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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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까지만 해도 백치미와 미학 모두 나와는 상관 없는 단어였다. 나는 평소 미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름다움은 각자의 눈에 달린 것, 그냥 보고 느끼는 것이지 거기에
‘학(學)’자를 붙여서 연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백치미”. 조금 멍청해 보이는 어린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지난주에 40 평생 처음으로 나에게 백치미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번주에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를 읽으면서 철학에 다섯 가지 연구와 담론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논리학, 미학,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이다. 평소
철학, 사상 등 인문학 분야에 관심이 적었고 무지했던 지라 미학과 정치학이 철학의 한 분야라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나를 백치미라고 부른 사람은 아마도 나의 이런 무식함을 꿰뚫어 봤던 것 같다. 그런데 무지하다는 의미에서 “백치(白癡)”는 알겠으나 거기에 무슨 미(美)가 있다는 걸까? 도대체 무지함의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미학적 관점에서
알고 싶어졌다.
윌 듀런트는 그의 책 <철학이야기>에서 ‘미학은 이상적인 형식,
즉 아름다움을 연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상적인 형식은 무엇일까? 나는 내적, 외적 아름다움, 즉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춘 모습을 이상적인 형식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동안 지성미(知性美)와 이지적(理智的)인 아름다움을 모토(motto)로 삼아 추구했고,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씌운 프레임이자 갖고 싶은 이미지였던 것 같다. 한편 백치미(白癡美)의 사전적 의미는 ‘지능이 낮은 듯하고, 단순한 표정을 지닌 사람이 풍기는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은어나 속어인 줄 알았는데 엄연히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오른 단어다. 실제로
지능이 낮은 것이 아니라 지능이 “낮은 듯” 보일 때 풍기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과 논란이 있다. 주로 백치미로 불리는 대상이 되는 여자들은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반면, 남자들은 긍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기에서는 백치미를 미학적 관점에서 보기로 했으니 긍정적 견해 위주로 살펴 보자. 첫번째 긍정적 견해는 ‘안전감’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이다. 지능이 낮은 듯하니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어 안심하게 되고, 본인도 똑똑해 보이거나 긴장할 필요가 없으니
편안함을 느끼면서 대상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다는 의견이다. 두번째는 순수함이다. 첫번째와
비슷할 수도 있는데, 지능이 높지 않으니 영악하지 않고 말이나 행동이 다소 어리숙함에서 매력을 느끼게
된다는 의견이다. 마지막으로 백치미는 또한 ‘여백의
미’라고도 한다. 뭔가 빈 듯해서 생기는 아름다움으로 단순한 표정을
지닌 사람에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 같은 상태의 순수 아름다움과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이를 백치미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어리숙함과 빈 듯 함의
미’. 그러고 보니 백치미는 그동안 나에게 부족하다고 했던 인간미와도 비슷한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성과 이지로 가득 찬 모습만 보이던 내가 어리숙함과
여백을 노출하게 되었을까? 그 말을 들었던 지난 주말 나는 11기
동기, 교육팀 선배들과 함께 경주에서 두번째 오프 모임 중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형식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같이 있었던 걸 수도 있겠다.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다고 믿는, 갖고 싶은 이미지이다 보니 순간, 순간 어긋나고
틀어져서 어리숙함과 빈틈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드디어 나의 틀을 깨고 나오기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백치미를 알아챈 그 분이 높은 혜안을 갖고 있었던 건가? 전자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