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후회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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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의 꿈
11기 정승훈
때는 조선시대, 한 선비가 방에 앉아 있다. 한 낮의 햇빛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방안 가득하다. 선비의 앞엔 서안이 있고 그 위엔 서책이 펼쳐져 있다. 옆에는 문방사우가 놓여있다. 머리에 상투를 튼 것으로 보아 혼례를 치른 선비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가 보다. 과거 급제의 평균 연령이 35세인데 주름도 없고 앳된 모습이 언뜻 언뜻 보이는 걸 보니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인다. 서책에 집중을 못하고 엉덩이가 연신 들썩인다. 하긴 젊은 혈기에 앉아서 책만 보려니 오죽할까. 아니면 다른 연유라도 있는 걸까.
선비의 뒤로는 책가도(冊架圖) 10폭 병풍이 보인다. 책가도는 문치를 강조한 정조 임금이 화원을 시켜 중국의 다보각경(多寶各景)이나 다보격경(多寶格景)을 본떠서 조선에 걸맞은 형식을 만든 것이 시초다. 정조 임금이 용상 뒤에 걸어 더욱 널리 퍼졌다는 책가도는 선비의 성적향상과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선비의 어머니가 마련해준 것이다. 선비는 서책보다 책가도의 그림을 더 좋아하는 지 연신 뒤를 돌아본다.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풍이 선비를 매료시킨다. 방에 앉으면 서책을 보는 시간보다 책가도를 보는 시간이 더 많다. 서책 옆 화선지 맨 위에는 서책을 필사한 종이가 있다. 하지만 그 밑엔 책가도를 모사한 화선지가 수북하다. 맨 위의 종이는 위장용이다. 선비는 서책의 글보다 책가도의 그림이 더 좋다. 하지만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집안에서 그림이란 안 될 말이다.
19세기 화원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책가도에 있는 것들은 선비가 본 적 없는 물건들이다. 향로와 화병, 도자기의 색도 모양도 이국적이다. 책가도를 보고 있으면 조선이 아닌 타국에 있는 기분마저 든다. 진짜 책장이 있는 것 같아 손을 뻗어 보게 된다. 자신의 문방사우도 거기에 올리고 싶어진다. 임금마저 매료시킨 그림이라고 하니 선비는 더욱 마음을 뺏긴다. 혼례를 치른 부인보다 더 좋은 듯 내실로 들지 않고 이 방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늘어간다. 선비의 마음을 모르는 부모님은 과거 공부에 매진하는 아들이 혼례를 치르더니 철이 들었다며 연신 흐뭇해한다. 선비는 그림을 모사하며 책가도가 온 그 곳으로 언젠가 꼭 가보리라 마음먹는다.
선비의 손은 연신 그림을 모사하고 있다.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이크. 들킬세라 얼른 돌아앉아 서책으로 눈을 돌린다. 재빨리 서책을 필사한 화선지를 위에 올려놓는다.
선비는 과연 그림을 맘껏 그릴 수 있을까? 선비는 책가도가 온 그 곳에 갔을까?
선비는 그 해 과거시험을 보는 대신 도화서 시험을 봤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화서에 들어가 책가도 기법이 뛰어난 단원 김홍도의 제자로 직접 가르침을 받는 중이다. 선비는 몇 해가 지나 중국 사신행렬(연행사)과 함께 북경에 갔다. 북경에서 책가도의 기원인 다보각경(多寶各景)을 직접 본다. 선비의 열정에 탄복한 정조의 지원으로 중국 화공과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다보각경의 영향을 준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귀족의 작은 서재였던 ‘스투디올로(studiolo)’와 스투디올로에서 독일, 영국, 프랑스 등으로 전파된 ‘호기심의 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선비는 작은 자신의 방에서 남몰래 꿈꿔왔던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지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눈과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그림의 세계다. 이런 세계가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그저 놀라고 또 놀랄 뿐이다. 꿈을 이룬 것이 꿈만 같다. 꿈을 이루게 해준 정조 임금에게는 들리지 않겠으나 속으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연신 외치고 있다.
갑자기 빛이 없어졌다. 사방이 암흑이다. 깜짝 놀라 선비는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아니, 여긴 선비의 방이다. 밤이 깊었고 방을 밝히던 촛불이 열어둔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꺼진 것이다. 선비는 책가도를 보다 잠이 들었나 보다. 잠에서 깬 선비는 창을 닫고 촛불을 다시 켜며 꿈을 생각한다. 허망함보단 기필코 도화서에 들어가리라는 맘이 더 커진다. 밖에서 부인이 그만 잠자리에 드시라 권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마고 대답하며 선비가 일어선다. 방을 나서며 아쉬운 눈길로 책가도를 돌아본다. 선비가 방을 나서는 순간 책가도는 계속 봐달라는 듯 빛을 낸다. 선비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 빛마저 사그라진다.
이런 설정 너무 좋아요.. ㅠ
예전에 남가태수전이라는 소설을 본 적이 있는데, 호접몽이랑 비슷한 소재로 깨어보니 꿈이었다.. 라는 내용인데, 남가태수전은 허무함이나 인생이 덧없다는 내용으로 끝이 나는데 이 칼럼은 왠지 저 젊은 작가가 꼭 책가도를 완성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느낌이 좀 달라요!
그리고 마지막에 선비가 방에서 나서며 책가도가 빛을 낸다는 것이 영화에서 나올 법한 장면 처리 같아서 더 좋았어요. 선비의 등이 보이고, 선비는 멀어지는데, 정면에서 보이는 책가도 에서는 계속 조그만 빛이 난다..
아니 대체 이런 소재는 어떻게 생각하신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