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 조회 수 1362
- 댓글 수 1
- 추천 수 0
우리 아이는 까막눈
“엄마, 아무개는 인도라던가, 인도넷이라던가..거기에서 수학을 공부했다는데?”
“응? 인도에서 수학 공부했대? 아빠가 인도에서 일하셨나 보네?”
큰 애가 7살 때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수학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산수’가 ‘수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나는 그 때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이들이 인터넷에서 선행학습으로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삼성 다니는 부모들이 많은 관계로 나는 그저 그 아이가 아빠 따라 인도에서 살면서 수학을 접했다 왔나 보다 생각한 것이다.
작은 애는 7살 여름부터 한글을 시작했다. 4-5살에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기에 이렇게 늦은 시작은 주위의 우려 섞인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당장 친정엄마부터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잔소리가 대단하였다. 어떤 부모는 내가 대단한 의식이나 신념이 있어서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갑다 생각하면서 ‘스칸디나비아식 교육을 하시나봐요?’라고 묻기도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디자인이건 교육이건 언제부터인가 북유럽 스타일도 유행인가보다.
조기교육을 포함한 아이들 교육에 대해 온갖 이론도 많고 각자의 생각도 다양하겠지만, 도대체 한글을 빨리 떼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한글이 얼마나 익히기 쉬운 언어인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익히는 한글을 왜 굳이 일찍부터 시작해야 할까. 4살에 한글을 뗐다는 둥, 5살에 한글을 뗐다는 둥, 그게 의미 있나? 아이의 한 평생을 생각할 때 ‘문맹의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짧고도 귀한 문맹의 시기를 굳이 단축시킬 필요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까막눈의 시기’는 많은 것을 더듬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기 위해서는 한글을 일찍 깨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책보다는 자연을 많이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릴 때 내 나름의 언어를 만든 적이 있는데, 나 혼자 읽고 쓸 수 있는 암호였기에 혼자 뿌듯해하며 나만의 일기장에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조악한 그 언어를 아주 친한 친구와 공유하며 서로 어설픈 쪽지를 주고 받았다. 어른들이 봤다면 추상적인 그림으로 보일 그러나 우리 나름의 어엿한 ‘언어’였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인간에게 있기에 그 욕구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그 소통수단을 스스로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아이에게 주는 것도 좋다. 그 소통수단은 그림일수도 음악일수도 춤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는 한글이건 외국어이건 언어를 일찍 가르치는 것은 아이 스스로의 표현수단과 소통수단을 개발할 기회를 뺏는 거라 생각된다. 대개의 아이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림으로라도 표현을 한다.
아이들은 모두가 그림을 그리지만 어른이 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이는 드물다. 언어에 앞선 그림이 원초적이면서 진실에 더 잘 다가갈 수 있는 소통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 시기에는 충분히 까막눈 덕에 풍부해진 다양한 감각과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렇게 수백 장의 그림을 그리며 까막눈의 시기를 다채롭게 보내던 큰 아이는 한자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아마도 상형문자인 관계로 그림과 글자의 중간단계로서의 한자가 익숙했던 모양이다.
화첩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이제 그림책 보듯 한자사전을 뒤적인다. 한자를 쓴다기 보다는 그리기 시작한 아이는 천자문을 매일같이 ‘노래 부르듯 읽고 그린다’. 한자가 이렇게 즐겁게 접근될 수 있는 것을! 한자가 노래가사가 될 수 있고 그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차피 배움은 놀이이고 아이들은 언제든 놀 준비, 즉 배울 준비가 되어 있기에 굳이 교육에 안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굳이 아이들 성장과 관련되어 개인적으로 바라보는 나라가 있다면 북유럽이 아니라 몽골이다. 외국어를 통한 소통도 중요하겠지만 아이들이 제일 잘 익혔으면 하는 언어는 ‘자연과의 소통능력’이다. 전진은 악셀, 멈춤은 브레이크 등과 같은 ‘기계와의 소통기술’을 익히기 전에 말의 옆구리를 툭 쳐서 앞으로 가고 ‘워워’하는 소리와 함께 고삐를 당기며 말로 하여금 멈추게 할 수 있는 그런 소통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장'에서 이윤을 얻는 기쁨, '전장'에서 경쟁하여 승리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 어른이 될 것이 아니라 '목장'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얻는 기쁨에서 삶을 누릴 줄 아는 어른이 되면 좋겠다. 앞으로는 ‘스칸디나비아식 교육을 하시나봐요?’라고 묻는 분들께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저는 몽골식 방목 교육을 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672 | [칼럼036] 노자가 기가 막혀. [3] | 香山 신종윤 | 2008.01.24 | 2808 |
4671 | [43-1] 나만의 방에 마징가Z | 써니 | 2008.01.25 | 2781 |
4670 | -->[re][43-2] 전설傳說 따라 삼천리 [4] | 써니 | 2008.01.26 | 2867 |
4669 | [44] 늑대들의 글쓰기와 꿈 그리고 아부? [4] | 써니 | 2008.01.27 | 2503 |
4668 | [칼럼42]아차! 아차산 역 [1] | 素田최영훈 | 2008.01.28 | 3378 |
4667 | [43] 모험은 시작되었다 [4] | 교정 한정화 | 2008.02.01 | 2795 |
4666 | [칼럼43]첫 번째 책의 강박관념 [2] | 素田최영훈 | 2008.02.04 | 2833 |
4665 | [45] 토끼털 배자(褙子)와 유년의 설 풍경 [2] | 써니 | 2008.02.05 | 2682 |
4664 | [46] 삶은 내게 어떻게 말을 걸어왔나? [4] | 써니 | 2008.02.10 | 2533 |
4663 | [47]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이 [13] | 써니 | 2008.02.12 | 2806 |
4662 | 책의 주제 선정을 위한 3개의 질문 [3] | 顯山 | 2008.02.13 | 2974 |
4661 | [48] 흔들리며 어렵게 지나가는 하루 [4] | 써니 | 2008.02.17 | 2641 |
4660 | [칼럼44]세종대왕, 광화문에서 만나다 | 소전최영훈 | 2008.02.17 | 2618 |
4659 | [49] ‘호적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의 차이 [3] | 써니 | 2008.02.20 | 11644 |
4658 | 성실함에 대하여 [6] | 구본형 | 2008.02.24 | 3362 |
4657 | (40)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 | 香仁 이은남 | 2008.02.24 | 2421 |
4656 | (41) 고양이게 먼저 고백하다 [8] | 香仁 이은남 | 2008.02.24 | 2435 |
4655 | [50] 우리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에 부침 | 써니 | 2008.02.25 | 2885 |
4654 | [51] 그게 참, 문제다 문제 | 써니 | 2008.02.25 | 2202 |
4653 | [52] 뇌신과 머리수건 [1] | 써니 | 2008.02.25 | 2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