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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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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7일 07시 04분 등록


그녀를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었습니다. 


자그마한 몸매였음에도 목소리만큼은 괄괄했고 씩씩했죠.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저를 그다지 기꺼워 하지 않았습니다. 제 체구가 작은 편이라 힘깨나 쓰긴 힘들겠다 생각했다 합니다. 그녀의 머릿 속에 남자란 힘 잘 쓰는 남자와 그렇지 못한 남자로 구분되어 있는데, 저는 후자에 속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니 당연히 탐탁치않게 보였겠지요. 물론 그 외의 것도 별 보잘 것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요.

시골에 위치한 그녀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저는 처음으로 고봉밥(그릇 위로 수북하게 높이 담은 밥)이란 걸 받아 봤습니다. 보기만해도 아찔하더군요. 남자는 그 정도 먹어줘야 힘을 쓰는 법이라며 남기지 말고 다 먹으랍니다. 평소 제 2~3배 이상 분량되는 밥을 아무 소리 못하고 다 비웠습니다. 그러자 더 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그야말로 간신히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3끼를 먹고나자 몸이 확실하게 반응하더군요. 다음날부터 며칠 간 체끼로 인해 고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찾아간 그녀의 집에서 저는 환대를 받기에 앞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결혼식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을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며 대뜸 앉혀놓고 혼을 내는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분명 제가 잘못한 부분이니 혼날 수 밖에요. 그렇게 한참을 혼내시다가 그만 됐으니 일어나라 하더니 저를 꼭 안아줍니다. 이제 정말로 한 식구가 되었다며 말이죠.


눈치 채셨겠지만 제가 그녀를 부르는 명칭은 ‘어머니’ 또는 ‘장모님’입니다. 장모님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셨는데, 제가 6남매 중 막내딸과 연을 맺음으로써 저는 그녀의 막내사위가 되었습니다. 화성시 송산(옛 이름은 사강)면의 면장이셨던 장인어른은 안타깝게도 제가 아내를 만나기 바로 전 해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영정사진과 집 뒷산에 위치한 산소에서만 뵐 수 있었죠. 정이 많으신 장모님은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참 많이도 그리워했습니다. 장인어른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그렇게도 많이 싸웠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그 빈자리가 너무 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거의 빼놓지 않고 예전 장인어른에 대한 일화가 등장하곤 했지요.

힘쓰는 일을 못한다고, 또 숫기도 없다고 구박도 하셨지만 그래도 그녀는 막내사위를 많이 이뻐해 주셨습니다. 시골 집을 다녀올 때면 차 트렁크가 모자를 만큼 힘들게 농사지어 수확한 농산물과 여러 식재료들을 나눠주셨죠. 게다가 쌀까지 다 챙겨 주셨으니 덕분에 식비가 거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외벌이였음에도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녀의 도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는 특히 제 아이들을 이뻐해 주셨습니다. 집안의 막내 손주들이라고 더 챙기고 사랑해주셨죠. 아이들이 뭘 먹고 싶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 주시거나, 아니면 안쪽 주머니에 숨겨놓았던 돈을 꺼내 아이들의 손에 쥐어 주곤 하셨죠. 제 첫째아이는 지금도 식혜를 엄청 좋아하는데, 시골에 갈 때마다 손수 식혜를 만들어 주셨던 그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씩씩하던 그녀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나 봅니다. 점차 쇠약해지시더니 식사를 잘 못하게 되셨고, 결국 한차례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퇴원한 후에는 시골집 근처에 위치한 요양원에 모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요양원에서는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습니다. 본인 스스로 걷거나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드실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거기까지였나 봅니다. 다시 식사를 못하게 되셨고 그래서 근처 병원에서 영양제가 들어간 링거 주사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고 급히 요양원에서 큰 병원의 응급실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만 그녀는 아쉬운 숨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89세였습니다.

지난 목요일 그녀는 23년 전 돌아가신 장인어른 옆에 묻혔습니다. 그토록 오랜 동안 그리워하던 남편 옆에 누우셨으니 많이 기뻐하셨을 겁니다. 이제는 두분이서 오순도순 이야기 많이 나누시겠죠. 어쩔 수 없었던 외로움, 그리움도 다시는 느끼지 않으실 거고요. 20년이 넘는 긴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다 나누려면 두 분 사이에 말이 끊일 새가 없겠죠?


어머니.
당신은 제게 장모님이라기보다 또 한 분의 어머니셨네요.
과분한 사랑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사위를 그래도 막내라고 아껴주셨던 당신의 마음, 손길이 벌써부터 그립습니다.
지난 22년의 시간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집니다.
당신이 건강하실 때, 조금이라도 더 찾아 뵙고 안아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너무 큽니다.
그래도 이제 장인어른과 함께 하실 수 있으니, 식사도 많이 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제발 농사 걱정, 자식 걱정 이런 건 다 내려 놓으시고요.

어머니.
당신을 만나 또 다른 인생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조금 더 성장한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대로, 나머지 인생 더 열심히 잘 살아갈게요.
아내와 아이들도 더 많이 사랑하면서요.

어머니.
우리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잖아요.
그때까지 편안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즐겁게 지내고 계세요.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는,
무엇보다 먼저 어머니를 꼭 안아드릴게요. 
그리고 나서는 이곳에서 못다한 막내 역할 다 보여드릴게요.

어머니.
사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합니다.


2017년 6월 
막내 사위 올림



차칸양(bang_1999@naver.com) 올림




*****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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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7 07:40:29 *.45.30.238

글속에 재우님께서 장모님과 함께한 22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것같습니다.

언젠가는 이별을 맞이할수밖에 없다는것을 알지만 그순간이 오면 참으로 힘든것같습니다.

 

재우님께서는 장모님께 분명 멋진 막내 사위였을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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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9 08:00:33 *.122.139.253

감사합니다.


지난번 아버지도 그렇고, 이번 장모님도 그렇고 결코 쉬운 이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분들께 받은 사랑이 큰만큼, 그 사랑을 다시 우리 후세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그게 부모님들이 원하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되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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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8 13:12:54 *.225.147.253

따듯한 그대와 아내분이 걱정되었다오.  다시 못 볼 분에게 보낸 편지. 그래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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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9 08:02:22 *.122.139.253

이별은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이별이기에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어요.

시간이 가면 그 가슴 아픔도 조금씩 줄어 들며, 아련함, 그리움으로 변하겠지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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