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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5일 11시 56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1. 저자에 대하여


 


조지프 캠벨의 인생


조지프 캠벨은 1904년 뉴욕 시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아일랜드 카톨릭 종교를 강하게믿었다. 이 유산은 캠벨이 교회의 의식과 상징에 열중하게 했다. 신화에 대한 관심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에서 인디언을 만났던 7살 때 시작되었다. 캠벨은 궁극적으로 방대한 학습을 이끌어 낸 원주민에 대해 강렬한 매혹을 느꼈다. 그의 소년기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고급 인류학 보고서를 비롯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읽는 데 소비되었습니다.


 캠벨은 1921년 코네티컷 주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스쿨을 졸업했다. 1924년 북대서양을 건너면서 그는 신지학자의 대가인 지드 크리쉬나물티를 만났다. 이 관계는 그를 인도의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캠벨은 1925년 콜럼비아 대학에서 영어 학사학위를 받았다. 1926, 성배의전설에서 황무지 상징주의의 기원인 ‘The Dolorous Stroke’에 대한 논문으로 중세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고문은 아서리안 학자인 로저 루미스였다.


 1926년 캠벨은 또한 펜윅 홈즈가 가르치는 뉴욕시 종교 과학 교회 (New York City Religious Science Church)에서 수업을 들었다. 코스의 일환으로 캠벨은 Science of Mind를 읽었다. 관련된 논문 연구를 위해 파리(1927-28)에서의 한 해 동안,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에게 미학에 대한 개인적 지도의 시간은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는 피카소, 브랑쿠시, 브라케의 예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캠벨은 W.B 예츠, T.S 엘리엇 및 제임스 조이스를 읽었다. 그는 율리시스의 복잡함을 설명한 조이스의 저서 율리시스의 출판인인 실비아 비치와 친구가 되었다.


 뮌헨 대학(1928-29)에서 캠벨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이 심리학에서 신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또한 토마스만의 소설에서 신화적 관점을 주목했다. 이러한 근대의 모든 전문가들은 그의 생각에 크게 영향을 미쳐 향후 신화가 심리적 삶의 예술적 표현이라는 것을 이론화하게 했다.


 콜럼비아 대학교로 돌아온 캠벨은 자신의 논문의 범위를 심리학, 문학 및 예술과의 유사성을 가진 성배의 신화를 넘어 더 확대하길 원했다. 그의 지도교수들은 그러한 학제적 관점이 용납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캠벨은 박사학위를 끝내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뉴욕의 우드스톡에서 수 년을 보냈다. 그는 1931~32년 소설가인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방문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스왈드 스펭글러의 <서구의 쇠퇴 (The Decline of the West)>를 처음 읽었다. 캠벨의 광범위한 비전은 스펭글러의 스타일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캠벨은 사라 로렌스 대학(1933~1972)의 문학교수였다. 그는 수업을 들었던 학생인 진 어드만과 결혼했다. 진 어드만은 현대 무용에서 연기자와 안무가로 유명했다. 그들은 아이들이 없었다. 그는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서(1942)와 뉴욕시 베다타 센터의 지도자, 스와미 니힐라난다와 함께 우파니샤드의 4권으로 구성된 시리즈를 번역했다.


 그에게 중요한 멘토는 C.G. 융의 동료인 인도학자 하인리히 짐머였다. 짐머는 1943년에 폐렴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사망 이후 12년 동안, 캠벨은 짐머의 논문을 바탕으로 4권의 책을 편집하고 상당 부분 집필했다.


 캠벨의 또 다른 초기 글들을 보면 나바호 의식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또한 앙리 모톤 로빈슨과 Finnegan's Wake(1944, 제임스 조이스 소설)를 해석하는 책을 공동 저술했다. 이것은 조이스의 복잡한 소설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분석이었다. 캠벨의 영웅여정개념을 이끌어 낸 것은 바로 조이스였다. 이것은 영웅여정은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의 훌륭한 신화 이야기이다. 그것은 영웅의 입문 모험이다.


 캠벨을 20세기의 탁월한 비교신화학자로 세운 것은 1949, ‘천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of Thousand Faces)’의 출판이었다. 그는 이 책이 신화를 읽는 가이드가 되도록 의도했다. 캠벨은 도전적인 경험이 어떻게 입문 모험으로 보일 수 있는지 설명했다. 이것은 고대(과거) 이야기와 현대 생활의 정서적 관심 사이의 연관성이었다.


 영웅의 여정에 대한 캠벨의 묘사는 과거 수 많은 세대의 예술가와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세계 신화의 위대한 이야기들 사이에 유사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신화, 종교, 문학 및 의식의 초기 입문 모델이었다. 캠벨은 ‘The Rites of Passage(1912)’ Arnold van Gennep이 개발한 간단한 매트릭스(출발, 변형, 반환)를 알게 되었다. 캠벨은 테마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이론을 사용했다. 하나는 Adolf Bastian이 개발한 기본적인 아이디어의 원칙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칼 융의 심리학에서 유래한 원형과 비슷한 개념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설명된 영웅의 여정은 입문의 과정을 설명한다. 도입단계에는 모험에의 의지, 멘토와의 만남, 문턱의 통과가 포함된다. 모험에 들어가서는 지원자과 안내자를 찾고, 시련에 직면하고, 유혹에 저항하고, 적에게 용감히 맞서고,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견디며, 극적인 시련에서 살아남고, 연금술을 얻는다. 마지막 단계는 귀환의 문턱을 통과, 부활, 축하, 봉사의 역할, 그리고 마침내 두 세계의 합병을 이야기한다. 캠벨은 국가나 세계질서가 번창하거나 신의 가치를 육화하는 영웅이 사회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천 얼굴을 가진 영웅은 신화적인 전통들 사이에 유사점을 보여주었다. 이후 캠벨은 세계 신화 사이의 큰 차이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다. 4권으로 구성된 신의 가면(원시 신화(1959), 동양 신화 (1962), 서양 신화(1964), 창조 신화(1968))은 여러 지역과 문화의 신화 사이의 구별을 분석했다.


캠벨은 1972년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은퇴했다. 그의 관심은 텍스트를 뛰어 넘어 신화적인 상상력의 다른 차원으로 갔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지혜는 세 방향에서 접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화적인 이야기는 의식적인 지식 이상으로 신비에 접근 할 수 있는 명확한 형태일 것이다. 다음의 길은 의식을 통해서이다. 의식 연습은 종종 주요 신화를 동반하고 참가자가 텍스트의 일부를 극적으로 다시 제정립함으로써 이야기의 개인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한다.  세 번째 방법은 이미지이다. 이것은 동상이나 종교적 모범을 묘사 한 그림과 같은 신성한 이미지 일 수 있다. 그것은 꿈이나 상상의 이미지 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화적인 이야기를 숙고하면 마음에 이미지가 생긴다. 이미지는 그 자체를 훨씬 뛰어 넘는다. 더 큰 내용은 이미지가 내포 한 비유(메타포)를 고려하여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캠벨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풍성한 그림책 The Mythic Image (1974)를 썼다.


 캠벨은 조지 루카스가 스타 워즈 (1977)의 시나리오를 통해 영웅이 천 얼굴로 요약 한 내용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영화 시리즈는 캠벨이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입문 모험을 다시 말해주는 것이었다. 루카스는 캠벨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를 멘토로 생각했다.


 80년대에 캠벨은 주요 신화 적시기를 조사하기 위해 출발 한 여러권의 World Atlas of World Mythology를 시작했다. 그는 문화 발전의 모델을 제시했다. 가장 초기 시대는 샤머니즘, 사냥꾼 수집가에 의해 나타난다. 이것이 상징적 사고의 시작이었다. 다음은 농경문화에서의 출생, 사망, 중생의 의식이다. 세 번째 단계는 여신, 영웅 및 성직자 명령에 대한 높은 문명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이 조명을 내부 상태로 직접 이해할 수 있는 현재 시대로 이어지는 무대다. 현대시대에는 4단계의 각각의 관점을 보여주는 문화를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캠벨의 지속적인 존경은 대중 연설자라는 역할 덕분이었다.  그는 생생한 스토리텔링과 논평을 통해 고대 가르침의 본질을 전달할 수 있었다.  뉴욕시에 있는 쿠퍼 유니온 (Cooper Union)에서 일련의 공개 강연이 매우 접근하기 쉬운 책인 '살아 남기위한 신화 (Myths to Live By)' (1972)가 되었다. 그는 미 국무부의 외무부에서 연례 세미나를 17년간 선보였다. 수십 년 동안 그는 캘리포니아주 빅 서(Big Sur)에 소재한 Esalen Institute에서 연례 워크샵을 개최했다. 그는 또한 C.G. Jung Institute, University of California Extension in Berkeley Pacifica Graduate Institute for Santa Barbara에서 자주 연설했다.


 천 얼굴을 가진 영웅은 창의적인 문학(문헌)에 기여한 공로로 National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 그는 세계 신화학의 역사적 지도제작과 문학적 업적 대한 영예로 National Arts Club 메달을 받았다. 이 행사에서 심리학자 인 제임스 힐먼 (James Hillman)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아닌, 우리의 프로이트가 아니라 토마스 만이 아니라 세상의 신화적인 감각과 영원한 인물을 우리의 일상 의식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말했다. 1987년 캠벨은 American Arts and Letters의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


 캠벨의 경력 중 가장 인상적인 공헌은 TV를 통해 이루어졌다. 빌 모이어스 (Bill Moyers)와의 6 부작 "신화의 힘" 시리즈였다.  인터뷰의 대부분은 캘리포니아 마린 카운티의 조지 루카스 (George Lucas)가 제작 한 영화 스튜디오 인 스카이 워커 랜치 (Skywalker Ranch)에서 진행되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대한 인터뷰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소년 캠벨이 아메리카 인디언 유물을 생각한 곳이었습니다.  공공 텔레비전 방송국은 1987년 하반기에 이 시리즈를 방송했다. 그 후로 많은 시간 재방송되었다. 인터뷰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 이 책(신화의 힘)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신화의 힘은 신화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지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1987년 캠벨은 호놀룰루의 집에서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날 ,뉴스위크의 사망 기사는 "캠벨은 대중 문화에 받아들여진 진지한 사상가, 미국인의 지식인 중에서 가장 희귀 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고 전달한다.


- 미국 스토리&심볼센터자료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중간에 해석이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이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박중서


: 출판기획가 및 번역가. 한국저작권센터(KCC)에서 근무했으며, ‘책에 대한 책시리즈를 기획했다.


- “넣자니 민망, 빼자니 섭섭한 그 '젓가락'”이란 제목의 박중서 칼럼 인용 / 프레시안 (2013. 7.26)


 


나는 아직도 어디 가서 '번역가'라는 호칭으로 소개되는 일에 익숙하지가 않다. 십중팔구 경력이 짧기 때문이겠지만 내가 정말 제대로 된 번역가인지, 아니면 번역가의 탈을 쓴 편집자의 탈을 쓴 독자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체계적인 과정이나 경로를 통해 택한 직업이 아니다 보니, 이 직업에 수반되는 관습들 역시 무심코 답습한 것들이다. '역자 후기'도 그랬다. 당연히 쓰는 것인 줄 알았고, 빠지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야 역자 후기는 일종의 '필요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쓴 '역자 후기'는 작품의 내용을 설명한 '해설'과 저자의 감회를 서술한 '후기'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역자 후기를 쓰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항상 의문이 들어 있었다. '내가 지금 너무 주제넘은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사실 한 권의 책에서 가장 주목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저자'이다. 그에 비해 번역가나 편집자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고 봐야 맞다.(한때 정보기관의 모토였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말은 사실 번역가와 편집자 모두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하지만 번역가나 편집자도 때로는 남의 상에 젓가락을 올리고 싶은 '욕심'이 들게 마련이다. 특히 번역가는 뭔가를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무척이나 많이 갖고 있다.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마치 저자인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런 만큼 자기가 아는 것을 최대한 많이 풀어놓고 싶어 하고,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이럴 때 가장 큰 유혹이 바로 '역주'이다. 인용과 암시와 말장난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의도를 독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정말 좋은 장치이다.


하지만 역주가 과도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는 수준을 벗어나서, 심지어 번역가의 이해를 독자에게 강요하게 된다. 역자 후기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해설 대신 엉뚱한 이야기, 또는 무의미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역자 후기도 의외로 많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번역을 하다 보면 작품과 번역가의 궁합이 항상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작품이나 작가에 관해 번역가가 잘 모르는 경우, 따로 공부를 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매우 피상적인 설명이나 감상밖에는 내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원래 역자 후기를 상당히 '튀게' 쓰는 편이다. <모뉴먼츠 맨>(로버트 에드셀 지음, 뜨인돌 펴냄) <지식의 역사>(찰스 밴 도렌 지음, 갈라파고스 펴냄)에서는 책의 주제에 관해 내 나름대로 조사하고 생각한 바를 상당히 길게 정리해서 일종의 보론으로 집어넣었다.(전자에 수록된 한국전쟁 당시 덕수궁의 비화는 나중에 TV 프로그램에서도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지음, 뜨인돌 펴냄) <남자가 된다는 것>(존 셰르카 엮음, 뜨인돌 펴냄) '용서' '유년기'에 관한 여러 저자의 글을 모은 것이어서, 나 역시 또 한 명의 저자로 자처하고 같은 주제로 한 편의 에세이를 써서 집어넣었다.


이런 역자 후기의 경우에는 종종 사적인 일화나 감상이 끼어들어갔기 때문에, 어쩌면 그 부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독자도 있었을지 모른다. 좋게 말해 '개성이 강한' 것이었고, 나쁘게 말해 '튀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그렇게 할 말이 많으면 왜 남의 책을 번역하느냐, 차라리 네가 한 권 쓰고 말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역자 후기를 최대한 짧고 차분하게 쓰려고, 심지어 가능하면 '안 쓰려고' 노력 중이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P7. 자기 자신을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구별하는 것-가령 , 아니야, ‘우리는 달라하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전체성에 대립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폭을 좁히고 우리 자신이 들어갈 감옥의 벽을 만든다.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원성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



 



P9. 그는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P9. 우리를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부과한 제한을 넘어 나아가도록, 그리고 각자의 길로 나아가도록 해 줄 수 있다.


 


P10. 그가 맨 처음 깊은 사랑을 느낀 대상이 아메리카 인디언, 즉 자연의 모든 부분을 성스럽게 여긴 사람들이었던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P11. ‘지금도각자를 위한 길이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일단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이전까지는 열리지 않았던,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열리지 않을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며, 심지어 어머니 대자연 역시 그 여정을 도울 것이다.


 


P11.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곤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맞는 말이다. 인생은 그냥 주어졌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인생은 억울하게도 나로 인해 왜곡되어 포장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P12.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P12. 조지프는 우리가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혹은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바로 여기있다. 바로 여기있다, 바로 여기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이라곤 의식의 전환뿐이다.


 


P13. “왜 저 나무들 아래를 거다 보며 항상 크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돋아나는 것일까?” 윌트 휘트먼은 묻는다. “생각건대 겨울과 여름 내내 그 나무들 위에 걸려 있던 생각들이 마침 내가 지나갈 때 과실처럼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P14. 스코클랜드 핀드혼 사람들은 그렇게 굳게 미었다. 나무의 의식이 제재소 너머까지도이어진다고, 즉 나무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만들어진 집은 물론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까지도 알고 있다고 말이다.


 


도입의 단계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의 첫 번째 단계 현세에서의 삶


 


P41.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선과 악. 이런 것이 대립자의 문제들이다.


 


P41. 이로부터 시작된 문제가 바로 이원성의 발견이었다. 그것은 바로 타락이었다.


 


P43. 두 사람은 하나님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했고, 그리하여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남자는 여자를 비난했고, 여자는 뱀을 비난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들 모두에게 훨씬 더 큰 저주를 내렸다. 남자의 처벌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그저 일하고 땀을 흘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반면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아야만 했고, 뱀은 남은 평생 배로 기어 다녀야만 했다.


 


P44. 결혼이란 자웅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배우자()을 찾는 다는 것은 그냥 자신을 찾는 다는 이야기군. 또 다른 나와 하나가 되어 완성된 로 살아가는 것이 결국 결혼


 


P45~46. 이렇듯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의 몸뚱이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즉 서로 분리되어 있는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마치 넙치처럼 한쪽 면만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의 다른 반쪽을 항상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맞았다. 결국 나의 운명의 상대는 정해져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들은 말이 있었다.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년이 그 년이다물론 결혼해서 두 사람이 그냥 산다면 어머니 말씀은 맞는 것이지만, 이제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확실히 다른, 나와 영혼이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P46. 배우자를 찾을 때, 만약 여러분의 직관이 훌륭한 경우, 적임자를 찾을 것이다. 만약 훌륭하지 못하다면, 계속해서 잘못된 사람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직관이 훌륭하지 못했던 것이네.


 


P47. 따라서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즉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에너지의 잠재성이 성취된 것이다. 그 에너지는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하며, 그것으로부터의 작용이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그 에너지의 꿈틀거림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으로부터의 작용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운명에 반응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직관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P48. 따라서 그녀가 구현하는 요인들이 여성적 존재의 모든 뛰어난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예시한다. 그녀는 의식의 발명품이 아니라, 무의식의 자발적인 산물인 것이다.


 


P49. 여러분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는 이성에 대한 반응으로 알 수 있다.


 


P50. 그 힘에 의해 가능한 행동이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남성에 의해 더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곧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다.


 


P50. 어떤 여성이 자기 안에 있는 힘을 자각하면, 그때부터 그녀는 남성을 본인에게 결여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의 한 예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 객체로서 보기 시작한다.


 


P50.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그 시작이다.


 


P51. ‘아모르는 오른쪽 길(승화시키는 영, 정신, 인간 공동체)도 아니요, 왼쪽 길(자연의 자연발생, 음경과 자궁의 상호 자극)도 아니며, 바로 앞에 있는 길,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메세.


 


P53.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


정말 멋진 문장이다. 나는 지금까지 삶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주변인 이었다. 변경연 연구원으로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삶의 중심으로 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것을 이끌어 준 힘은 사랑이라는 것인가? 난 또 생각한다. 운명이 맞다면 운명에 반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직관을 믿으면 안되는 것인가.


 


P54. 따라서 그 외의 다른 삶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전적인 투사에 대한 느낌, 타자의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느낌을 어떤 논리도 감히 억누르지 못한다.


 


P54. 영혼은 상처의 치유법을 알지만, 그 치유법은 아픔을 준다. 때로는 애초의 상처보다도 그것의 치유가 더 많은 아픔을 주지만, 만약 그걸 견딜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써 여러분은 보다 넓은 삶의 기반을 찾은 셈이기 때문이다. 전념한다는 것은 범위를 좁히는 것이며, 그런 전념이 실패로 끝나면 여러분은 보다 넓은 삶의 기반으로 물러나, 그걸 부여잡기 위한 힘을 얻는 것이다.


경험해본 바로는 실제 상처를 준 어떤 사건보다 그 전 혹은 그 후가 더 괴로웠었다. 실제로 그 사건에 도달하는 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 사건 이후에 찾아오는 괴로움과 자괴감, 상실감이 훨씬 더 컸다. ‘사건은 단지 일시적이며 과장해서 얘기하면 찰나에 불과했다.


 


P55.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여러분은 마치 어마어마한 실패인 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 준 사건들이었음을,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자면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죽음과 탄생(부활)의 연속이며, 삶은 이런 현상의 일련의 과정의 이라는 이야기이군. 맞는 말이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모든 사건들은 그 당시 문제였지만 결국 바로 해답을 찾아 살아왔었지. 지금 나도 해답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P55. 영혼의 어두운 밤이 지나야 곧이어 계시가 나타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온통 어둠인 것처럼 보일 때, 새로운 삶이, 하나같이 내가 필요로 하던 것들이 나타난다.


정말 신기하다.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어둠뿐인 나에게 이상하게 하나씩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을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P56. 신화학이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에서 인간 영혼의 경험, 행동, 성취에 관한 은유를 간직한 이미지들이 조합된 것이다.


 


P57. 노년은 어린이의 세대에 이미 내재된 것이다. 어린이의 노년은 일찌감치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여러분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아직 꼬마임을, 그리고 자신의 옛 경험이란 이제 겨우 시작된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P57.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


 


P58. 그녀는 여전히 똑 같은 사람, 여전히 똑 같은 강이다. 조이스가 서술한 대로 여러분은 어린 소녀 속에서 늙은 여인을, 늙은 여인 속에서 어린 소녀를 느낄 수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여러분이 나이 드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방식이다. 여러분이 내면에 갖고 있는 경험들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영화 송중기 주연의 늑대소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평생 한 소녀를 기다리는 늑대소년. 나이가 든 노년의 소녀가 다시 찾아간 그 공간에서 우연히 만나는 순간 노년의 소녀는 다시 어린 소녀가 되어 있었다.


 


P61. 19세기의 뛰어난 힌두 성자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어느 여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당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오?” 여인은 대답했다. “제 어린 조카 하나만큼은 사랑합니다.” 성자가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분은 바로 거기 계십니다. 당신은 거기 예배를 드리는 것이오.”


 


P61. 이것은 종교의 예배가 마땅히 도달해야만 하는 길이다. 예배가 단순히 율법과 명령의 계율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할 때 종교적 체험은 크게 저하되고, 여러분은 시키는 대로 기꺼이(또는 억지로) 행동하는 (또는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의 자발적 관계는 그것과는 다른 범주다.


 


P65~66. 결혼에는 순수한 열광과는 전혀 무관한 즐거운 경험들이 상당수 있다. 이런 경험들은 그 에너지 시스템을 이해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결혼 상태를 유지하게 해 주는 한편, 결혼이란 결국 둘 중 한 사람이 밖에 나가서 쓰레기통을 비워 오는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일상적인 잡무에서 문제를 겪게 되는데, 왜냐하면 가사의 문제는 여러분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바로 여러분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멋지고 작은 의식으로 바꿀 수 있고, 인생은 그런 크고 작은 행사들 위에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결혼을 깨는 요인인 것 같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사소한 집안 일 조차도 의식화한 것 같다. 재미를 불어넣고 함께 하려고 했다. 게임의 요소를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P67. 만약 여러분이 어떤 계획표에 따라 결혼생활을 하려 한다면,


여러분은 그 계획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깨달으리라.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함께 이끄는 것이며,


열려 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다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여러분은 이리저리 떠다니겠지만


지혜와 연민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P67. 여러분이 사랑이라고 불러 왔던 것이 실상은 욕정이었을 경우, 그것은 단순히 어떤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시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욕정이었던 것인가?;; 막상 욕정도 없는 상태라면 더욱 심각한 거였군. 시들다 못해 말라 비틀어졌으니


 


P68. 자녀가 떠남과 동시에 결딴나 버리는 결혼의 경우, 부모의 책임감은 자녀에 대한 것이지, 결코 서로에 대한 것은 아니다. 결국 자녀가 떠나고 나면 둘 사이의 유대도 사라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둘째누나와 매형이 너무 걱정된다.


 


P68~69. 여러분이 저지른 어떤 짓 때문에 책임을 지는 것은 그저 실패에 불과하다. 우리는 연애도 할 수 있고, 그 와중에서 일어나는 온갖 울고 짜고 하는 일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난 저지를 어떤 일 때문에 결국 실패를 하게 되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멈췄어야 했다. 결혼은 별개의 문제이지 않은가. 하지만 돌아가면 또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과 생각이 무엇인지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겠군.


 


P69. 여러분이 자신이 강박감에 사로잡힌 열성을 제어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면,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결혼에 부적격한 상태다.


 


P69.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즉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P70.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P70. 만약 결혼이 오히려 해독을 끼친다면, 여러분은 그 상황을 전환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만 한다. 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 여러분은 필요한 에너지를 상대방에게 가해 변화를 유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일종의 개인적 훈련을 통해, 사랑과 신뢰와 협동의 분위기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여러분의 삶이나, 심지어 여러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며, 그 상황이 변화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그렇게 헌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해 볼 것은 다 해봤다. 물론 상대방도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화도 내보고 회유도 해보고 여러가지 방법들을 제안해 보고, 실천도 해 보았다. 하지만 좁혀지지 않는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아니었다라는 것은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이 더 잘 알 것이다. 에너지를 써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P72. 여자는 삶의 샤크티’,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달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것이 그의 본래 모습이다. 남자가 무너지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물론 실생활에서나 성적인 면에서는 대등한 삶을 꾸릴지 몰라도, 결혼은 남성의 주도권이 무너지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P73.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P73.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P77.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행동이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P77.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P80. 여러분은 어머니로부터 여러분의 몸을 얻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사회에서의 역할을 얻는다.


 


P80~81. 아들은 아버지가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긍정적인 면으로나 부정적인 면으로나 아들의 모델이 된다. 어쩌면 여러분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삶의 방식에 염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로써 여러분은 이미 그것을 일종의 모델로 삼은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이 되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거기 없다면 여러분이 있는 가족 내에서 외부세계와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아버지의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싫었음에도, 나는 그것을 닮아 있다. 좋은 면도 닮아 있다. 결국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는 부정했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P82. 나 역시 별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벌려고 했지만, 결코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히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P83.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 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 일단 경제적인 부분은 생각하지 말자. 나는 내 육체와 영혼이 가자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니까 아무 걱정말자. 돈은 자연적으로 따라오겠지


 


P84. 돈이 있다는 것은 마치 차에 기름이 있는 것과도 유사해서 기름이 없었더라면 결코 갈 수 없을 장소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아직 기름은 있다. 경고등이 켜졌지만


 


P85. 돈을 잘못된 곳에 사용하는 일은 여러분의 삶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


 


P85. 여러분의 잘못된 경로 설정으로 인해 찬란히 꽃피운 문화가 졸지에 고갈된 문화로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다.


 


P85. 나는 75달러짜리 책을 펴낸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책갑이 비싸다고 하겠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식당에서 150달러짜리 저녁식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 먹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위쪽, 그러니까 여러분의 머릿속에 넣어야 할까? 아니면 아래쪽, 여러분의 뱃속에 넣어야 할까? 위쪽의 경우, 내가 여러분에게 준 그 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P86. 여러분이 단순히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면, 그런 열등감은 벗어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P89.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P89.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P90.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그 삶 자체가 어떤 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 겪어 온 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 밖의 일 뒤에 또 뜻 밖의 일이 뒤를 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구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에서 보았던 문장이다. 맞는 이야기다. 항상 혼란스러웠고 항상 갑작스러웠고 그런데 그렇게 또 살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줄거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의 인생도 똑같을지니너무 애써 소모하지 말자.


 


P97. 사실 여러분이 경험하는 삶도 바로 그런 식이다. 그 무엇도 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P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나는 지금 방랑의 시간을 겪고 있다. 도서관을 가야 기분이 좋아지고, 책을 읽고 글을 써야 즐겁다.


 


P99.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생각일 뿐이니까.


 


P100.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아직까지 이 생각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던, 있었던 일이던 이상하게 눈치가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반쯤?? 반에 반쯤 정도의 희열만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P100~101. 방랑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일종의 신비로울 정도의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뭇가지는 이쪽으로 자랄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자랄 수도 있으며, 그러고 나서는 또 다른 쪽으로 자랄 수도 있다. 나무를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104. 나는 내 삶이 언제 중심에서 멀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내 삶의 진정한 중심잡기로부터 나를 탈선시키는 어떤 업적이나 시스템과의 관계에 내가 과도하게 집착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언제 정도를 걷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 속에 가진 것 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지는 것들과 만사가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이다.


현 시점에서 경제적인 부분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사회적 의무와 남의 시선이라는 시스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겠구나


 


P105.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내가 살아있고 더 높은 가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 밥그릇을 누군가에게 구걸하지 않는 삶을 위해 정진하고 있음에 뿌듯함을 느낀다.


 


P107. 모든 삶은 그것을 실현하는 각각의 운반자에 매여 있으며, 운반자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운반자는 개별적인 운명과 목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 할 수 있다.” –


 


P111.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은 상태가 되며, 스스로 그렇게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떠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위험한 모험이니, 이는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관한 지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름이 끼친다. 나와 연결짓기를 해 보면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내 얘기다. 중심을 잃었고, 퇴사를 결심했고, 그걸 찾으러 가는 출발을 했고, 모험 안에 있다.


 


P112. 우리가 부름에 응답해 여정을 떠나지 않을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나는 부름에 응답했고 안전한 사회 속을 떠났다. 그렇다면 결과는 달라지겠지? 내 판단이 옳기를 기대할 뿐이다.


 


P113. 여러분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밤바다로 출항을 개시하는 셈이다. 그 와중에 부딪치는 바위며, 좁은 관문이며, 그와 유사한 것들, 다시 말해서 예와 아니오, 즉 대립자의 쌍을 나타내는 것들을 지나가야만 한다.


 


P114. 물론 그 무엇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마법의 도움이다. 영웅은 이곳에 이르러서 자신의 초인적인 여정 내내 자신을 도와준 자비로운 힘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그런 뒤에 여러분은 자신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만드는 마지막 경험에 도달한다. 이 경험은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 번째, ‘성스러운 결혼즉 여러분 자신의 영적 삶을 탄생시킨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두 번째, ‘아버지와의 화해. 여러분은 자신의 본성을, 즉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화해는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계획을 여러분이 떨어져 나온 삶의 방향에 맞게 조화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신격화’, 나는 만물을 있게 하는 존재다라는 깨달음이다. 영웅은 자기가 바로 그것, 즉 붓다의 이미지, 진리를 아는 자임을 알게 된다.


네 번째, ‘불사약 빼앗기로 자신이 차지한 물건을 최대한 빨리 빛의 세계로 가져와야 한다.


성스러운 결혼이라영적인 삶을 탄생시킨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운명이라는 것인가?


아버지가 나를 이해해 주시기 시작했다. 걱정이 대부분이겠지만 아버지는 내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시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와 화해를 한 상태라는 것이군. 만물에 신이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는 나의 보물을 다시 가져와야 하는 일만 남은 거로군


 


P116.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황무지로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성 없이 살아가는 곳으로.


이것이 나의 최종 목표라는 것이네. 행복한 삶을 설계해주는 디자이너!!


 


P117.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귀환함으로써 이 세계에 은혜를 베풀게 되었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가능한 반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가능성, “망할 것 같으니, 나는 다시 숲으로 들어가겠어.” 결국 여러분은 은둔해 버린다. 이것은 귀환의 거부다.


두 번째 가능성, “그들은 무엇을 원할까?” 여러분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영리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다. 여러분은 공무를 담당하게 되고, 보석을 포기하게 된다.


세 번째 가능성, 여러분이 되돌아온 그 영역 중에서, 여러분이 주려는 것을 최소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면을 일부나마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하다. 벽에 금 간 곳을 찾아낸 다음, 오로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여러분의 보석을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세번째 가능성을 추구하며 단 한명일 지라도 보석을 전달해 줘야지


 


P117. 이런 시도가 모두 실패한다면, 여러분은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얻어서, 여러분의 메시지를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기존의 사회속에 하나의 작은 발판이라도 마련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곧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118.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모험을 완결할 수 없다. 숲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고 돌아와야 할 때가 있는 것이며, 여러분은 그게 언제인지를 잘 알고 있다. 여러분은 용기가 있는가? 여러분이 숲에 들어갔다가 되돌아오려고 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다.


너무 신기한 건 캠벨의 영웅여정이 너무나 나의 삶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신화는 우리의 삶을 경험하게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P120. ‘마르가를 따라가서-여기서 마르가란 길, 즉 여러분이 겪은 인간 경험의 발자취를 말한다-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분노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P123.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든지 옛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P123~124. 스리 라마크리슈나 출가의 기초적인 3단계


첫 번째, 점진적 출가다. 이때 여러분은 시기가 다가옴을 알고 자신의 스승이나 성직자나 그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얻고 깊이 생각하며 갈 곳을 미리 준비해 두는 등등의 일을 한다.


두 번째, 갑작스러운 출가다.


세 번째, 원숭이의 출가라고 말한 것이다.


 


P128. 의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알려 준다. 식사전에 드리는 감사기도는 지금 먹게 될 음식이 한때는 살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준다.


 


P130.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씨앗으로서 죽어야만 새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P131. 여러분 또한 기꺼이 먹힐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도 음식 재료이기 때문이다.


나의 여정이 끝나고 귀환하고 나의 보석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그때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재료가 되어줘야 한다. 나로 인해 살수 있는 그런 재료로 말이다.


 


P132. 대부분의 사춘기와 입문제의에서 핵심적인 의례는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 바뀌게 되는 죽음과 부활의 의례다. 여러분은 과거의 이름을 지닌 채 죽었다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부활하는 것이다.


 


P133. 왜냐하면 여자에게 시련은 갑자기 덮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피할 방도는 전혀 없다. 소녀가 처음으로 월경을 하게 되면, 그 소녀는 그제야 여자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조카 한명이 월경을 시작했다. 누나와 매형 심지어 초등학생 동생이 모두 그녀에게 편지를 쓴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진짜 여자가 된 유민아 축하한다!’


 


P134. 남자는 이와 비견할 만한 경험을 전혀 갖지 못한다. 대부분의 남성 입문제의가 그토록 폭력적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P137.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데 있어서의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P138.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을 실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P139. 종말이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난다는 뜻이다.


 


P140.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죽기를 각오하라는 의미인가? 그 만큼 간절함을 가져야 된다는 의미인가? 죽음이 꼭 육체의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에 영적 죽음을 두려워 하면 안된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되는 건가?


 


P140. 가령 개 썰매 경주에서 우승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패배하는 것 역시 좋은 일이다.


결국 개와 나는 하나다. 죽음과 탄생이라는 순환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승은 나에게좋은 것이지만 경주, 즉 달리는 것은 어쩌면 개가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개가 하고 싶은 일을 바라보는 것 또한 역시 좋은 일이지 않은가?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개가 행복하냐다.


 


141. 천장의 전구가 모두 빛의 수레이듯,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의식의 수레이다. 하지만 전구에게는 빛의 질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의식의 질이 중요한다.


 


P142.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오비디우스


 


P145.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다시 찾게 되리라.


 


P149.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149.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러지 않다. 영원한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지금, 여러분 안에, 여기 있기 때문이다.


 


P150. 죽음에 대한 저항은 여러분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역설적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살아가고 실천하는 나만의 영적인 삶을 살았다면 다시 내안으로 들어간다는 즉 편안한 죽음과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로 간다는 것이군. 후회도 아쉬움도 없기에 즐겁게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P151. 여러분이 만약 누군가 죽어 가는 사람을 돌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조만간 신체에서 벗어나게 될 의식과 자기 스스로를 동일시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일생의 온갖 것들을 벗어 버리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를 의식과 동일시하고, 우리의 몸에서 벗어 나는 것이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 깨달음을 향한 길


 


P16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했다.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 관한 속된 관념-신에 대한 교리적 관념, 즉 여러분이 신에 관해서 배운 바-을 버리고, 신이란 은유로 표현되는 초월적인 것을 취한다는 의미다.


어제의 나를 죽이고, 오늘 다시 태어나는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제의 신도 죽이는 것이다. 어제의 신은 지금 나의 신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새로워 졌기에, 나의 신 역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P167. 내 멋진 친구이며, 내 마지막 구루였던 하인리히 침머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말의 범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차마 무엇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의심하는 존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직관적으로는 믿고 싶은 마음뿐이다.


 


P168.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인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P170. 물론 여기서의 교훈은 바로 우리 모두가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라는 것이다. 오른쪽 길, 즉 사회적 부문은 우리가 염소로서의 성격을 배양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신화-은유로 이해해야 적절할 듯한-는 여러분이 호랑이로서의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끔 인도해 줄 것이다.


 


P171. 여러분은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P175. 이것은 무의식과 자아의식의 관계이다. 자아의식은 무의식에 관해 알아야만 하며, 꿈은 의식하는 마음을 향해 무의식이 하는 이야기의 어휘다. 하지만 꿈에서나 환상에서나 주체와 객체는 똑같다.


개인적으로 나의 꿈은 거의 예지몽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몇 건은 실제로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우연이라는 의미인가? 단순히 꿈이 꿈에서 그쳤다. 이제는 꿈에 나의 의식을 투영해서 해석해 보도록 하겠다.


 


P177. 침머가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깨달음을 설명할 만한 단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 따라서 이에 관해 설파하는 사람이 듣기에는 그다지 마음이 편치 못한 다음과 같은 격언도 있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마지막 말이다.


사실 이런 깨달음이 있는 내포된 의미도 있겠지만, 사실 아는 체하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이 내뱉은 말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일단 인간적인 면에서 함께하기 싫은 것이 사실이다. 빈수레라 요란하듯


 


P182. 또한 그 작은 녀석들의 다리 역시 어떻게 해야 걸을 수 있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다. 훈련이나 실험은 필요하지도 않다. 그 작은 다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작은 눈은 지금 자기들 앞에 보이는 곳이 자기들이 가야 할 곳임을 이미 알고 있다. 전체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그 작은 탱크부대 전체가 서투르게나마, 그래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바다로 향하는 것이다.


각자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본능은 언제부터 일지 모를 과거의 그 시점부터 이어져온 경험의 축적이며, 그것이 나를 움직이고 생각하게 하는 매커니즘이겠군그래, 나의 조상들 역시 신화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P186. 그렇게 분석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여러분은 이제 자연처럼 살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는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통제력, 더 많은 유연성을 지닌 상태다.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지금에서야 이해하고 있다. 그나마 지금에서 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다. 자연을 닮고 싶고, 자연이 되고 싶다. 구 선생님이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신 의미 너머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꽃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 꽃을 보면 인생이 보이고, 사람이 보인다. 그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건방지게 생각해 본다.


 


P191. 행동하는 인간은 완벽을 표상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항상 이원성에서도 유독 한 측면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행동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럽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나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P192. 가령 여러분은 공동선을 받아들이고, 거기 집중하는 것을 여러분의 방향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편이 아닌 어느 한편에 대한 결정이긴 마찬가지다. 따라서 여러분은 차라리 불완전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감수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겸손한 선택을 하라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까?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은 선택이다. 이렇게 살기로 하고 저렇게 살기로 하고. 그렇지만 내 선택을 존중하는 만큼 상대의 선택도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는 미덕 즉 겸손함을 잃지 말라는 것으로 나름 해석해 보고 싶다.


 


P192. 여러분이 환생을 거듭하는 한,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불완전에 대해 충실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낸 다음, 여러분의 길을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이원성에서 여러분의 자리에 충실함으로써 여러분은 역사의 수수께끼를 계속해서 알리는 것이다.


 


P196. 이것이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제기한 요점이다.


그리하여 니체에 따르자면, 덕을 지닌 사자라면 양을 갈가리 찢어 먹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녀석은 나쁜 사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양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기를 잡아먹는 사자가 오히려 나쁜 사자일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노예의 도덕에서 찾을 수 있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탁월함을 지닌 사람들-즉 명인인 사람들-이 도리어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상 그렇다.


정확히 따지고 보면 자기 모습 그대로로 그리고 그 역할에 충실한 것만이 덕이고 그것이 선이라는 것이로군.


 


P199. 심리학이란 해석의 수단, 즉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해석하기 위한 방법이다. / 신은 반드시 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이 저 바깥에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석에만 그친다면 진짜 신을 모르지 않을까? 왜냐면 단지 신을 제단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과학적, 학문적 기준에 의해 신을 끼워 맞추는 것은 진정한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은 느끼는 것이기에.


 


P201.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가지의 한계도 똑같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순히 심리적 기능 또는 요인으로 환언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까지만 가고 더 이상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역시 결국 이런 답을 주시는 구만.


 


P201. 누군가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한 오로지 남성 인격화만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제한된 어휘가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P207. 우리의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뿌리는 우리의 인간성 속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족보에 있는 것이 아니다.


 


P208.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이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P209. 만약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의 전통에 집착하여 여러분 혼자만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제거한 셈이 된다.


 


P210. 유대교의 경우는 전도의 열망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다른 세가지-이슬람교, 기독교, 공산주의-는 전도를 지상과제로 삼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 각각은 완벽한 세계 정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쇼가 아닐 수 없다. 이 세계를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P211.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삶. 자연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이 목표.


 


P212. 여러분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그 소멸에 대해서도 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P215.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P216. 만약 지옥이 황무지라면, 연옥은 여러분이 고통의 장소를 떠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여전히 고통 중에 있지만, 가능한 깨달음을 탐색하는 중이기도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절망이란 없다. 성스러운 공간 또는 도치처를 갖게 되려면, 우선 여러분은 어떤 작은 행동의 땅, 또는 그럴 만한 장소를 찾아야만 한다.


내가 있는 곳이 신이 있는 곳이고, 내 자리는 성소가 된다. 내 안에 신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하나하나에 모든 의미와 역사, 영혼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P217. 당신은 잘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에게 불리한 어떤 것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력이 없고, 그로 인해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톨릭 국가에서 개신교 신자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개신교 국가에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죠. 당신이 오로지 흑인 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만 흑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직 인간이 되지는 못한 셈이죠.”


 


P218. 다시 말해 그는 이제껏 자기만의 지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라고 스스로 설정한 것 너머를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P218.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악의?무지?오만?사랑?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P222.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것이다.


 


P230. 상징이 도대체 여러분에게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명령으로서 거기 있을 뿐이며,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더 많이 지속될 것이다. 이 복잡한 분야에서 여러분이 자신의 정신을 사용할 수 없다면, 나로선 여러분이 과연 어떻게 그걸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P230.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P231. 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들은 무수히 많다. 여러분의 신을 선택하라. 여러분이 숭배하는 신이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P234. 거기서 의미하는 바는 남들이 여러분에게 행한 어떤 일들의 관점에서 여러분의 운명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239. 그는 천국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바로 내부로 말이다. 그의 승천은 내부로 향한, 신화적 여정을 표상한다. 그리고 처녀수태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적 삶의 탄생을 지칭한다.


천국이라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영적인 영역으로 승천했다는 것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인데, 계속 올라가면 결국 우주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있는 그대를 해석하면 하느님은 외계의 어느 행성에 살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우주선을 타고 갔다고 밖에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 지금은 믿는다.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우리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P240.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신들이 저 바깥에서 활동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P241. 우리는 우리 내부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 상징은 또한 하느님이 이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P242. 따라서 십자가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들이 우리에게로 내려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통(십자가를 놓음)인 것이다.


 


P243.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


 


P245. 달이 어두운 그림자를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삶이 죽음의 그늘을 벗어 던지는 것처럼, 부활절이 진정한 부활절이 되고, 유월절이 진정한 유월절이 되기 위해서는 심지어 그러한 축제들이 비롯된 전통 그 자체로부터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


 


P247.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부활절과 유월절은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언가를 놓아 버려야 함을 상기시킨다.


 


P247. 이 새로운 삶은 아주 뚜렷이 규정되지는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 즉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여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과거를 놓아 버려야만 한다.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실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시대적인 종교에 대해 거듭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의 질서에 대해 태어난다는 것이다.


 


P249.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나이까? 하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P258.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P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P259.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한다. 재미가 없으면 놓아야 한다. 내가 그렇다.


 


P259. 내 생각에 성스러운 공간을 고안하는 좋은 방법은 그것을 놀이터로 삼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마치 놀이 같다면, 여러분은 거기 열중하게 된다.


 


P260.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나만의 컨텐츠가 바로 이것이다. 재미와 즐거움이 없는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 활용해 봐야지


 


P260.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긴장, 정직의 결어, 그리고 비현실적 감각은 여러분 삶의 잘못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


 


P262.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놀이이고 신화고


 


P262.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이처럼 의무를 벗어던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상관이 없다. 휴식이 곧 놀이인 것이다.


어떻게 휴식을 취하게 하는 지, 휴식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세상이 놀이터라는 것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는지 공부해보자.


 


P263. 여러분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그런 봉인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또는 한 시간에 한 번씩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여러분이 장차 내적 삶을 지니려 한다면 그것은 절대 필수인 셈이다.


 


P265. 성스러움이란 주위의 대상과의 은유적 관련성이다.


 


P271.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여러분은 과연 어디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너머, 즉 여러분이 자신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일별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비롯되는 원천의 장이다.


이 문장 하나에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아직 개인적인 해석을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 문장에서 의미를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P272. 삶의 목표란 뭔가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탈것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눈을 저 높이에, 즉 대립자의 쌍들 사이에 고정시키고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놀이를 바라보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 조이스의 말마따나, 세상의 쓰레기 속에서도 광휘를 발하는채로 남아 있으라.


 


P273. 동양에서는 그런 존재 너머에 있는 것, 즉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그러나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한 어떤 존재, 의식 그리고 기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예배함에 있어서 궁극적 목표는 그 귀의자에게 심리학적 변모를 일으키는 것이다.


 


P278. 붓다는 이러한 죽음의 심리학적 측면을 유난히 강조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여러분은 행동 상으로는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지만, 자기 행동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행동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또한 행동의 결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여러분의 삶의 사건들로부터 비롯되는 이런 열정으로부터의 심리학적 해방이 곧 니르바나.


 


P285.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은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의 주위를 밀폐 봉인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니르바나를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P286. 니체는 우리가 반드시 자기 힘의 4분의3만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판별이다.


뭐든지 너무 힘을 주지 말라는 의미겠지? 사실 너무 힘을 주면 긴장하게 되고 그 긴장은 실수를 부른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너무 힘을 주면 결과가 좋지 않다. 오히려 힘을 빼고 그 순간에 집중하는 선수가 결국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P287.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계속 넘어지다가 일단 타는 법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넘어지려고 해도 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P287. 즉 스스로를 이 모든 형태들로 만들어 내는 그 하나의 에너지다. 스스로를 그 하나의 에너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여러분은 동시에 스스로를 오고 가는 그 형태들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결국 그 에너지라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에너지가 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물아일체?


 


P290.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P294. 여러분은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우선 말함으로써, “이것은 그것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여러분을 이전과 다른 의식의 층위로 몰아간다. ‘그것이 아닌것이야말로 여러분이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P297.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 즉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바의 의미는 여러분의 합리 체계를 떠나, 항상 만물 사이로 움직여 나가는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리라.


 


P298.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P298.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P299. 심리학적 변화란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견뎌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P300.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P300. 여기서의 핵심 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여러분이 돌아온 마을은 바로 여러분이 떠난 마을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 여정은 아직 완수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이라고 간주한 장소로 돌아오는 것이고, 똑 같은 직업으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반드시 똑 같은 위치로 돌아와야 할 필요는 없다.


 


P301. 만약 여러분이 사회적 의무를 수행한다면, 그것은 결코 여러분의행위가 아니다. 다만 사회가 그런 의무를 부과했을 뿐이며, 여러분을 스스로의 삶에서 차단시킨 것이다.


 


P302.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대한 강제적 참여에 붙들려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상대성의 문제다. 여러분이 한 위치에서 또 다른 위치로 옮겨감에 따라 모든 판단도 변하게 마련이다.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어느 편을 드는가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겠지?


 


P312~313. 그런 의미에서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힘은 사실상 여성의 힘이 특화된 상태, 다시 말해 그 힘이 응용된 상태인 것이다.


 


P314. 또한 힌두교에서는 태양이 여성이고 달이 남성이다. 달은 태양 속에서 태어나며 태양 속에서 죽으며, 매달 태양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P319. 남성의 주된 기능은 그 안에서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있는 환경적 상황을 수립하는 것이며, 또한 여성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 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전체다. 남성은 보호하는 인자이며, 여성의 힘의 대행자이다.


 


P320. 슈펭글러는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 자체인 곳 안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을 낳는 것도 여성. 그렇기에 역사가 곧 여성이고, 여성이 곧 역사라는 의미이군. 그래 사실 남자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여자 없이는 못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P322. 신화의 그림 언어에서 여성은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전체성을 표상한다. 영웅은 그것을 결국 알게 된 자이다.


 


P322. 그 여성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웅, 즉 지나친 동요를 지닌 것이 아니라 그녀가 요구하는 친절과 확신을 지닌 영웅은 장차 왕, 육화된 신, 그 여성이 창조한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326. 여성의 여행은 없습니까? / 이 세상의 손자소녀에 대하여 할머니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다. 성숙한 그리고 삶을 육성하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역할에 서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삶을 산출하며, 그러고 나서 말년의 단계에 가서는 삶을 육성하고 삶을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말년에 접어든 남자는 말년에 접어든 여자에 비해 훨씬 내향적이다.


 


P334. 남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P336. 하지만 일본인 커플이 식당에 오는 것을 보면, 누가 계산을 하는지 아는가? 바로 여성이다. 여성이 돈을 갖고 있는 것이다.


 


P339. 우리 모두의 존재 기반이기도 한 보편적 공통성에 대한 포용성이 바로 공감이다. 자발적 감정을 인식하고, 포용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


 


의식의 세 번째 단계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P348. 예술의 첫 번째 기능은 내가 일찍이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이라고 명명한 것과 정확히 똑같다. 즉 경험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동산 문의 수문장들-욕망과 두려움-을 지나쳐 그 안에 위치한 깨달은 삶의 나무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P349. 예를 들어서 연필, 재떨이 또는 다른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양손에 들어 올린 다음, 그것을 한동안 주시해 보라. 그 용도와 이름은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주시하면서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라. “이게 무엇일까?” 그 용도에서 떨어져 나오고, 그 명명에서 벗어나면, 곧이어 경이의 차원이 열린다. 왜냐하면 그 물건의 존재에 관한 신비는 곧 우주의 존재에 관한 신비와 똑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여러분 자신의 신비와도 똑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눈 앞의 음료수 캔이 보인다. 이것 역시 신비롭지 않은가? 이 캔 역시 우주이며, 이 녀석 역시 죽음과 탄생(재활용)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P350. 하지만 우리의 삶에 따라서 우리는 어느 한 순간 존재감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가치평가되지 않은, 방해받지 않은 시적 삶의 순간이다. 즉 생각과 감정 양자 모두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코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명제에 의해 소통될 수가 없고, 단지 예술에 의해 암시되기만 할 뿐이다.


 


P358.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 물론 여기서는 두 가지 자연이 모두 관계된다. 하나는 자연,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의도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 조화는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뭔가와 공명하고, 여러분을 심미적으로 심취시키고, 여러분은 그렇게 큰 아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 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 같은 광휘-가 환희 비치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할 지 아직 모르지만, 나름 방향은 잡아놓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술가가 되어 예술을 해야 한다. 흔히 생각하는 문화적 예술이 아닌, 내 일 자체가 예술, 즉 자연을 닮도록 설계를 해 보도록 하자


 


P370.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P372.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바 연습을 하는 과정에는 심미적인 것이라곤 전무하다. 춤을 추기 시작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규칙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와중에 작품을 고안한다. 하지만 마침내 규칙이 녹아 없어지고 자연스러운 충동이 주가 된다.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의 경지는 물아일체의 경지라는 얘기지만, 그 기반은 끊임없는 기본기의 익힘. 그것의 습관이 무의식 중에도 표출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이야기군. 잠을 자고 있는 아이돌을 깨워 어느 한 부분의 노래를 들려주면 안무에 바로 몰입하는 장면이 갑자기 떠오른다.


 


P373. 여러분이 아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단순히 자신의 지식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여러분은 그것을 움직임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예술에서는 이것이 전부다. 학생은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기술과 법칙을 배우는 것이며, 이것이 그가 반드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그 모두에 통달한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P374.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


 


P374.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예술로서의 예술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 치료요법은 한 사람을 인간적이게 만들고, ‘예술로서의 예술은 그 사람을 인간성을 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데려간다.


 


P375. 치료요법에서 여러분은 그저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을 그 궤도 위로 다시 돌려놓으려 노력하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한 치료요법의 실시는 그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놓는, 그를 조화로운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조화로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술은 자연과 평행한 조화다.”


내가 자연과 조화롭고 자연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내가 하는 일 모두가 치유를 넘어선 그 사람다운 사람으로 돌려 놓는 일이 되겠구나.


 


P378. 춤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공연이나 전시와 같은 방식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마치 새의 울음소리처럼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 오로지 신체가 그런 범위까지만 춤을 추는 것이 좋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변화로부터 삶이 도출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이 필요로 하고 기뻐하는 행동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런 변화는 여러분이 하고 있는 다른 일들 속으로도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P382.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P382.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여러분의 작업-즉 여러분의 예술-과 여러분의 직업이 서로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P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비판을 생각할 겨를이 아직은 없다. 문장과 문장을 매끄러운 논리로 이어지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P385.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된다.


대상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 보았다. 마치 내가 대중지에 기고하는 칼럼리스트라는 생각으로 작성해 보려 한다.


 


P387.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일을 비판의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 1인치도 더 움직일 필요가 없다. 기억하라. 붓다의 세 번째 시험은 바로 다르마즉 의무이며, 남들이 여러분에게 하라고 기대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것은 검열에 대한 두려움이다.


 


P387.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서 객관적인 태도를 지닌다. 어떤 면에서 여러분은 이제 작가라기보다는 독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예는 뭔가를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의 일부다.


 


P389. 그런 다음에는 여러분이 보석을 갖고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 보석을 원치 않는 경험이 생긴다. 이른바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마라는 종류의 일이니, 혹시나 사람들이 여러분을 적대시할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대개는 기다리는 군중이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귀환이후 세번째 가능성을 추진하겠다. 절대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겠다.


 


P390.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생명이 없는 사물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물건을 던진다거나 하찮게 생각하는 것은 삼가하고 있다.


 


P404. 경이로운 사실은 깊은 창조의 중심을 어루만지고 거기에 영감을 제공하는 특유의 효력이 가장 하찮은 어린이 동화 속에서 들어 있다는 것이다.


 


P406. 병아리가 벗어던지는 알 껍질은 마치 뱀이 벗어던지는 허물이라든지, 또는 다시 태어난 달에 의해 벗어던져진 달의 그늘과도 비슷하다.


 


P410. 삼위일체의 상징적 관념을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은 바로 다음과 같은 탄트라의 속담이다.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라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신이 주의를 집중하려는 신들에 상응하는 의식의 층위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P410. 어느 꽃도 다른 꽃의 원인은 아니지만, 함께 모여 있음으로 해서 모두가 꽃다발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조화고 결국 너가 나고 내가 너인 관계인 것인가?


 


P411. 겉으로는 따로따로인 듯 보이는 사물들도 근본적으로 하나에 불과하다.


 


P413. 모든 사회는 악하고, 슬픔이 가득하고, 불공평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으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되는 즐거운 슬픔과 서러운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P413.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P419.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세상의 짝이다.


 


P419. 영은 자연의 꽃다발이다.


 


P420.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신화는 일종의 시다.


시 처럼 사는 삶은 신화에서 파생된 개념이겠구나


 


P423. 그 드러나게 한 자()는 지금 이 육신 안에, 손톱에서 머리끝까지 들어와 있도다. 그것은 마치 칼집 안에서 보이지 않게 들어 있는 것과 같고, 세상을 먹는 자 아그니()가 장작 속에 보이지 않게 들어 있는 것과 같으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든 것을 보지 못한다. 그는 틀에 맞추어진 자가 아니다. 숨을 쉬므로 ’, 말을 한다 해서 목소리라 부른다. 보기 때문에 이라고 하고, 듣기 때문에 ’, 그리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라 부른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하는 일에 따라 그를 부른 이름이다.


신은 정말 어디나 있는 것 같다. 내 스스로가 그런 마음이 생겼기에 생명이 없는 피조물에서도 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P425. 이제는 더 이상 경계라는 것이 없게 되었다. 경계가 사라짐으로 인해 우리는 충돌을, 끔찍한 충돌을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일 뿐만 아니라, 신화들 사이의 충돌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 역시 각자의 업무영역에서 신화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무실의 파티션을 없앤다면? 더 큰 시너지가 발생하지 않을까?


 


P426. 신화는, 또는 달리 말해서, 신화와 종교는 위대한 시이며, 그와 같이 인식할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물과 사건을 관통해서 서로 완전하며 전체인 어떤 존재또는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이런 기능에 있어서 모든 신화, 모든 위대한 시,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은 합치한다.


 


P426.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경계없이) 하나가 되어-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


 이 책은 다이앤 K 오스본이 조지프 캠벨의 강연과 그의 저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엮음 선집이다. 이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목차는 상당히 잘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가지 사항을 보완하고 싶다. 첫 째는 도입의 단계의 제목과 위치의 변경이다. 도입의 단계에서 엮은 내용은 말하자면 조지프 캠벨의 엑기스다. 그의 이론을 짜고 짜서 나온 핵심이라는 의미다. 그렇기에 도입부 보다는 마지막으로 배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3가지 의식 목차 아래 세부적인 주제로 엮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3가지로 분류를 하다보니 각 장마다의 느낌은 산만함’, ‘왔다갔다였다. 비슷한 내용을 묶는 그룹핑이 된다면 더 좋은 구성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완점


역시나 큰 카테고리 內 테마를 설정하여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세의 이야기가 다소 결혼, 사랑, 연애에 치중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대지)가 낳은 자녀라면서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물론 개인별로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그 분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


역시나 용어해설이다. 책의 마지막에 용어의 리스트는 나오지만 다소 생소한 의미의 용어는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


 


용어 및 생소한 문장에 대한 각주를 붙인 것이다. 궁금한 내용은 언제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에 언급된 용어의 리스트업이다. 물론 용서설명까지 된다면 좋겠지만, 언제든지 찾아 볼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이 장점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눈으로


 내가 저자라면(엮은이), 조지프 캠벨의 어느 강연인지, 언제한 강연이지를 추가적으로 기재해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도록 하겠다. 더불어 일방적인 전달식 내용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컨퍼런스, 세미나 등에서 강연한 내용이었으며, 특히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기자 혹은 참가자, 혹은 함께 참여한 패널과의 대화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신화의 힘과 처럼) 그렇기에 각 장의 마지막 절에는 대화를 통해 얻은 결론이나, 혹은 참가자들의 후기 또는 느낌을 삽입한다면 더 풍성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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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9 15:33:21 *.124.22.184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여러분은 과연 어디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너머, 즉 여러분이 자신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일별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비롯되는 원천의 장이다.

 

지난 번 신화의 힘을 읽고 들었던 수많은 생각때문에 그런건가보다. 바쁜 일정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해.

난 그저 읽고 발췌하고 그때 든 생각 적고(주로 딴지걸기). 그다음. 이러고 있는데. 그래서 사실 뭘 읽었는지 잘 모르겠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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