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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인생
조셉 켐벨 / 다이앤K.오스본 엮음(갈라파고스)
저자에 대해서
단상 1
구본형연구소의 11기 연구원들의 기수 모임 이름을 정하는데 개인적으로 뭔가 좀 밝으면서도 따듯한 느낌을 주는 단어를 찾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은 단어가 bliss 였다. 뜻 자체가 빛나는 ,찬란한 이란 뜻이었다. 거기에 11이란 뜻의 eleven을 결합하여 blisven이란 이름을 제안했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캠벨책에서 발견한 것이다. ‘bliss’의 뜻이 ‘천복’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뭐랄까 정말 이것이 나의 천복인가?란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리고 <신화의 인생>은 앞 선 책과 마찬가지로 신화에 관한 책이라기 보단 <인생의 신비, 삶의 비결> 같은 철학서같다. 이번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작가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서 의문이 풀렸다. 작가는 신화 연구자이기에 앞서 비교종교학자이다. 그러다 보니 동서양의 많은 종교적 구성에 대해서 조예가 깊어졌고 특히 인도의 힌두교 및 철학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가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서술된 것이 <신화와 인생> 이 책인 것 같다. 그것 때문에 각각의 조금 더 깊은 내용과 자세한 서술이 빠진 점이 아쉽긴 하고 또 이 때문에 저자의 다른 책들을 읽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다음은 어느 평론가가 쓴 서평을 옮겨본다. 공감 가는 내용이 많기에 그냥 전문을 옮겼다.
책 제목은 <신화와 인생>이지만 이 책에선 신화의 이야기를 다룬다기보다는 대중에게 '신화학자'로 알려진 캠벨의 신화와 종교를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을 다루고 있어서 여러분들이 캠벨의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캠밸의 사상들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 때 이 책을 펼쳐보면서 캠벨이 우리에게 하고자 했던 의미들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면 이미 고인이 된 조지프 캠벨이 저 하늘 너머에서 우리에게 웃으면서 반겨줄거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이 책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책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슬픔은 도망치고 싶은 감정이다. '슬픔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슬픔 속에 그저 머물고 싶을 때도 있다. 슬픔만의 매력은 행복이나 만족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치명적인 극단성에 있다. 슬픔의 심연으로 내려갈수록 슬픔에는 '끝'이 없음을 느낀다.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잃었을 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 꿈을 향한 길목이 완전히 가로막혔을 때. 삶의 결정적인 문턱에서 우리는 가눌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의 힘으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을 느끼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아프지만 숭고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내게 슬픔이 지닌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책은 바로 조지프 캠벨의 에세이집 <신화와 인생>이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삶 자체가 품은 본질적 슬픔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슬픔은 결코 무력하지 않다. 슬픔은 지나간 시간을 겸허히 돌아보게 만든다. 앞으로, 위로, 더 나은 곳으로만 향하던 발걸음을 문득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슬픔이 가진 성찰의 힘이다. <신화와 인생>은 시계로 체크하는 '현실의 시간'뿐 아니라 현대인이 미처 돌보지 않는 '신화적 시간'이 존재함을 일깨운다. 가눌 수 없는 슬픔은 바로 '현실의 시간'과 '신화적 시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다. 내가 한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캠벨은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엉망진창인 네 삶이 차라리 정상이라고. 삶이란 타자의 시체를 먹어야만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임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라고.
내 마음속에선 두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하나는 시대의 흐름에 눈치볼 수밖에 없는 '시대정신'의 톱니바퀴. 하나는 끊임없이 아득한 과거를 향해 도망치고픈 '시대착오'의 톱니바퀴. 두 개의 톱니바퀴는 때로는 서로를 공격하고 때로는 서로를 격려하며 마음의 시계를 쉴새없이 가동한다. 사실 내겐 시대착오의 톱니바퀴가 훨씬 유혹적이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마음껏 시대착오적이고 싶었다. 한없이 옛이야기에 빠져들고, 유행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보고, 케케묵은 옛것들 속에서 안분지족하고 싶었다. 너무 바삐 돌아가는 현재의 시간에 지쳐 있었기에. 시대착오의 톱니바퀴는 신화적 시간을 향한 끝없는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버릴 수 없는 그리움이다. 하지만 시대정신의 톱니바퀴는 내게 '좀 더 어른이 되라'고 충고한다. 과거에 탐닉하여 현재 따위는 돌아보지 않고 싶을지라도,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들에 눈감아선 안 된다고.
나는 신화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뛰어넘고 싶다. 신화는 남을 향한 질문, 세상을 향한 질문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잠자는 현자를 불러 깨워 대화하게 만든다. 나는 저 머나먼 신화가 이토록 뜨거운 인생을 향해 건네는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현실의 삶이 아무리 팍팍해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눈부신 신화의 시간이 살아 숨쉬고 있다. 신화를 통해 나는 배운다. 삶의 외적인 조건에 핑계대지 않는 씩씩함을. 운명의 부름에 무조건 '예스'라고 대답하며 오늘도 담대하게 나아가는 용기를. 세상 모두가 가로막아도 반드시 나 홀로 짊어져야만 할, 내 '운명의 부름'이 있음을.
- 정여울 문화평론가
역자 : 박중서
한국저작권센터(KCC)에서 근무했으며, ‘책에 대한 책’ 시리즈를 기획했다. 현재 출판기획자 및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영어 수다』,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조지프 캠벨의 『신화와 인생』, 찰스 밴 도렌의 『지식의 역사』,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등이 있다.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21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변화의 시작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뜻인 것 같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고 나를 둘러싼 우주가 변한다.
P24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빵이란 결국 밀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죽음과 삶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렇게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P36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림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있어야만 한다. “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머리에 불 붙은 사람이 찾는 연못은 간절함과 절박함 그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농담 하나가 생각난다. 복권에 당첨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제발 먼저 복권을 사라
P43-1
남자는 여자를 비난했고, 여자는 뱀을 비난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휠씬 더 큰 저주를 내렸다. 남자의 처벌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그저 일하고 땀을 흘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반면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아야만 했고, 뱀은 남은 평생 배로 기어 다녀야만 했다.
P43-2
기독교와 유대교는 귀양살이의 종교다.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P45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최초의 인간들은 남성-남성과 남성-여성, 여성-여성의 세 종류로 되어 있었다.
왠지 조금 무서운 말이다. 동성애가 역사 깊은 이야기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널리 인정받던 것이었나?란 생각이 든다.
P46
배우자를 찾을 때 만약 여러분의 직관이 훌륭한 경우, 적임자를 찾을 것이다. 만약 훌륭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잘못된 사람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직관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직관이 생기기 전에는 배우자를 찾는 것을 미루는 것이 좋겠네요.
P48
[남성의 경우] 투사 형성 요인은 아니마 또는 아니마로 표상되는 무의식이다. 꿈에서건, 환상에서건, 공상에서건 그녀(아나미)가 나타날 때는 인격화된 형태를 취하고, 따라서 그녀가 구현하는 요인들이 여성적 존재의 모든 뛰어난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예시한다.
P49
그것이 바로 아니무스의 방식이다. 여성 자신도 할 수 있지만, 대신 남성에게 위임하는 그 어떤 일을 투사하는 것이다. 존재 가치로는(여자에 비해) 그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자는 특화된 신체를 지닌 기계나 다름없어서, 그런 일을 너끈히 해낼 수 있는것이다.[여성의로서의] 여러분속의 있는 힘을 자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힘에 의해 가능한 행동이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남성에 의해 더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곧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다.
남성은 여성에 의해 조종받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단지 기계나 다름없다는 표현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P55
“이것이 내가 필요로 하던 것이다.” 파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기회인 양, 도전인 양 다가가라. 여러분이 그 순간에 사랑을-낙담이 아니라-가져온다면, 여러분은 힘이 거기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여러분이 견뎌 내는 재난은 그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됨됨이,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킨다.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야말로 여러분 자신의 본성을 자발적으로 샘솟게 할 기회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여러분은 마치 어마어마한 실패인 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 준 사건이었음을,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자면]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닌 것 같다. 저자의 진심이자 우리에게 꼭 이야기해 주고 싶은 삶의 신비이자 비밀이 아닐까? 실패란 없다. 단지 과정일 뿐이다.그 과정을 어떻게 지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 순간이 바뀌는 것 뿐이다. 우리 모두는 어려움을 딛고 영웅이 될 수 있다.
P56
신화학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에너지의 신비를 깨닫게 해준다. 그 안에 여러분의 영원이 놓여 있다. 신화학이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에서 인간 영혼의 경험, 행동, 성취에 관한 은유를 간직한 이미지들이 조합된 것이다.
P58
노년에 이르면 여러분은 긴급한 일과로부터 해방되고, 그 무엇보다도 더 생생한 자신의 기억 시스템 속에서 침참한다. 여러분의 부모님과 함께 했던 중대한 순간들이 이제 거기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순간들이 중요해진다. 그것은 관계란 것이 어떠했는지를 조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명확한 순간들이다.
P63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르포[광인], 즉 사랑에 몰두한 까딱에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궁정연애에서 미치는 쪽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남자가 이러한 상태라면, 그는 믿을 수 없는 위업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 좁은 길에 서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열정을 따를 때, 사회의 도움은 사라진다. 여러분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이제는 완전히 혼자니까.
어렵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란 무엇이란 말인가?
P66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 성찬식, 또 다른 삶에 참여하는 은총이다.
P67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함께 이끄는 것이며, 열려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이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 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다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여러분은 이리저리 떠다니겠지만 지혜와 연민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P69-1
메버릭 로드에 접어든 순간, 반대편에서 영구차 한 대가 나타나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이제껏 그 동네에서는 영구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것이 우리 부부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이라는 징조라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정말 긍정적인 해석이다. 대부분 불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해석을 보면 사람은 정말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이고 아는 만큼 세상을 해석하는 것 같다.
P69-2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하지만 그런 헌신을 여러분에게 바친 상대방에게 대한 책임감을 잃는 것, 다시 말해 난 앞으로 이 방향에서 벗어나고, 지금까지 이미 헌신했던 것에 대해선 싹 잊어벼려야지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을 잃는 것은 결혼생활이 아니다. 배우자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도 되돌아보게 된다.
P72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아내는 나를 위해 삶을 구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나는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그것은 정말 훌륭한 생각이었다. 여자는 삶(생명)의 사크티(sakti),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달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세상은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여자와 이를 수행하는 남자로 이뤄져 있는 것 같다.
P74
나 개인적으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여러분은 차라리 분별력을 지니고서, 나쁜 놈들은 나쁜놈들로 인정하고, 따귀를 한 대 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 이게 정신 건강에 좋은 거 같다.
P77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행동이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P79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가령 우리가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화는 특정한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정당화한다.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십계명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우리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삶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준다.
P83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자본주의이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대 명제라고 생각한다. 돈이 우선인 사회적 시스템이다. 그런데 돈이 곧 행복이 아닌 것은 알겠다. 하지만 돈이 필요하긴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있으면 여러가지로 유리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P87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강요할 갖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길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길 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용기이고, 아무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는다.
P89-1
한번은 작은 서랍장의 맨 위 서랍안에 1달러짜리 지폐 한장을 넣어 두고는, 그 돈이 거기 남아 있는 한 하직 빈털터리까지는 아니라고 자위한 적이 있었다.
돈이란 우리 삶에 있어서 무엇일까? 정말 알면 알수록, 고민해 보면 볼수록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P89-2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이 열망하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어떤 것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P90
마치 삶 자체가 어떤 [일관적인] 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겪어 온 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 뒤에 또 뜻밖의 일이 뒤를 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인생은 언제나 혼란스럽고 두렵다. 난 처음 가보는 길이니까
P93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보세요.” 나는 그 책의 제 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보겠는걸. 아, 내 예술을 어쩌나.” 그는 거의 2주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놀랍다. 대 작가들도 이렇구나. 용기를 내자.
P99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오직 내 자신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근데 참 어렵다.
P100
하지만 방랑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일정의 신비로울 정도의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뭇가지는 이쪽으로 자랄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자랄 수도 있으며, 그리고 나서는 또 다른 쪽으로 자랄 수도 있다. 나무를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105
여러분이 [의례적으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바와 정반대되는 행동이 바로 공감이다. 성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장소에 온 사람인 동시에 공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공감의 역동성을 자신의 동기로 삼는 사람만이 성배를 발견하는 것이다.
P109
천국이란 여러분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그것은 영원히 여러분 자신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그것이 바로 환희이다. 그 다음 현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과 봉사’를 즉 여러분과 만물 내에 존재하는 삶의 에너지를 생성할 것을 요구한다.
천국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P111
영웅이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너는 지금 ‘잠든 땅’에 있다. 깨어나라. 여행을 떠나라. 저곳에 너의 의식의, 또한 너의 존재의 온전한 측면이 있건만, 아직 한 번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냥 머물 것이냐? 아니, 그렇게 하는 건 너에게 충분치 않다.” 그렇게 해서 여정이 시작된다.
영웅의 여정, 결국 나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인 셈이다.
P112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은 [지금 본인에게] 요구되는 모험이 끝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P122
전형적인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잔뜩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가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 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중년이 되어서까지도 여전히 착하게 굴면 이득을 얻고, 나쁘게 굴면 벌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뒤쳐진 것이다. 그들의 유아적 자아가 중년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적절치 않다.
이제 사막을 건너왔으니 나도 용을 죽일 때가 되었다. 그리고 내 안의 나를 발견할 때가 된 것이다. 깨어나야 한다. 나를 찾아와야 한다.
P126
우리가 사용하는 이 멋진 언어로는 그 시기를 ‘황금기’라고 하는데, 이는 무척이나 적절한 표현이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만물이 생동하고 꽃 피는 시기이다. 정말이지 아주, 아주 달콤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정말 그럴까? 그래도 이런말을 들으면 나이 먹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P129
여러분이 취하는 동물의 생명을 돌려주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동물의 희생에 앞으로는 감사해야 겠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해야 겠다.
P137
장담컨대, 이제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진짜로, 진짜로 알았다. 우리에게 그 보물들을 하니씩 포기하도록 했던 명령은 사실 매우 계시적이었던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 자신의 가치 순서가 어떤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 것이다.
P141
천장의 전구가 모두 빛의 수레이듯,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의식의 수레이다. 하지만 전구엑는 빛의 질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의식의 질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덧 없는 육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육체를 단순한 의식의 수레로 여기고, 의식을 우리 모두를 통해 현현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P142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P149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인 것 같다. 가족이 생기면서 죽음에 대해서 다시생각하게 되고, 두려워졌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와 받아들임에 있어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P157
‘차크라’(chakra)는 ‘바퀴’라는 뜻이다. ‘차크라’는 또한 ‘연꽃’이란 뜻의 ‘파드마(Padma)’로도 불린다. 그런 것이 일곱 개인데, 그 중 세 개는 골반 부근에 위치하고, 세 개는 머리에 위치하고, 나머지 하나-심장 차크라-는 그 사이에, 즉 심장의 박동이며, 숨의 박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박동이 있는 커다란 구멍에 위치한다.
P159
낮은 단계에 있는 세 개의 차크라들은 소박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양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외적으로는 연인들, 전사들, 건설사들, 성취자들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의 기쁨과 슬픔은 ‘저 바깥’ 세상에서 성취한 것, 즉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작용한다.
P161
여러분이 상위의 차크라들에 도달하려면, 처음 세 개의 차크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생존, 섹스,그리고 힘이. 여러분이 4층으로 올라가려 한다면, 그 건물의 아래쪽 세 개 층을 허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차크라가 이렇게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조직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P162
깨달음 직전에 도달하면 예전 방식이 오히려 더 유혹적이어서 여러분을 뒤로 잡아 끌게 마련이다.
영웅의 여정에 마지막 관문인 것 같다. 누구나 변화가 싫고 익숙한 것이 편하지 않을까? 그것은당연한 것 같다.
P163
그 유리판을 없애 버리고 나면, 여기에는 주체도 객체도 더 이상은 없다. 객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주체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놓은 최후의 장벽은 여러분이 신이 되는 것을 막는 장벽이다. 유리판은[이 두가지 단계를] 갈라놓는 요소를 말한다. 유리를 제거하는 것은 곧 여러분이 신을 아는 것을 막는 무지의 차단막을 소멸시킴을 의미한다. 신-형체를 지닌 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지의 마지막 속삭임이다. 이 단계에서 여러분은 어떤 상징을, 어떤 경험을 가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이 마지막 속삭임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바라본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장벽이다.
신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관념, 선입견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인가?
P164
신이란 은유로 표현되는 초월적인 것을 취한다는 의미다. 여러분은 이 두가지 사고 가운데 어디에 있는가? 신은 이 두가지 신 가운데 어디에 있는가?
P169
새끼 호랑이는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진정한 가르침 앞에서 모든 사람이 그러하게 마련이듯이.” 진정한 가르침과 마주하고 켁켁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호랑이는 그것을 자기 핏속에, 자기 몸속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먹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올바른 본성을 건드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해가 쉬운 비유법이다. 다른 어떤 문장보다 쉽게 이해된다. 어떤 깨우침이란 대개 본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처음 받아드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영화 메트릭스가 생각난다. 진실 앞에 선 주인공의 혼란스러워 했던 모습.
P170
물론 여기서의 교훈은 바로 우리 모두가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라는 것이다. 오른쪽 길, 즉 사회적 부문은 우리가 염소로서의 성격을 배양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신화-은유로 이해해야 하는 적절한 듯한-는 여러분이 호랑이로서의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끔 인도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여러분은 이 염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호랑이의 본성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인 것이다. 이 숙명을 깨닫는 것 조차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P172
진과 나는 융 부부와 함께 취리히 호수에 위치한 그의 거처인 볼링엔에서 한시간 반 동안 함께 차를 마신 적이 있다.
그들의 대화란 어떤 것일까?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무척 궁금하다.
P174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이며, 이 문은 우주의 밤을 향해 열려 있다. 그 밤은 자아의식이 생겨나기 오래전부터 정신으로 존재했고, 또한 우리의 자아의식이 얼마나 멀리 확장되건 정신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자아의식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P176-1
여러분의 신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 수준의 현시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나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 속에 들어 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이해가 매우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신화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내 꿈, 나의 신화를 적어봐야 겠다.
P176-2
“우리는 매일 밤 브라흐만의 세계로 가지만, 아뿔사, 잠든 채로 가는 것이다.” 요가의 목표는 깨어 있는 채로 그 영역에 가는 것이다.
요가가 그런 기능을 하는 의식이었던가?
P179
이렇게 학습한 대부분의 신호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사회적 질서가 만든 것이다. 이 신호는 사회적으로 특수하다. 하지만 이 신호가 유발하고 통제하는 자극은 자연, 생리, 본능의 것이다.
P188
융은 영혼의 구조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 주는 심리학적 기능 네가지를 구분한 바 있다. 바로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감각이란 뭔가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사고란 그게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기능이다. 감정이란 그 가치를 우리에게 평가해 알려 주는 기능이다. 직관이란 우리가 그 대상이나 그 상황에 내재된 가능성을 예측하게 해 주는 기능이다.
P190
여러분이 절대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광기의 일종이다.
절대진리는 없다는 뜻인가?
P191
행동하는 인간은 완벽을 표상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항상 이원성-그 자체로는 완벽인-에서도 유독한 측면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행동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럽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나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P201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성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가지의 한계도 똑 같다.
P205
그렇다면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바로 여러분의 두려움과 욕망이다. 붓다는 바로 이 두가지를 초월했다.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대해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붓다와 예수는 동등하다. 예수 역시 동산의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결국 그 스스로가 나무의 열매가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 두려움과 욕망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기야 종교적 성인만이 다다를 수 있는 단계일 것이다
P214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을 기리며 절을 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루시퍼는 거절했다. 우리는 그 이유가 그의 오만한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무슬림식의 해석에 따르면, 그 이유는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어찌나 깊고도 강렬히 사랑하고 사모했던지, 차마 다른 어떤 것을 향해 절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그는 지옥으로 떨어졌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그곳에 영원히 있도록 처분 받은 것이있다.
솔직히 좀 이해가 안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천사들 하나 통솔하지 못하고 이른바 천사들이 질투를 느끼고 속 좁게 구는 것일까? 아마도 캠벨식 해석에 따르면 이 역시 상징적인 은유일 것이다.
P217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에게 불리한 어떤 것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력이 없고, 그로인해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톨릭국가에서 개신교 신자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개신교국가에서 가톨릭신자로 살아가죠. 당신이 오로지 흑인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리함과 콤플렉스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하게 되는 것 같다.
P219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P222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장애물은 무엇이며,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광휘로 변모시킬 것인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한번 물어보라. ‘내 길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
너무 많은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그런데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
P231
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들은 무수히 많다. 여러분의 신을 선택하라. 여러분이 숭배하는 신이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사실 잘 알지 못하고 신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P237
융이 [욥에의 회답]에서 하는 말도 바로 이것이다. 즉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더 원본에 충실한 이미지와 텍스트에 집착하는 것 같다.
P239
교회는 어디까지나 은유적인 사건들을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전혀 믿지 않으므로 교황은 이제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연 누가 처녀수태를 믿겠는가? 처녀수태란 은유적인 것이며, 승천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예수의 승천을 믿을 수도 있지만, 다만 이때는 외부 우주를 내부 우주로 전환시킨 다음일 것이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효과 못지 않게 부작용이 나타나는 주된 이유란 생각이 든다.
P240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불러낸다.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여기 있다.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 광휘를 목도한다. 부활절의 계시가 바로 거기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P241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우리는 껍질을 벗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거듭 나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참화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건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만 하며, 그래야만 그 상징성이 감지될 수 있다.
P242
따라서 십자가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들이 우리에게로 내려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통[십자가를 놓음, 즉 가로지름]인 것이다.
P245
부활절과 유월절의 핵심진리-사실 한 뿌리를 지니고 있는-는 우리 모두가 속박된 집에서 나오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의 경우에는 이집트의 속박에서 나오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었지만). 우리는 속박에서 벗어나 우리의 전통으로 돌아오도록 부름을 받았다. 마치 달이 어두운 그림자를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삶이 죽음의 그늘을 벗어던지는 것처럼. 부활절이 진정한 부활이 되고, 유월절이 진정한 유월절이 되기 위해서는 심지어 그러한 축제들이 비롯된 전통 그 자체로부터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
P246
오해는 다름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화적인 상징을 마치 그것들이 역사적인 사건을 가리킨다고 독해함으로써 생긴다.
근래 종교적인 갈등과 문제도 이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P254-1
처녀수태의 모티프는 오로지 그리스인 루가가 쓴 [루가의 복임서]에만 나와 있다.
P254-2
복음서는 재미있는 물건이다. 서로 맞지가 않기 때문이다. 불운하게도 무려 네명이 썼고, 더군다나 제작기 다르게 썼기 때문이다.
P255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바울로는 사실 그 젊고 영감 넘치는 유대인 랍비가 극적으로 피살된 것이야말로 그리스의 교훈극 영웅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연기로 해독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가 싶다.
종교계로부터 어떠한 공격도 안 받으셨는지 정말 궁금하다.
P256
하나님은 구체화되고, 구세주도 구체화되고, 세상의 종말도 구체회되었으며, 따라서 기독교는 그 은유적 시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만약 그 역사적 ‘사실’을 은유로 읽는다면 여러분은 기독교 속에서 심리학적으로 타당한 그리고 구체화되기 전까지는 근본적으로 제법 괜찮은 상징을 놀라우리만치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257-1
하지만 일단 벗어나면,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의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야만 한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아지트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이 아마도 내 인생의 첫 성소였던 것 같다.
P257-2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대립자의 쌍들 – 가령 원인과 결과, 득과 실 등등 – 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가령 돈이나 명성을 얻는 방식의 기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 공간에 있는 어떤 것도 실용성을 그 주된 특징으로 지니고 있진 않다. 또한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여러분 자신의 삶의 조화를 위해 중요하다.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만사가 여러분의 원동력의 형태로 작용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의 원동력도 아니다.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앞으로 어떻게 나만의 성소를 만들지 고민이 된다. 재미있는 제안이자 분석, 충고란 생각이든다.
P262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성스러운 공간의 정신은 바로 시바의 춤이다. 모든 의무를 벗어던진 것이다. 이처럼 의무를 벗어던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상관이 없다. 휴식이 곧 놀이인 것이다.
P271
내가 던진 질문은 이러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고, 모든 것이 성스러운 광휘라면, 어떻게 우리는 무지나 잔인함이나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과 나의 경우, 우리는 ‘예’라고 합니다.” 사회의 이상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신비주의자의 길이다.
P273
동양의 신이나 붓다는 서양의 야훼나 삼위일체, 알라 같은 궁극적 서술어가 아니다. 오히려 동양에서는 그런 존재 너머에 있는 것, 즉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그러나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한 어떤 존재, 의식, 그리고 기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P276
불교 사상에서는 두 가지 큰 줄기를 구분해야 한다. 첫번째는 개인의 구원이라는 이상에 전념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도적인 자기 수양을 제시한다.
P289
그들은 정상적인 삶의 경험과 니르바나의 저편 물가 사이를 가르는 강물을 건너갔으며, 모든 대립자이 쌍을 넘어섰으며, 모든 둘 됨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P290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햇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가슴에 가장 와 닿는 문구였다. 지금 내 머리에 불이 붙었다고 생각해보자, 난 다른 생각을 할 수있을까? 그런 시간이 이쓸까? 지금 내게 이런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는가?
P297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을 경험하고 또 영과 의사소통한다.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영을 완전히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곧 죽음임을 안다.
P304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삶을 바꾸는 것도 나를 둘러싼 우주를 바꾸는 것도 시작은 내 태도의 변화가 시작이다.
P312
한두교에서는 모든 힘, 즉 ‘사크티’가 여성형이다. 따라서 여성은 그 힘의 전체성을 표상하며, 남성은 그 여성의 대행자로 묘사된다.
세상의 중심은 표면상으로는 남성인 것 처럼 보이나 본질은 여성이 중심인 것 같다.
P329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룬 작품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 ‘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지각하느냐뿐이기 때문이다.
모험의 여정을 떠나야 하는 것은 조금 더 불완전한 남성의 몫인 것 같다.
P341
거기 멍하니 서 있는 동안 갈대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자, 청년은 그제야 그 갈대며 세상 만물이 바로 그 처녀임을 깨달았다. 처녀의 유혹과 매력 – 마하야나의 이미지에서 표상된 여성의 향상 – 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우주의 아름다움의 니르바나적 은혜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 경전을 이해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경험한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깨달음을 얻었다.
P345
환영(幻影)이라는 뜻을 지닌 인도의 ‘마야(maya)’ - ‘측정하다:재어서 나눠주다; 형성하다; 창조하다;짓다; 드러내 보이다; 전시하다’라는 뜻의 동사 어근 ‘마(ma)’에서 유래한다 – 는 환영을 창조하는 힘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가상 둘 다와 관련된다.
인도의 철학적 깊이는 참 어렵다.
P351
삶의 목표는 환희이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좋은 말이다. 환희가 없는 인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P352
조이스는 이른바 ‘적절한 예술’과 ‘부적절한 예술’을 구분한다. ‘적절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실제로 예술에 속하는 바를 의미한다. 반면, ‘부적절한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봉사하는 예술을 말한다.
P353
우리가 바라보는 대부부의 미술은 교훈적이거나 외설적이게 마련이다.
이 외설이란 개념이 참 모호하면서도 적절한 것 같다. 아마도 외설적이란 단어에 대한 내 선입견때문일 수도 있다.
P383
창조적 모험은 항상 무모하다. 이는 심지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하는 가장 간단한 일에서도그렇다. 괴테의 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작가의 슬럼프-이것은 작가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대한 거부나 마찬가지다-에 빠진 어느 젊은 작가에게 흥미로운 편지를 써 보낸적이 있다. 실러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의 문제는 시적 요소가 그 스스로를 드러낼 기회조차 갖기 전에 비판적 요소를 끌어냈다는 점입니다.” 가령 시의 경우, 우리는 젊은 시절 내내 셰익스피어와 밀턴의 작품을 공부하고, 나중에 가서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짧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도대체 뭐람’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그냥 놓자. 고민보단 우선 내면 속에서 하는 이야기를 적자. 그 후에 일은 생각하지 말고 걱정 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자.
P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용기를 가지고 우선 쓰자.
P399
따라서 우리는 성스러운 공간을 예술로 가득 채워야 한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예술’이란 곧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인 것이지 가령 여러분의 집안에 예쁜 장식을 달고 지내라는 뜻은 아니다.
P409
신화의 신들은 우리 주위의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P421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껴라.
조셉 캠벨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함축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신화가 주는모든 교훈을 종합해 보면 결국 나의 천복, 나의 희열을 찾는 삶을 사는 것이다.
P425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되어 있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것도 역시 동일한 모양이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목차가 조금 더 상세하게 구성이 되면 독자 입장에서 이 챕터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이해가 더 쉬울 듯 하다. 현재의 목차는 거대담론처럼 큰 틀에서 규정 지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짧게 구성된 각 글마다 소제목을 달아주면 더 이해가 빠를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목차를 다시 구성해본 목차는 다음과 같다.
탄생과 죽음>남성과 여성>사랑과 결혼>돈>인생의 모험>종교>명상>여성과 신>춤>예술
2. 보완이 필요한 점
옮긴이의 말처럼 조셉캠벨의 강의록이라고 할 수 있어서 조셉캠벨의 방대한 사상에 대한 개론서같은 책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개념이 전후 사정없이 쓰이고 각각의 개념이 혼합되어 나오다 보니 조셉캠벨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한 내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이해를 전제로 설명된 것이 많아서 더욱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중간에 나오는 새끼 호랑이의 사례처럼 조금 더 독자 입장에서 이해가 쉽도록 비유를 해서 서술했더라면 어떻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차크라라던가 종교적인 개념에 대한 도표나 설명이 될 수 있는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면 조금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이 책의 장점
이 책을 통해서 조셉캠벨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조셉캠벨의 책에 대해서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셉캠벨이 생각하는 바를 폭 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조셉캠벨이 신화학자라기 보단 비교종교학자 그리고 인도 종교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것을 이책을 통해서 알았다. 이제서야 ‘신화의 힘’을 읽을때의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그래서 종교적 깊이와 거기에서 나오는 인생의 신비, 삶의 의미와 자세 등에 관해서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고 조리있게 서술할 수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신화에서 배우는 인생의 비결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큰 스승이 제자 또는 자식들에게 해주는 조언 같은 느낌을 책을 읽는 내내 받았다. 이 책을 통해서 조셉캠벨에 대한 눈을 뜬 정도인 것 같다. 그의 다른 책들을 읽어 보고 싶고 저자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른다. 내 희열을 쫓아서, 천복을 찾기 위해 그의 책을 조금 더 찾아봐야 겠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개인적인 느낌이나 평가일 수는 있으나, 인도철학, 종교는 사실 우리에겐 굉장히 낯 설은 분야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그래도 이에 비하면 우리 삶 속에 조금은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이야기는 나름대로 이해가 빨리 되는데 인도 힌두교, 그리고 철학 이야기는 정말 몇 번이고 다시 되새겨 봐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전 이해도가 낮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종교적 배경이나 내용에 대해선 조금 더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적절하고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함께 쓰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중간 중간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비유적으로 서술해 준 내용 덕분에 개념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세계의 유수의 신화들을 모두 섭렵했다고 하는데, 각 지역별 번역 시 해당 국가의 신화와 연계된 내용을 서술해주면 조금 더 독자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서기가 쉽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일본에 대한 대단한 호감과 문화적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살짝 질투도 나기도 하고 동양 문화에 대해선 그렇게 깊은 조예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란 생각도 들었다. 조셉캠벨이 공부할 당시 아직 한국에 대해선 연구가 진행된 것이 없어서 일까?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우리나라는 세계 종교사에서 몇 가지 큰 특징이 있다고 알고 있다. 최초의 자생적인 카톨릭 전파 국가이자. 기독교의 3대 교회가 있는 나라, 그리고 토속적인 기복신앙과 접목된 독특한 기독교의 형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타 지역 종교들과 그리고 타 국가의 기독교 전파, 현 상황들과 비교해서 언급이 된다면 좋았을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과 궁금증을 반영한 의견이다. 쓰다 보니 혹 이런 책들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찾아보고 읽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