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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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 신화의 도시 경주로 왔다. 주제에 맞는 정말이지 적절한 장소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천년 고도 경주에는 신라 시대의 많은 신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시간이 남아 경주를 둘러보며 옛 신화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만, 이번 오프 모임의 목적은 이미 발견되어지고 사람들에게 전승되어 온 신화를 다시 찾아가 재 확인 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여행은 밖을 향한 시선을 내 안으로 거둬 들여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어지지 않았고, 또한 내가 아니면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나의 신화를 찾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다. 천년 고도 경주에서 나는 나의 신화를 찾아 길을 떠나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백미터 달리기를 하듯 그렇게 달려갈 수는 없다. 워밍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무열왕릉이었다. 날이 좋아서인지 함께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저마다 한 송이 봄꽃이 피어있었다. 나비가 날개짓을 하듯 팔랑 팔랑 날아서 무열왕릉 주변을 걸었다. 무열왕릉이 옛날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 김춘추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함께 걷는 사람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그냥 걸었다. 날은 적당히 따뜻했고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점심을 먹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칼국수 국물의 얼큰함도 좋았고, 정갈한 반찬들도 좋았고, 멍게비빔밥에 섞여 있는 멍게의 바다 냄새도 좋았다. 잠시 후면 먼 길을 나서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유있는 점심은 먹을 수 있었다. 나비가 잠시 꽃밭에 내려와 꽃술에 취하듯 그렇게 짧은 점심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길을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신화(神話)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화 이야기는 우리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현재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닌 우리 무의식 깊은 곳의 욕망과 결핍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나의 신화를 찾아가는 여행의 목적은 다름 아닌 나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나의 욕망과 결핍의 단서를 바라 보고, 나의 무의식의 원형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소통이 좋다고 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여정을 구원의 신의 도움을 받아 수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무엇가가 되기 위해 참고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마치 전쟁터로 나서는 용사의 마음처럼 굳어있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행진을 하지 말고 산책을 하라고 한다. 힘을 빼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걸으라 한다. 어떤 한 선배는 내가 좋아했던 신화의 주인공인 헤라클레스와 에로스를 모아 그 둘이 등장시켜 나의 신화를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을 했다. 고마웠다.
헤라클레스는 나의 천복을 향한 동경인 동시에 그 길을 험난한 가시밭길로 바라보는 나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영웅의 여정을 떠나지 못한 것 같은 조급함도 담겨 있을 것이다. 반면 에로스는 여유이자 사랑 그리고 대상을 향한 애정의 감정을 나타낸다. 시간을 들여 애정을 쏟아 점차 그 대상과 하나가 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넓은 사랑이 아니다. 나의 애정을 쏟아 낼 대상을 정확히 조준하여 기꺼이 시간을 쏟아낸다. 헤라클레스와 에로스가 만난다는 것은 나의 신화의 여정에 조급함을 덜고, 사람 냄새를 채우는 여유를 가져다 줄 것이다.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한다. 나에 대한 애정과 타인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소통이 저마다의 신화가 생겨난 이유이자 결국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아닐까. 함께 걸어가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봐야겠다. 에로스가 되어 팽팽한 화살을 당겨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야 할 때 미치광이 헤라클레스가 되어 모든 걸 다 때려부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의 신화 여정 속에서 늘 헤라클레스와 에로스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