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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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 신용카드 내역서를 오래간만에게 꼼꼼히 살펴보다가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세계적인 글로벌기업에서 벌써 몇 달 째 카드 값을 빼 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흥분 했었던 일이 있었다. 모두가 알 만한 기업이 이렇게 부도덕한 짓을 해도 되냐고 혼자서 흥분하면서 소비자보호원부터 공정관리위원회, 방송사들의 시사 프로그램까지 어디에 고발을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 카드 값이 왜 빠져나가고 있는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몇 달 전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사 주면서 그때 할부로 계산했던 것이 아직까지도 지급이 다 끝나지 않아서 할부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내 피 같은 돈이 새고 있다는 사실에 이불 속에서 공중으로 미친듯이 발길질을 해 대며 속 쓰려 했다. 몇 시간을 허공에 발길질을 해 댄 끝에 내가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은 내 돈이 허비 되어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아직 다 치러지지 않은 이별의 감정에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상처가 다 아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냥 덮어져 있었을 뿐 것이 다시 생채기가 난 것에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이래저래 억울한 마음은 그 당시 상영했던 영화 제목을 내 스스로 패러디하여 ‘사랑도 할부가 되나요?’ 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난 카드 할부 값과 함께 아직 남아 있었던 ‘이별의 앙금’을 몇 달에 걸쳐 다 치루고 나서야 그 일에서 벗어났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몇 년 있다가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란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우선 제목에 쓰여 있던 ‘후불제’란 말이 눈에 들어왔다. 후불제란 어떤 면에서 보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직 제 가격을 치루지 않았다는 뜻을 것이다. 제 가격을 치루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내 것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아 민주주의가 후불제라니 무슨 말일까?’란 호기심에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유시민 작가는 이 책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부의 힘으로부터 얻어서 그 대가를 나중에서야 후불로 치루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정직한 대가를 치러야 만 누릴 수 있는 것인데, 한국 사회에는 그것이 이미 제도와 법 규정의 형식으로 먼저 주어졌기에 비용과 대가를 할부로 치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오래 전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위해 누군가 흘린 피와 땀을 대가로 오늘날 우리가 현재의 '문명적'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오래 전 로마의 노예들을 위해 싸운 스파르타쿠스에서부터, 프랑스 혁명의 전사들, 1980년 광주의 시민들까지……. 이들이 전해준 것은 위대한 선물이지만 공짜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구현, 헌법 이념의 구현을 위한 노력은 우리가 반드시 치러야 할 비용이며, 우리가 치르는 비용만큼 또 우리 사회와 인류 공동체가 누리게 되리라는 주장이다.
2010년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참 기발한 생각이란 마음과 함께 그 당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색다른 접근이자 성찰이란 감탄을 했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조금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정말 앞으로 더 시간이 걸리고 그 대가를 어떤 식으로든 치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었다.
그러고 나서 7년이 지난 2016년 겨울, 광화문을 가득 매운 촛불 행진을 보면서 그때 읽었던 책 속의 ‘후불제 민주주의’란 말이 다시금 생각이 났다. 잠시 지급을 보류해 놓았던 민주주의의 대한 대가를 우리는 지난 겨울 그렇게 열심히 치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해 보았다. 지난 10여년 간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란 의미를 다시금 되 새기게 되었고, 시민들이 헌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헌법 전문에 새겨진 글귀 하나 하나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비로소 새롭게 느끼게 된 것이다.
시민 하나 하나가 정치가 우리 삶을 어떻게 결정 짓는 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되었고 그 결과로 투표를 통해서 본인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조금씩 제 가격을 치루면서 민주주의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후불제, 할부란 아직 제 가격을 치루지 않았다는 뜻을 것이다. 사랑이 그리고 민주주의가 내 손안에 있는 것 같지만 제 가격을 치루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내 것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제 가격을 치뤄야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어만 다를 뿐 언제나 만고의 진리였다.
인생을 살면서 가끔은 손 쉽게 일이 해결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얻어진 것일까? 그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우연이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모두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다. 혹시 지금 쉽게 얻어진 것 같은 일이 있는가? 그럼 조심하시라 곧 명세서가 날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