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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3일 11시 04분 등록

신화와 인생(52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조지프 캠벨

캠벨은 많은 우연히가 모여 필연이 되었다.

첫 번째 우연은, 저자가 7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기 위해 그와 그의 동생 찰리를 데려갔다. 이때 영향으로 저자는 인디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열 살이 되던 해 저자는 지역 도서관의 아동부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모든 책을 읽었다. 저자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여 토템에 매료되었다. 기둥과 마스크를 사용하여 박물관의 광대한 컬렉션을 평생 탐구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우연은, 1924년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향하는 증기선 여행에서 신지학(神智學) 사회 (Theosophical Society)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를 만난 것이다. 그 만남으로 인도와 힌두교, 인도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세 번째 우연은, 1925년 하와이에 다녀오는 배에서 만난 새너제이에 사는 아이델을 만났고 종종 엽서로 연락을 하며 지냈다. 우드스톡에서 지내던 어느 날 무작정 떠난 서부여행에서 저자는 카멜을 지나던 중 이이델을 방문했다. 그녀의 형부가 존 스타인벡이었다. 그의 나이 28세에 1년 동안 그들과 지내며 같이 공부하고 토론했다.

 

네 번째 우연은, 카멜 도서관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본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인생의 책이라 말한다. 슈펭글러가 독일의 민속학자인 레오 프로베니우스에게 영향을 받을 것을 알게 되고 뉴욕의 서점 주인에게 편지를 보내 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일자리를 구하면 갚으라며 책을 보내준 서점주인 덕분에 저자는 프로베니우스의 모든 책을 읽게 된다. 프로베니우스는 1904독일 내륙아프리카 탐험대를 조직하여 1935년까지 12회에 걸쳐 아프리카 피그미족을 연구했다.

 

다섯 번째 우연은, 1940년에 스리 라마크리슈나(Sri Ramakrishna)의 복음서(1942년 출판)의 새 번역본 제작에 도움을 청한 스와미 니칠라난다(Swami Nikhilananda)에게 소개되었다. 그 후 니칠라난다는, 유대인 아내라는 이유로 하이델베르그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강의 중이던 독일 낭만주의 인도학자 하인리히 짐머(Heinrich Zimmer)에게 저자를 소개했는데, 그는 볼링겐 재단의 편집 위원으로 저자를 소개했다. "인문 과학 및 기타 문화 분야의 장학금 및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볼링겐의 야심찬 출판 프로젝트인 Bollingen Series를 시작했다.

저자의 우연들만으로 필연이 된 것은 아니다. 저자는 한 작가나 학자를 만나면 그의 저작물을 모두 보았다.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고, 영향을 받은 프로베니우스를 읽고, 니체를 읽고, 다시 쇼펜하우어를, 칸트를 읽었다. 칸트를 보니 괴테를 읽게 되었고, 융을 읽으면서 슈펭글러의 사고 체계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의 우연과 책이 만나서 지금의 저자가 된 것이다. 어쩜 저자는 활자중독이었을 지도 모른다. 결혼을 위해 여성을 사귀어야 하는데, 여성이 추구하는 즐거움에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독서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저자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며 저자가 읽은 책들을 나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저자와 같은 시대적 상황, 직접 만나고 영향을 미친 사람들(, 인도 철학자, 작가 등), 경험, 삶이 다르니 같은 수준으로 읽진 못하겠지만 읽어보면 저자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애매함은 좀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캠벨은 1965년에 처음 에설런 연구소에서 강의를 했으며, 그 후 매년 강의를 이어왔다. 에설런 연구소는 196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빅서(Big Sur)에 설립된 대안적 인문학 연구기관이다. 비전통적 워크샵과 강사가 전통 교육과 관련된 교리 없는 아이디어를 발표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기존의 학계에서 외면하던 학제간 연구를 수행해 왔다. 저자는 에설런 연구소의 연례 체류에 대해 "태평양 연안의 낙원"이라고 불렀다. [신화와 인생]은 에설런에서의 강의 내용이다.

 

다이앤 K. 오스본

1983년 수개월간 에설런 연구소(Esalen intitute)에서 열린 10명정원의 세미나에서 캠벨의 강의를 들었다.오스본은 캠벨의 강의 내용을 필기하고, 캠벨과 몇 년을 같이 보내며 일지에 기록한 내용에, 이후 출판된 캠벨의 저서를 인용하여 발췌, 수록하여 1991[신화와 인생] 책으로 엮었다.

 

박중서

출판기획 및 번역가로 한국저작권센터에서 근무했다. ‘책의 대한 책시리즈를 기획했으며 다수의 번역 작품이 있다. 정직한(본명이라고 번역가가 직접 밝힘)이란 친구에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란 책을 소개받으며 이쪽 책을 읽다 보면 이윤기-정진홍-엘리아데가 쓰거나 옮기거나 한 책을 읽을 수밖에 없더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번역가도 헌책방을 드나들며 신화와 종교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고, [신화와 인생]을 번역하게 되었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9p.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는 주로 골반에 위치한 에너지의 중심부(차크라)의 주제 생존, 섹스, 그리고 힘 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단계(깨달음을 향한 길)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9p. 준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희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캠벨에 따르면 여기서 희열이란 우리의 가장 높은 [종교적] 열광을 의미한다.

10p. 우리가 마지막 층위(성스러운 삶과의 조우)까지 성장해 나아가면,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환영[마야(maya)]의 차단막을 걷어 올리고 지상에 펼쳐져 있는 아버지의 왕국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마야를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1p. ‘지금도각자를 위한 길이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일단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이전까지는 열리지 않았던,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열리지 않을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며, 심지어 어머니 대자연 역시 그 여정을 도울 것이다.

대자연까지 돕는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문득 재갈량의 동남풍이 불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 이게 아닐까 한다.

12p.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13p. “왜 저 나무들 아래를 걷다 보면 항상 크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돋아나는 것일까? 윌트 휘트먼은 묻는다. ”생각건대 겨울과 여름 내내 그 나무들 위에 걸려 있던 생각들이 마침 내가 지나갈 때 과실처럼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이런 시적 표현이 참 좋다. 그런데 난 내가 이런 표현을 쓰려면 왠지 불편하다.

 

도입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In the field)

20p.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난 반대로 했다. 놀이도 꼭 해야 할 일처럼. 이제부턴 놀이 하듯 하련다.

21p. 만약 우리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단히 잘못 짚은 셈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다. 그것은 혼란의 도가니이다. 이 세계는 항상 그렇게 혼란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본형선생님의 정치에 대한 생각이 캠벨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개인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사회, 정치의 변화에 무관심하면 안 된다. 직접 나서서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잘할 수 있게 감시하고 의견을 내야한다.

22p. 욕심꾸러기, 뭔가를 고수하려 하고 붙들어 놓으려고만 하는 우리 안의 그 욕심꾸러기를 반드시 없애 버려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고정관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24p.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26p.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위기는 기회다. 위기는 변화의 시작이다. 위기가 없으면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온 위기를 기쁘게 받아들이자.

27p.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아직 이 경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영적인 거리를 얻지 못했을까.

28p.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여러분의 진정한 의무는 공동체로부터 멀리 떠나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가 그 체제를 개인에게 강요할 때 사회는 곧 적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사회가 최소한의 개인을 보호해주는 것도 있다. 건강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도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 저자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29p. 깨뜨리고 나옴은 (남이 보여 준) 희열의 모범을 따르고, 옛 장소에서 떠나고, 여러분의 영웅 여정을 시작하여,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는 것이다.

아마 저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개인들이 많으니 그것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30p.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부정적으로 경험될 것이다.

31p.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33p. 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보물이 묻혀 있다.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것을 사랑하면 세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 나에게 중요한 이야기다.

35p. 대립자의 세계 너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경험되는 통일성과 동질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36p.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Living in the world)

41p.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선과 악. 이런 것이 대립자의 문제들이다.” 이로부터 시작된 문제가 바로 이원성의 발견이었다.

42p. 그 이전까지는 이원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조차 없었다.

43p.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에덴동산은 없었고, 뱀이 말할 줄 알던 시절도, 선사시대의 타락, 동산에서의 추방도, 대홍수도, 노아의 방주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된 서양 종교의 역사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종교들 역시 이 같은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느 전설이나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기독계에선 다 허구라고 하면 큰일 날 소리 아닌가?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긴 하다.

48p. “어머니의 몸이 갓난아기에게는 최초의 세계나 다름없다. 그때 이후로 어린이의 아니마투사는 바로 어머니에 대한 것이 된다.”

51p. ‘아가페자비요 신적이자 영적인 것이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한 것이며, ‘에로스욕정이요 자연적이자 육적인 것이고, ‘섹스의 충동, 욕구, 기쁨이라는 것이다.

아모르는 오른쪽 길(승화시키는 영, 정신, 인간 공동체)도 아니요, 왼쪽 길(자연의 자연발생, 음경과 자궁의 상호 자극)도 아니며, 바로 앞에 있는 길,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신화의 힘에서 중세 기사의 사랑과 음유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왔던 내용이다.

54p. 사랑의 상실과 깨어진 관계의 고통은 투사의 과부하 상태이다. ... 마치 그게 전부인 것 같았지만, 곧이어 무슨 이유에선가 깨어지고 만 관계 말이다.

영혼은 상처의 치유법을 알지만, 그 치유법은 아픔을 준다. 때로는 애초의 상처보다도 그것의 치유가 더 많은 아픔을 주지만, 만약 그걸 견딜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써 여러분은 보다 넓은 기반을 찾은 셈이기 때문이다.

간혹 치유하는 과정이 힘들거나 치유가 잘못되어 오히려 고착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넓은 기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더 좁은 기반으로 줄어들기도 한다.

55p.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자면)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재난은 나에게 와야 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60p. 비슈누 식으로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하나씩 있다.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람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 이 첫 번째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작은 원숭이 왕이며 하마의 하인인 하누만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즉 서구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 이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의 모델은 친구 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61p. 세 번째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 대 친구의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62p. 힌두 전통에서 이 단계에 해당하는 모델은 개구쟁이 버터 도둑인 꼬마 소년 크리슈나를 향한 고피(소 치는 소녀)들의 사랑이다.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63p.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르 포(광인)’,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장 높은 단계가 금지된 사랑일 줄이야. 사랑밖에 없기 때문인가.

65p.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수립하고 있는 관계의 구체적인 측면 속에 있는 어떤 깊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순수한 열광은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인생에는 또한 가치 있는 관계들이 있기때문이다.

68p.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임이 사랑의 구성요소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책임감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단지 소유물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결혼 생활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했다. 어머니는 그저 맏아들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된다고 했다. 본인이 겪은 결혼에서 힘들었던 부분만을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셨나보다.

69p. 여러분이 자신의 강박감에 사로잡힌 열성을 제어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면,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결혼에 부적격한 상태다.

강박감에 사로잡힌 열성이란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본인이 원하는 열성이 아닌 걸 말하는 거겠지.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열성은 제어하기 힘들다는 것인가 보다.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구다.

당시 나는 한 해 임대료가 20달러밖에 안 되는 우드스톡의 매버릭 로드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 신혼부부는 차를 타고 그 집으로 향했다.

결혼을 하고 부부가 같이 5년이란 기간을 칩거하며 책을 봤네. ~ 대단한 결정이다. 하긴 부인이 제자였으니 저자의 결정에 거부감이 없었을 거다.

70p.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72p.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73p. 진과 결혼할 당시, 나는 그것이 십자가형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신랑이 신부에게 가는 것은 십자가로 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신부 역시 신랑에게 자기 자신을 똑같이 내놓는다. 결국 이것은 호혜적인 십자가형이나 마찬가지다.

기독교에선 내 인생의 십자가란 표현을 한다. 예전에 강사가 본인은 시어머니가 그렇다고 하더라. 그때 난 남편이 내 인생의 십자가로 여겨졌었다.

74p. 나 개인적으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여러분은 차라리 분별력을 지니고서, 나쁜 놈들은 나쁜 놈들로 인정하고, 따귀를 한 대 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나도 동감한다. 무조건적 사랑,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관계도 망가지게 된다.

77p.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80p. 어쩌면 여러분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삶의 방식에 염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로써 여러분은 이미 그것을 일종의 모델로 삼은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양가 부모님을 보며 모델로 삼고 있다. 부모로서 모델뿐만 아니라 노년기를 어떻게 맞아야겠구나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82p. 나 역시 벌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벌려고 했지만, 결코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히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돈은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진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돈이 따라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돈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삶의 질 자체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84p. 돈이 있다는 것은 마치 차에 기름이 있는 것과도 유사해서 만약 기름이 없었더라면 결코 갈 수 없을 장소에 갈 수 있는 것이다.

85p. 여러분에게는 에너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흘려 보낼) 경로의 모델을 제공하는 사고력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삶은 진정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

86p. 여러분이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면 알겠지만, 그 과정 동안에는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맞다. 끊임없이 지도교수에게 맞춰야 한다. 물론 간혹 드물어서 그렇지 학생이 원하는 글을 맘껏 쓰도록 하는 교수가 있긴 하다. 너무 교수에게 맞추다보면 정말 내가 하려고 했던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너무 내 주장만 펼치면 교수님께 실례인가 싶기도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시간이 아깝고 화가 나기도 한다. 그래도 약자는 학생이고 그 과정을 슬기롭게 넘겨야 학위라는 것을 얻게 된다.

89p.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그게 가장 절실했다.

97p. 가령 내가 카멜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을 뻗어 한 권의 책, 그러니까 내 인생을 뒤바꾼 책을 발견한 것처럼. 정말로 그랬다!

[서구의 몰락]의 내용이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동양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무엇을 읽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다.

99p.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 진짜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0p. 방랑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일종의 신비로울 정도의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방랑이라~ 저자의 방랑의 기간은 가히 놀라울 정도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말 용기가 필요한 거다.

104p. 바로 여러분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이러저러한 또는 다른 삶의 자질구레한 것에 대한 집착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105p.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내용을 보면 볼수록 구본형 선생님의 글을 보는 것 같다. 구본형 선생님이 저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보다.

109p. 내 경험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성배의 성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기독교에 거부감이 드는 또 다른 하나는 지금 현재의 삶보다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삶을 주관하는 게 아닌 하느님이 주관한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할 일이 없어진다. 현재의 삶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110p. 가령 어느 칵테일 파티에 참석하기만 해도 성배는 사라져 버린다. 내가 그런 행사에 결코 참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칵테일 파티를 말하는 거라면 속세의 삶에서 벗어난 부처와 같은 삶을 지향하는 것일테고, 만약 특정한 파티를 말하는 거라면 달리 해석된다. 분명하게 밝히지 않아 모르겠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내적 만족을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을 (성에서) 내쫒기지 않게 만들어 주는 행동의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다.

111p.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112p. 만약 지금 여러분이 따르는 모험이 본인의 진정한 모험이라면,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돕기 위해 마법의 인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변경연이 이 모험일 거라 믿는다. 마법의 인도자가 누구일지 궁금하다. 동기이고 선배일까.

113p. 이 세계를 둘러싼 벽들이 잠시나마 확 트이는 듯한 순간이 있을 것이며, 여러분은 (그 벽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뛰어오르라! 가라! 문들은 대개 너무나도 빨리 닫혀 버리기 때문에, 여러분이 탄 말의 꼬리를 잘라 먹기 일쑤다. 여러분은 손발이 잘릴 수도, 가진 것을 모두 읽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하라는 거지. 뛰어오르라는 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은유적 표현말고 사실적 표현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114p. 여러분은 자신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만드는 마지막 경험에 도달한다. 이 경험은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성스러운 결혼즉 여러분 자신의 영적 삶을 탄생시킨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또는 여러분이 관계하고 있는 어떤 삶에서 신부가 되는 존재와의 만남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의 화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이는 아들이 자신의 실제 혈통과는 안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다.

115p. 세 번째는 신격화, 나를 만물을 있게 하는 존재다라는 깨달음이다.

인문학 공부를 할 때도 신의 존재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다. 캠벨을 읽으며 신화를 보니 또 신의 대한 거부감이 든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불사약 빼앗기, 앞에 열거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깨달음이다. 권능자의 선한 의지에 힘입어 수수께끼를 헤쳐 나가는 느린 과정 대신에, 여기서는 격렬한 강제와 박탈이 있으며 여러분은 그 과정에서 권능자와 불화를 빚고 도망치게 된다.

117p. 여러분이 귀환함으로써 이 세계에 은혜를 베풀게 되었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첫 번째 가능성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망할 것 같으니. 나는 다시 숲으로 들아가겠어.”

두 번째 가능성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원할까?” 여러분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 여러분은 공무를 담당하게 되고, 보석을 포기하게 된다.

세 번째 가능성은 여러분이 되돌아온 그 영역 중에서, 여러분이 주려는 것을 최소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면을 일부나마 찾아내 노력하는 것이다. ... 오로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여러분의 보석을 주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모두 실패한다면, 여러분은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얻어서, 여러분의 메시지를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

올해 커리큘럼을 마치고 나서 어떤 모습일까. 선배들을 보니 첫 번째, 세 번째 가능성도 있고, 모두 실패하고 마지막의 모습도 있다. 나는 어떨까.

118p. 이것이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방식이며, 여기에서 맨 마지막은 여러분이 영원히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알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다.

구본형 선생님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다.

120p.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 딱이다. 내 나이 쉰을 앞두고 이렇게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22p.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 여러분이 만약 융이 말한 두 번째 단계, 즉 삶의 후반부에 들어섰다면, 여러분의 목표는 여러분이 심장 차크라에서 들은 (OM)’을 불러오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성취에도 관심이 없고 위신에도 관심이 없는 여러분의 삶을 형성하고 구조화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128p.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의례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뿐이다.

129p.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성숙한 수렵 부족의 경우, 그들의 주요 의례는 다름 아닌 동물에게 바치는 것이다.

130p. 우리의 물질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은 세속의 음식이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영적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저자는 끊임없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라 말하는 듯하다. 신에게서 구하지도 말고 자신이 찾는 그 곳에 신이 있다고 한다.

134p. 이처럼 소년은 남자임을 드러내야만한다. 반면 소녀는 여자임을 깨달아야만한다.

나는 얼마 전에 벵골 지방의 어느 힌두교 제의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 소녀 시절에는 자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결혼을 하면 이제는 자기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다가 남편이 죽으면 큰아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건 유교의 삼종지도와 같다.

135p. 그곳에서는 여성이 아들을 떼어 놓을 수 있게 하는 제의가 있다. ... 그러다가 아들이 더 이상은 어린 소년이 아닌 때가 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내보내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이 우리와는 다르다. 우린 끝까지 아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다보니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한다.

136p. 그날 하루 동안 각자 평생 이것만큼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물건 일곱 가지를 생각해 보도록 했다. ... 그 물체의 크기는 손에 딱 들어갈 만큼 작아야 하고, 각각의 물체가 어떤 것을 상징하는 지 본인이 구분할 수 있어야만 했다.

137p. 우리에게 그 보물들을 하나씩 포기하도록 했던 명령은 사실 매우 계시적이었던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 자신의 가치 순서가 어떤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 것이다. ... 하지만 문지기가 있는 출구를 빠져나가기 전에 여러분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 참가자들은 각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하는 순간 모크샤(moksa)’,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 이건 한 번 해 볼만 할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마음속으로 해봐야겠다.

139p. “종말이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난다는 뜻이다.

140p.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142p.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오비디우스

147p. 고대 로마에서는 자살이 고귀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어떤 사람이 포로로 잡힐 상황에 놓인 경우, 이는 곧 불명예스러운 삶을 의미하므로, 대신 자살을 택하곤 했다. 이는 켈트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일본과 인도의 자살도 다루고 있다. 서구에서 동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중국, 인도, 일본 정도이다. 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동양은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연구하고 알려야 한다. 서구 학문을 배워(유학) 국내에 들어와 앵무새처럼 전하는 교수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예전에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팔만대장경 등을 보고 한국은 이렇게 훌륭한 자국의 문화가 있으니 외국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국내 연구에 힘을 쓰라고 했다고 한다. 중국에 허난설헌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가다간 우리 조상의 연구 자료를 외국에서 가져와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149p.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50p. “죽음에 대한 저항은 여러분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Coming into awareness)

155p. 명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으로 하나의 이미지나 생각에 집중하려 해도 몇 초 만에 이미 그것과 관련된 다른 생각들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훈련되지 않으면 정신은 가만히 있질 못하는데, 요가는 그런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눈을 감고 조용히 음악 감상을 하라고 했던 때가 생각난다. 음악이 흐르고 있는데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무 생각이 많아서 인지 훈련이 안 되서 인지 명상이 쉽지 않다.

157p. 분노나 어떤 열정으로 가득한 경우 여러분의 호흡은 달라진다. 쉬고 있으면 여러분의 호흡은 변화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목표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규칙적으로 호흡하게 하는 것, 마음을 조용하고 잔잔하게 하는 것이다.

158p. 1차크라인 물라다라(Muladhara), 뿌리 받침은 척추의 맨밑에 위치한다. 이 단계에서 세계관은 분명한 사실들에 의해 통제되는 활력 없는 유물론으로 이루어진다. 심리체계는 행동과학적 용어로 적절히 표현하자면 수동적이며, 결코 능동적이지 못하다.

2차크라인 스바디슈타나(Svadhishthana), 그녀의 특별한 집은 성기 단계에 있다. 이 단계에서 쿤달리니가 활발해지면, 삶의 전체 목표는 섹스에 있게 된다.

159p. 3차크라인 마니푸라(Manipura), 빛나는 보석의 도시는 배꼽의 단계에 있다. 여기서는 에너지가 폭력으로 바뀌며, 그 목적은 세계를 소모하고 지배하여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그리고 자신의 소유로 바꾸는 것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이 세 개의 차트라들은 소박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양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160p. 4차크라인 아나하타(Anahata)부딪치지 않음이고, 심장의 높이에 있다. 이것은 종교적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깨달음이며, 그 이름은 곧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소리를 지칭한다.

161p. “여러분이 상위의 차크라들에 도달하려면, 처음 세 개의 차크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생존, 섹스 그리고 힘이.”

서양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형이상학을 배꼽 위라 농담처럼 하는 것과 비슷하다.

5차크라는 비슈다(Vishuddha), 정화됨이며 후두 높이에 위치한다. 이것은 에너지가 유래하는 동물적 시스템을 물리치려는 영적 노력의 차크라이다.

6차크라는 아냐(Ajna), 명령의 연꽃으로 미간에 위치해 있으며 이른바 천국의 차크라, 즉 육신을 갖춘 형체의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차크라이다.

162p. “깨달음 직전에 도달하면 예전 방식이 오히려 더 유혹적이어서 여러분을 뒤로 잡아끌게 마련이다.”

163p. 형체를 지닌 신 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지의 마지막 속삭임이다. 이 단계에서 여러분은 어떤 상징을, 어떤 경험을 가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마지막 속삭임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바라본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장벽이다.

164p. 7차크라는 사하스라라(Sahasrara), 즉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한 천 개의 꽃잎이 달린연꽃이다. 이 차크라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 7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무감각 상태가 된다.

부처가 되는 경지이다. 해탈하여 욕심도 없고 집착도 없는 상태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일까.

167p.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발의 범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차마 무엇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173p. 융은 1909년에 이르러서야 신화와 꿈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지만, 인도에서는 그런 사실이 영원으로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옴 또는 아움(A-U-M)이라는 철자에 함축되어 있다.

174p. ‘는 깨어나는 의식이다. ‘는 꿈의 의식이다. ‘은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의 영역이다.

176p.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매일 밤 브라흐만의 세계로 가지만, 아뿔사, 잠든 채로 가는 것이다.” 요가의 목표는 깨어 있는 채로 그 영역에 가는 것이다.

177p. 침묵은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적절한 어휘다. ... “(그것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말로 할 수 없으니...

187p.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의 삶에 있어 크나큰 중요성을 지니게 될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첫 만남에서부터 장차 뭔가 벌어질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매우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하지만 또 어떨 때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그 때 당시는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결국 나를 돌아보게 된다. 작년에 사람과의 시련을 통해 올해 새로운 나를 알게 되었다. 아마 그 만남이 없었다면 절대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188p. 고백컨대 나는 사고-직관 유형이고, 감정과 감각 측면은 모자란 면이 있다.

나와는 반대 유형이고 구본형 선생님과는 같은 유형이다.

189p. 나는 명상이란 것을 하지 않았다. 명상으로 인해 내가 지금 노 젓고 있는 이 배의 진로를 지연시키는 갖가지 것들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우리 각자는 단지 나름대로의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술은 여러분이 운하를 건너기 위해 사용하는 배의 구조를 잘 아는 것뿐이다.

저자가 명상을 즐겨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저자의 [신화의 힘]에서 보다 더 유연한 모습이다.

191p. 행동하는 인간은 완벽을 표상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항상 이원성에서도 유독 한 측면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192p. 여러분은 차라리 불완전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감수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래. 이거다. 불완전을 감수하며 나아가는 것.

196p. 그리스인들은 인본주의자였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 플라톤적 지상명령이었다. 그 시기의 철학 논문은 품행과 미덕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란 이른바 선과 악이라는 의미에서의 덕이 아니라 탁월함이라는 의미에서의 덕이다.

197p. 18세기 즈음, 언어학자들은 인도에서부터 아일랜드에 이르는 여러 국가들의 거의 모든 언어가 이른바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언어학자인 지도교수의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연구해서 언어 연관성을 밝혀낸다.

198p. 훗날 히틀러가 채택한 아리아 족의 위대성이라는 관념 역시 그 우수한 민족이라는 관념과 연관이 있다.

아리아 족에서 독일의 뿌리를 찾았고 그 작업을 위해 그림형제가 민담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는 그걸 완전 극대화했다. 나치의 상징들을 보면 더 많은 것들이 있다.

201p.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 가지의 한계도 똑같다.

203p. 오로지 유대인들만이 알고 있던 어느 신에 의해 7일 만에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205p.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나 구원의 관념은 어딘가를 통과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207p. 우리의 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방법과 수단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는 어떻게 해서 성취될 수 있는가? 오로지 초자연적으로 부여된, 특별히 선호되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일원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 바로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취할 수 없는 거다.

209p. 토템, 종족, 인종에 대한 숭배, 그리고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종교는 미움을 사랑으로 억제하는 것의 심리학적 문제에 대해 오로지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표상한다. 즉 이것들은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입문을 시킨다는 것이다.

210p.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가 종교 없는 사회 체계라고 말한다. ... 공산주의가 어느새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의식적 측면만 보더라도 공산주의는 종교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더군다나 그 특성 자체가 성서로부터 비롯됐다.

216p. 내 생각에 성령에 반대하는 죄는 바로 절망이다. 성령은 여러분이 깨닫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며, 절망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도록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지옥이다.

서구에선 천당과 지옥, 사탄, 성령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 많다. 그래서 미술, 문학에 대해 알려면 기독교를 모르고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 교수는 기독교를 배웠다고 한다.

223p. 여러분을 가로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할 수 없다.‘

231p. 신들을 숭배할 인간이 없다면 신들도 있을 수 없다. 신들의 숫자는 무수히 많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종류가 무수히 많듯이.

232p. 우리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관념은 워낙에 강력하게 의인화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그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예수님 다 이미지로 남아있다. 영화 십계에서 너무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없는 하나님, 긴 머리의 흰 피부의 젊은 남자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상기된다. 어린 시절 많은 기독교 영화를 봤다. 십계, 쿼바디스 등등.

235p. 욥기가 지금껏 이해되어 온 방식은 전혀 그와는 달랐다. 그 내용은 이른바 한 인격체에 대한 복종의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그 인격체로 말하자면, 누군가를 놓고 그런 내기를 거는 정말이지 밥맛 떨어지는 타입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용감하다. 그의 강의를 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다니.

236p. 하나님에 관한 모든 관념은 이른바 인간 속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특성에 관한,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이미지일 뿐이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성령에 의해 피조물에게 지속적으로 전이되는 원형이다.”

239p.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 계발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돕지 않는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은유적인 사건들을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45p. 부활절과 유월절의 핵심진리는 우리 모두가 속박된 집에서 나오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의 경우에는 이집트의 속박에서 나오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지만).

249p. 도마의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나이까? 하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나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에 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인건지 모르겠더라. 영지주의라는 것이 어디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겠지. ~ 그래. 많은 하나님 중 한 분인 하나님을 믿고 현실을 중요시하며 살고 내적으로 성숙해지면 된다. 이게 나의 종교다. 저자 덕분에 항상 불편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던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250p.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특히 매번 1천 년이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말론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기독교인들만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점점 신앙인이 줄고 있다. 그래서 지역과 함께하는 선교적 교회로 변모했다.

251p. 여러분도 알다시피 기독교란 본래 공항의 시기에 생겨났다. 기독교 시대가 열리기 몇 세기 전에 레반트 지역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헬레니즘 제국이 분열되고 로마가 세력을 확장했으며, 유대인 공동체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하긴 그리스로마에서 보면 기독교야말로 이단이다.

254p. 유대인이었지만 우아한 그리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바울로는 유대교의 유일신 문화와 그리스의 비이원적인 전통 사이에서 갈등한 모양이다.

256p. 다시 한 번 읽어야 한다. 내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될 때ᄁᆞ지 기독교를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 하지만 그 종교를 포기함으로써, 그 너머로 나아감으로써 얻게 되는 어떤 강력한 힘도 있게 마련이다.

257p. 하지만 일단 벗어나면,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의 성스러운 성소를 만들어야 한다. ...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258p.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갑자기 교회 목사님께 저자의 책들을 보여주고 싶다. 어떻게 받아드리실까

259p. 내 생각에 성스러운 공간을 고안하는 좋은 방법은 그것을 놀이터로 삼는 것이다.

나에게는 복합문화공간이 그 성소가 될 것이다. 지금은 책과 노트북이 있는 테이블, 동네 작은도서관이다. 구본형 선생님도 이사해서 공간을 마련한 것이 성소를 찾은 것인가 보다.

260p.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계절별로 나는 것들을 따먹으며 산과 들로 뛰어다니면 놀았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것이었다.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다. 동물도 그리고 식물도 그리고 그린 것을 어른들께 보여드렸다. 미술을 따로 배우지 않았는데 재미있었다. 미술선생님이 꿈이었다. 북시터를 할 때 다양한 재료들로 독후활동들을 했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나의 신화인가보다.

262p. 명상을 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263p. 여러분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그런 봉인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또는 한 시간에 한 번씩이라도 말이다.

그래. 나에게 맞는 봉인 프로그램을 찾아보자.

265p. 여러분이 일단 자기만의 성스러운 공간을 갖고 나면, 여러분은(필요할 때면) 어느 장소든지 간에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270p. 여러분이 제대로 된 길로 접어든 경우에는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기적적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다.

283p. “계속해서 명상하십시오. 즉각적인 깨달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천천히 깨달음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방법에만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명상을 하는 중에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되고 변화되면, 그때 가서 여러분은 모든 길들이 타당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286p. 니체는 우리가 반드시 자기 힘의 4분의 3만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판별이다.
290p.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글쎄 아직 이렇게 간절함이 있지도 않지만 깨달음을 찾고 있지도 않다.

295p. 사람들은 말한다. “,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 계시죠.” 하지만 여러분이 자기 안의 그리스도의 충위에 있는 스스로에게 도달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기독교인이 아닌 셈이다.

298p.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아내를 기다리는 것도 더 이상은 지루하지 않다.

일상에서 다르게 생각함으로 전혀 다른 삶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사실 이걸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면서도 안 되는 사람도 많다. 모두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301p. “우리는 지금 핵무장에 반대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어서 우리의 대열에 동참해 당신의 생각은 포기하시고,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이건 좀 너무 비약이다. 생각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참할 의사가 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거기 관여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참여해야만 한다는 강제는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반드시 인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교훈적 차원에서 그러할 뿐이다.

인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에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인가. 사회적 의무라기보다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한 바람으로 하는 행동이다. 내가보기엔 구본형 선생님도, 저자도 사회적 행동에 대해서는 너무 소극적이다. 개인의 변화, 깨달음으로 세상이 변할까. 모든 사람이 저자의 책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면 사회는 저절로 변하는 것인가.

302p.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어느 편을 드는가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같은 공동체에서 고민해서 합의를 거쳐 나아갈 방향과 방법들을 실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개인적 노력과 사회적 실천을 동시에 해야 한다.

304p. 자아에 관한 의식과 그 관계 모두를 소멸시킨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307p. 결국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자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개인적 가치평가라는 것도 없다. ... 동양에서 벌어지는 모든 충돌은 곧 초자아와 이드 간의 충돌이다. 여기에서 자아 원칙이라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저자는 서양인은 자아에 갇혀서 그 자아를 깨기 힘든 반면 동양인은 자아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 쉽다는 거다.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동양과 서양을 이렇게 나눌 수 있을까. [서구의 몰락]이 인생의 책이라서 너무 동양에 대한 동경이 커진 것 같다. 어느 것도 이렇게 명쾌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없다.

317p. 남성의 힘은 셈 족과 인도-유럽계 아리아 족과 함께 도래했으며, 유목민들의 남성 지향적 사회에서 에너지의 구체적인 기능이란 바로 평원에서 가축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여러분은 남성과 여성 신화 간의 관계의 문제를 지니게 된 것이다.

갑자기 조승연 작가를 인터뷰해보고 싶어졌다. 조승연 작가도 저자처럼 문학과 미술을 공부했고 인도-유럽어를 공부했다. 그런데 조승연 작가는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저자와는 관점이 다르다. 왜 그런지 궁금하다.

318p. 현대 종교 중에서도 가장 남성지향적인 이슬람교에서는 여성을 기껏해야 아들을 낳기 위한 수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 사람이 아니라 천막이나 마찬가지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이 표현은 의외다. 서구의 시선으로 타문화를 보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왜 이슬람교에서 여성들이 부르카를 착용하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건가. 이슬람교의 여성인권으로 접근하면 모를까, 타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원시부족의 문화를 대하는 태도와 너무도 차이가 난다.

320p. 슈펭글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다.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저자의 인생의 책이라고 한 [서구의 몰락]이 너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후 슈펭글러에게 영향을 준 인류학자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너무 편중된 독서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사고의 깊이는 있지만 그 저자들에게 치우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본인의 생각과 부합되니 읽었을 것이고 읽고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글들의 나열처럼 느껴진다.

327p. 만약 어떤 여성이 성취의 장에 들어서는 남서의 과업을 수행한다면, 그녀의 신화는 본질적으로 그 남성 영웅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과거엔 여성의 문학, 역사가 없었으니 당연하다.

328p. 내가 알기로는 여성들이 이처럼 비인습적인 삶의 방식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물론 학계를 제외한다면 예술계뿐이다.

저자는 예술가를 아주 높은 경지에 두고 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건 영웅일 수 있다. 저자는 엘리트주의에서 못 벗어난 것 같다. 신화적 경험의 방법도 본인의 방법인 책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피그미족에 대해 레오 프로베니우스의 책 내용 말고 직접 한 번이라도 가봤을까 의문이 든다.

332p. -물론 그들을 가르치는 내 일상의 일 역시 맨 처음의 흥분이 가시고 난 다음부터는 전혀 즐겁지가 않지만 -

이런 생각으로 38년을 가르쳤다니 나로썬 이해가 안 된다. 특히나 천복을 따르라고 한 작가가 본인은 즐겁지 않은 일을 했다니.

그렇기 때문에 내 의도는 어떻게 하면 인생 여정의 후반부 동안에 세계를 읽을 수 있는지 그에 관한 영적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되었다.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living in the sacred)

345p. ‘환영이라는 뜻을 지닌 인도의 마야(maya)’ - ‘측정하다; 재어서 나눠주다; 형성하다; 창조하다; 짓다; 드러내 보이다; 전시하다라는 뜻의 동사 어근 (ma)’에서 유래한다 는 환영을 창조하는 힘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가상 둘 다와 관련된다.

346p. 우주 기원의 본질이자 여성성과 개인성의 본질인 마야는 다음의 세 가지 힘을 지녔다고 한다.

1. 차단하는 힘 ; 사물의 실재적, 내적, 본질적인 성격을 감추거나 은폐하는 힘이다.

2. 투사하는 힘 ; 환영으로서의 인상과 생각을, 그와 결합되는 욕망이나 혐오와 함께 방출하는 힘이다.

347p. 3. 드러내 보이는 힘 ; 미술과 조각 그리고 의례와 명상의 기능이며, 곧 뭔가를 알게 하는 기능이다.

352p. 지금부터 나는 여러분에게 내가 아는 기초적인 미학 이론의 설명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펼쳐 보일 것인데, 이는 바로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선보인 이론이다. ...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예술을 그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대상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을 부추기는 예술은 교훈적이라고 한다.

어떤 기준으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이라는 걸까. 그 기준도 내가 보기엔 너무 주관적이다. 저자에게 가장 공감되는이 낫지 않을까.

358p. 내 생각에 우리가 이런 조화를 가장 강력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일본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간간히 일본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보면 너무 피상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부분들이 있다. 불교국가의 동양을 보고 동양의 전체를 지칭하는 것 같다.

359p. 조화로운 리듬을 막는 두 가지 운동은 붓다의 두 가지 시험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는 욕망으로 여러분이 대상을 소유하게 만들며, 또 하나는 혐오 또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이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361p. 내가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과 심미적 도취와 관계가 있다.

저자의 예술에 대한 생각도 이분법이다. 적절한 예술과 부적절한 예술. 왜 예술이 욕망을 부추기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366p. 그것은 장엄한 예술이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심미적으로 심취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성당 그 자체 역시 예술 작품이다.

368p. 미술이란 동정녀의 매개다. 미술은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의 수단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초월로 나아가는 수단이다. 미술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항상 여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70p.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 예술가(아티스트)라는 말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용도는 곧 두 극단으로서, (a) 일에 유능한 사람, (b) 미술 분야의 예술가이다.

372p. 책을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377p. 슈펭클러는 이른바 장식으로서의 예술모방으로서의 예술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것에 관해 흥미로운 구분을 하고 있다. 장식으로서의 예술의 가장 좋은 사례는 건축으로, 완성된 구조물은 그때부터 초시간적이 되고 만다. 거기 그냥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 모방으로서의 예술이고, 춤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378p. 성스러운 춤은 신들을 위한 것이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379p.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그냥 예술 작품이면 안 되는 것인가. 예술가들도 각자 다른 이유로 예술을 하지 않을까. 하긴 저자는 모든 것을 신과 연결해서 사고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380p.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여러분을 궁지에 빠뜨리게 할 것이다. ... 여러분은 혹시 직업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안정된 직장만을 선호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381p. 내 조언은 이렇다.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예술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382p.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여러분의 작업과 여러분의 직업이 서로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83p.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꼭 기억해 두어야 겠다.

384p. 이것은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즉 여러분은 계속 나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어떤 말들을 떠벌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모두 거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85p.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386p.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사수스, 곧 시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

394p. 인도의 시와 철학은 감상할 수 있지만, 미술은 아니었다. 인도인들이 구현하는 이미지는 사물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변화를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397p. 내가 아는 예술가치고 돈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돈을 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406p. 우주적 알의 이미지는 여러 신화에 나타나 있다. ... 우주적 알의 껍질은 공간의 세계 틀이고, 그 안의 비옥하게 싹트는 힘은 자연의 소진되지 않는 생명적 역동성을 상징한다.

한국에서도 알에서 태어난 탄생설화가 많이 있다. 아들이 삼국유사를 보면 순 다 뻥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물론 책에는 친절하게 무슨 의미인지 잘 설명되어있었지만 말이다.

409p. 대부분의 성직자와 사회학자가 서로 다른 여덟 신으로 간주하는 것을 비교신화학자와 심리학자는 동일한 한 신의 여러 양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420p. 우리의 몸은 이 지구, 이 놀라운 무한한 우주라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와 함께 있는 존재다. ...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425p. 이제는 더 이상 경계라는 것이 없게 되었다. 경계가 사라짐으로 인해 우리는 충돌을, 끔찍한 충돌을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일 뿐만 아니라, 신화들 사이의 충돌이기도 하다.

426-427p.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옮긴이의 말

430p. 캠벨의 사상을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힌두교-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캠벨은 기독교나 불교나 힌두교 등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결국 한 점으로 모인다고 믿었고, 그 배후의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했다.

433p. 헌책방을 드나들며 구한 신화며 종교에 관한 책을 함께 뒤적이던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내 삶은 지금보다는 좀 더 평탄하고 점잖았을지 몰라도 어느 한편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 나 역시 나만의 희열을 따르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노라고. 그러나 후회는 없노라고.

나도 나만의 천복을 찾고 그것을 따라가 보련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도입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사랑->결혼->방랑->죽음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명상->기독교->불교->여신->여성->사랑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마야->미학->->글쓰기->미술->신화

 

큰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웅 여정에 맞춰있다. 그런데 너무 큰 카테고리로 묶여있어서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잊게 된다. 그 안에 소제목으로 나누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의식의 첫 번째 단계에 사랑, 결혼, 방랑 등등...그러면 글의 맥락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전체를 보고 나니 현세-> 종교-> 예술로 전개된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의식의 두 번째 단계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서구에서는 기독교, 카톨릭을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아 이해하기가 쉽겠지만 종교가 없거나 타종교인은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불교에 대한 내용도 명상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내용들이 어떤 개념인지에 대한 설명이 많다. 그리고 저자는 무엇보다 기독교보다 불교를 우위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신화보다는 종교이야기가 더 많다.

 

책 구성이 영웅 여정이다. 개인의 삶도 영웅의 여정과 같다고 말하는 저자이니 자신의 삶을 그 여정에 맞춰서 내용을 전개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저자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시기에 어떻게 보냈으며 그 영향을 준 사람이나 신화는 무엇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읽는 독자들도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며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 의무에 대한 것은 저자와 다른 생각이다. 개인적인 깨달음만을 중요시하고 있어 답답하다. 모두가 저자의 책을 보는 것도 아니며 저자의 책을 본다고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사회 안에서. 그렇기에 사회적 의무,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 책은 1983년 세미나 내용을 1991년에 출판한 것이다. 벌써 30년도 넘은 것이다. 캠벨은 1987년에 사망했다. 저자가 지금도 살아있고 계속 연구를 했다면 다른 내용이었을 것이다. 동양, 서양, 기독교, 불교, 여신, 남신 구분하고 우위를 따진 내용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저자의 다른 관점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또한 저자의 책읽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보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갈래들을 쫒아서 보았더라. 그래서 다른 관점에서 본 다른 연구자, 학자, 저자들의 내용을 같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리고 인도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독일 낭만주의 인도학자인 짐머처럼 저자도 아프리카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피그미족을 이야기하고, 불교국가가 아닌 동양을 가보지 않고 책에서 본 내용만으로 동양을 이야기한 건 아닌가 한다. 자전적 문학작품이나 한 지역의 이야기만을 하는 저자면 상관없지만 비교종교학을 하고 여러 민족의 신화를 연구한 저자라면 직접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3.  이 책의 장점

원본책의 편집이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어렵고 복잡할 수 있는 내용인데 시처럼 여백을 두니 빡빡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이것이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책이 두꺼워 졌다. 책이 두꺼워진다는 것은 우선 독자에게 부담이 돼서 손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책 가격이 비싸지면서 또한 독자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캠벨이란 저자에 대해 개인적인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람 냄새가 났다.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실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어 이해하기 좋았다.

신화 내용보다 종교와 삶을 이야기하고 있어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더불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 내용에 대하여

한국의 종교와 신화 내용을 다루겠다. 신화와 역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연구하고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에 역사왜곡으로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쓰겠다.


- 표지에 대하여

이건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긴 하지만 미국에서 출판된 책의 표지(첫 번째 이미지)와 한국에서의 표지는 다르다. 한국에서는 구스타프 크림트의 <우의와 상징>의 두 번째 시리즈 중 하나인 1897<비극(tragoedie)>(두 번째 이미지)의 가운데 그림은 뺀 그림을 표지(세 번째 이미지)로 사용했다. 출판사의 표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비극>옛 것으로부터 새 것으로의 전환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미지 상단에 보이는 위협적인 용은 신선한 극동 분위기를 풍긴다.”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영웅 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신화와인생원본표지.jpg  크림트 비극.jpg  신화와인생한국표지.jpg

내가 저자라면 표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겠다고 느꼈던 표지 그림이다. 왜냐하면 독자의 책 선택에서 제목, 표지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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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 11:21:24 *.56.108.184

ㅇ 캠벨책은 기독교인들에게 지탄을 많이 받았을것 같은데 그런 내용이 안보이더군요. 웨버님도 기독교죠? 우리 동기들 기독교

     제법 많은 것 같던데. 한번 의견 듣고 싶네요. 저는 카톨릭인데 믿음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ㅇ 말씀하신대로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로 보기 보다는 신화, 역사, 문화, 예술 이런 측면에서 이제부터는 다르게 봐야 할것 같습니다.

ㅇ 사회적 운동을 중요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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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9 15:39:26 *.124.22.184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동안 의구심이 들었던 내용들이 해결되서 좋았어요. 저도 오래된 신앙인은 아니에요.ㅎㅎㅎ

전 사회학이 맞아요. 인문학적 사고보다 사회학적 사고를 하게 돼요. 분석하는 것도 좋아하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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