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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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연구원 사람들과 같이 있었다. 한
연구원 선배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리고는 내가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하고 나서 내가 한 대답이 내가 생각해도 흡족했나 보다. 나는 꿈에서 설핏 깨려고 할 때 즈음 그것을
기록에 남겨두려고 핸드폰으로 메모를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메모가 잘 되지 않았다.
선배 : 왜 (연구원
또는 삶의) 과정이 어렵다고 생각하는지요?
나 : 우선 인간 자체가 어려운 동물.. 이기.. 때무ㄴ이ㅂ니다.. 그ㄹㅐㅅㅗ..
기억이 날아가는
것이 두려워 자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지만 글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럴수록 더욱 답답해했다. 함께 있던 애인은 핸드폰 좀 그만 보고 함께 어디론가 놀러나 가자고 자꾸 재촉이다. 꿈의 기억이 이렇게나 명료하고 분명한데 그 조각을 줍지를 못하는 것이 이렇게나 아쉽다니. 모래 사장에 적어 둔 글이 파도의 하얀 포말에 조금씩 지워지는 것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니. 친척의 계략에 빠져 궤에 갇힌 오시리스의 마음도 이렇게 갑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오른손 손바닥으로 이마를 세차게 때렸다.
‘따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 소리와 함께 나는 진짜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꿈 속에서 꿈을 꾸었던 것이다. 꿈 속에서 꾸었던 꿈을 깨기 위해 나는 이마를 손으로 세차게 때리는
꿈을 꾸었고, 현실의 나의 몸이 이에 반응하여 진짜 이마를 손으로 세차게 때린 것이었다. 황당함에 앞서 나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꿈에서 꾸었던 꿈의
조각을 잡아내고 싶었다. 꿈은 나의 무의식으로 채워진 바다다. 그
꿈 속에서 나온 말들, 내가 했건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했건, 그
모든 말들은 나의 무의식이라는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이고, 이 물고기들은 그 크기가 크건
작건 나의 무의식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하물며 꿈 속에서 꾸었던 꿈의 조각은 나의 무의식 속 무의식이라는
심해에서 헤엄치던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 물고기를 통해 나는 내 안에 있는 심해를 상상해보려 한다.
선배 : 왜 (삶 또는 연구원의) 과정이
어렵다고 생각하는지요?
나 : 우선 인간 자체가 어려운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죠.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 역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과정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점점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가 질문한
‘과정’의 정확한 의미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삶 자체의 과정’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고, ‘연구원 과정’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했던 대답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잠의 신 호프노스에게는 꿈의 신인 모르페우스가 있다고 한다. 모르페우스는 꿈의 형태로
어떠한 사람이든 그 사람의 말투와 몸짓을 흉내 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들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젯밤 모르페우스가 나를 찾아왔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꿈은 금방 흩어지고 만다. 그 꿈을 해석하는
것 역시 의식이라는 나의 제한 된 사고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꿈을 꾼다는 것은
무의식의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 그 바다 속을 유영하는 것은 바다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것만으로도
삶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한 번 꿈에서 걷어 올린 물고기 한 마리가 되어 무의식의
바다 속을 헤엄쳐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