵독(默讀)에만 의존해왔다. 책을 읽을 때도, 신문을 읽을 때도, 보고서를 읽을 때도, 아이들의 가정통신문을 볼 때도 전부 묵독만을 해왔다. 그만큼 나의 독서와 공부, 실생활에 있어서 ‘음소거’라는 것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자. 조선시대의 서당을 예를 들어봐도 학생들은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소리 내어 읽고 외웠다. 내가 초등학교 때 역시 구구단부터 시작해서 영어 알파벳을 외울 때는 소리 내어 읽고 외우고, 거기에 장단을 맞춰가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러던 것이 중학교 이후에는 뭔가를 외워서 낭송을 한 기억이 없다. 아니 사라진 것이다. 그 때 이후로 난 그저 모든 것을 묵독 형태로 읽어 왔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왜 이토록 소리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었을까? 잘 알고 있듯이, 근대 이전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구술문화의 시대라 낭독이 대세였다. 묵독은 책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하여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등장과 더불어 “개인의 고독한 독서”인 묵독이 점차 부각되기 시작했다. 낭독이 공적(公的)이고 사교적이며 터놓고 하는 방식이라면 묵독은 사적(私的)이고 조용하며 심미적 체험을 주로 한다. 이후 개인 중심사회가 정착되면서 묵독은 대세가 되었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대중화되었고, 이로써 그동안 소수만이 책을 독점하던 시대에서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나의 경우 소리라고 하면 음악, 오케스트라, 오페라, 뮤지컬 등이 떠오르지 정작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오히려 무신경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욕망과 에너지가 눈으로 쏠려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제 스마트 폰의 대중화로 인해 더욱더 시각에 집중된다. 내가 하루를 살면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기관이 아마 눈일 것이다. 그래서 오감 중 시각이 으뜸이 되었고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은 시각을 위한 보조감각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독서코칭 수업을 하면서 책 읽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낭독 또는 낭송이라는 것을 배웠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강사에게 재차 물어봤다. 책을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은 읽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텍스트가 주는 의미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낭독이나 낭송이 책을 읽는데 좋은 방법일 수가 있냐고? 그런데 강사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혹시 해보셨냐고? 안 해보신 것 같은데 실제로 해보고 낭독이나 낭송에 대해 똑같은 의문이 생기면 다시 얘기해보자고 하였다.
나는 이번 주 읽어야 할 책인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일단 내용이 어려웠다. 그리고 한번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어렴풋이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정확한 의미가 와 닿지 않았다. 처음에는 늘 하는 방식대로 묵독을 했다. 그러나 내용이 어려워서 그런지 한 장 한 장을 넘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절대적 시간도 모자랐지만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감 기한이 있기에 집중을 해서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책장 넘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낭독이었다. 그러나 웬걸 낭독이 날 살렸다. 물론 여전히 내용이 어려웠지만 묵독보다 훨씬 속도도 빠르고 이해도 잘 되었다. 일단 묵독을 할 때는 집중을 하더라도 오래가질 못하고, 어느 순간 졸고 있는 나를 발견했는데 낭독을 하니 일단 졸음이 없어졌다. 단지 단점은 생각하면서 소리내는 것인데 이것이 어느 순간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 되어버린 순간이 있었던 점이다. 어찌되었든 낭독은 묵독보다 집중이 훨씬 잘 되었다. 아마 소리를 내어 읽는 동안에는 딴 짓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낭독은 단순히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읽는 행위이다. 즉, 머릿속의 생각과 입으로 나오는 말이 합쳐져서 몸 밖으로 나오게 되고, 나온 말은 내 몸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한바퀴 휘감아 다시 나의 귀로 들어가 최종적으로 내 가슴과 머릿속에 안착하는 이런 신비한 체험이 낭독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낭송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바로 소리를 내서 읽은 다음, 그것이 다시 내 귀로 들어오도록 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낭송을 하면 읽은 내용이 육체적인 감각을 건드려 내면화하게 된다고 한다. 아는 내용이 육체화되는 것을 체득이라고 한다. 체득되지 않은 지식은 머릿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져 버린다. 결국 나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육체화를 통한 체득으로 책을 눈으로 읽을 때보다 낭송을 통한 책 읽기를 비교해봤을 때 낭송을 한 쪽이 이해도나 암기에 있어서 훨씬 더 낫다고 한다. 묵독을 한다는 것은 글 읽는 과정에서 정신만 사용하고 육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이 원래 둘로 나뉘지 않았지만, 이성만 사용하고 감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낭송을 통해 육체화의 과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체득을 실현할 수 있고 ‘자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개인이 독립적 주체가 되는 일은 육체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은 타인과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니까.(4월 한달 동안 읽은 구본형 선생님 책이나 지금 읽고 있는 캠벨의 신화에서 있어서 육체를 강조하는 것만 봐도 육체화라는 것이 인간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책 읽기는 낭송과 묵독의 병행을 해보자. 물론 내 집이 아닌 곳에서 낭송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겠지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좋아하는 책의 내용이 육체화된다면 이 정도의 눈치는 얼마든지 받을 각오는 되어 있다.
드디어 낭송의 위대함을 발견하셨군요. 축하드려요. ^^
"자신이 읽는 북(book) 소리는 자신이 가장 먼저 듣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물도 듣습니다. 소리내서 읽다 보면 자신의 몸과 뼈에 새겨집니다.
뼛속까지 스며들지요. 신장은 뼈를 주관하고, 소리를 낼 때 뼛속으로부터
목소리가 울려 나옵니다. 자신이 소리를 들을 때도 뼛속까지 울리게 되죠. "
- 몸여인 109p-
소리내서 책을 읽으면 우선 신장의 물 기운을 끌어당겨 뇌수까지 가게 되지요.
심장에 있는 화기운을 아래로 내리게 하고요. 그래서 분노나 화를 잠재웁니다.
이것이 바로 수승화강입니다. 수승화강이 잘 되게 하는 것도 책을 소리내서 읽는 낭송이지요.
북(book)소리의 울림은 우리의 뼈와 살을 울리는 북(drum)소리입니다.
우리가 말하거나 듣는 소리는 우리의 심장 박동수와 호흡 횟수를 변화시키고
뇌파를 변화시켜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낭송의 힘. -몸여인 111p-
흥겨운 북(book)소리로 춤추는 삶의 북놀이가 되시길.
기상님 글을 보니 [책과 노니는 집]에 나오는 전기수가 생각나네요. 신화도 옛이야기이고 구전되어 오던 걸 글로 쓴건데, 예전 우리도 그렇게 사람들을 모아놓고 입말로 이야기를 해주던 사람을 전기수라고 해요~
전 서정오선생님의 책들이 좋아요. 특히 사계절 이야기인 [입춘대길 코춘대길] , [범아이] ... 있는데 소리내서 읽어보면 처음엔 문어체에 익숙해서 오히려 잘 안 읽어지더라구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속 읽다보면 더 재밌어요.
예전에 독서강의 하셨던 교수님이 아이들에게도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보다 할머니들이 하셨던 그냥 말로 하는게 더 좋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건 연습이 안되서 더 어렵더라구요. 아이들 잠자리에서 해주면 좋을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