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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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이 쌍둥이를 낳았다고 한다. 사촌 동생은 호주 남자와 결혼해서 호주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모가
그녀의 산후 조리를 도와주고, 큰 아이도 봐줄 겸 해서 호주에서 석 달 정도 지내다 온다며 떠나셨다고
한다. 저녁을 먹으며 사촌 동생과 이모의 소식을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언뜻 부러움이 비친다.
엄마의 부러움을 못 본 체 하며 밥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가만, 쌍둥이는 모계 유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우리 외가 쪽에 쌍둥이가 있었나? 엄마에게 물어보니 당황스럽게도
바로 엄마가 쌍둥이로 태어나셨다고 한다. 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엄마가 쌍둥이로 태어났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한번도 엄마가 쌍둥이었다는
걸 말 안 했어? 그럼 다른 쌍둥이는 어떻게 된 거야?”
엄마는 당신도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걸 환갑이 지난 후에야 아셨다고
한다. 엄마가 태어났던 1940년대 후반만 해도 쌍둥이는
불길하고 흉한 일로 여겨져서 둘 중 한 아이나 둘 모두를 남의 집으로 보내는 일이 흔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엄마의 쌍둥이는 며칠 못 살고 죽었다고. 그래서 엄마는 다른
집으로 보내지거나 집안의 액운으로 여겨져서 구박당하지 않고, 외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랄 수 있었다는데, 외할머니는 자식을 버려야하는 일은 피했지만, 그래도 쌍둥이를 낳은 건 여전히 수치스러운 일이라 그 일을 당사자인 엄마에게 조차 비밀로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60년이 흐른 어느 날,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야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려주셨다고 했다.
딸만 셋 낳아서 시부모에게 온갖 구박을 받으며 심한 시집살이를 하셨다는
외할머니. 게다가 딸 쌍둥이까지 낳으셨었으니 그 서러움과 수모가 어땠을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얼마나 한이 맺히셨으면 60년이 넘는 세월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셨을까? 꼿꼿한 성품의 할머니가 겪으셨을 맘
고생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생각. 다른
쌍둥이는 정말 그냥 며칠 만에 죽은 것일까? 혹시 할머니가 몰래 다른 집에 입양 보내고 죽었다고 둘러대셨던
건 아닐까? 저녁밥 먹다 말고 갑자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엄마, 혹시 그 쌍둥이 죽은 게 아니라, 부잣집에 입양보내졌던 거 아냐? 그래서 부자 남자랑 결혼해서 부잣집 사모님이 되고… 어느 날 내가
결혼할 남자 부모랑 상견례 하는 자리에서 엄마랑 그 쌍둥이랑 딱 마주쳐서, 쌍둥이 자매인 걸 깨닫고
우리 결혼 반대해서, 나는 울면서 헤어지고…”
나름 창의력을 발휘해서 드라마를 만드는데, 엄마의 날카로운 말씀이 귀를 찔렀다.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결혼 반대한다고 헤어지긴 왜 헤어지냐? 둘이 도망가서 결혼해서 너가
또 쌍둥이 낳고 데려 와서 결국 화해하는 걸로 가야지.”
장난친다고 등짝 스매싱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는데, 엄마가
한 술 더 뜨신다. 아마 엄마가 그동안 보셨던 드라마에 비슷한 스토리가 있었나 보다. 아무리 내가 “발상”의
강점을 가졌다고 해도 이런 스토리에는 온갖 막장 드라마의 열혈 팬인 엄마는 못 따라갈 것 같다.
3년 전에 독립한 뒤로 2~3주에 한번 정도는 엄마와 일요일 저녁을 같이 먹는다. 밥을 먹으며
엄마와 나는 그렇게 많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대화라고 해봐야 상에 올라온 반찬 얘기나, 틀어 놓은 TV 프로그램에서 엄마가 못 알아 들은 부분을 설명하는
정도다. 엄마와의 대화는 공통 화제도 없고 말도 안 통해서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다른 집 다정한 딸들과 비교하며 섭섭해 하셨지만, 난 완벽한
딸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며, 굳이 공통 화제를 만들려는 노력도 안 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같이 웃으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드라마 얘기
등 흔한 모녀 사이의 대화가 없어서 얼마나 재미없고 서운하셨을까 싶어서 마음이 짠했다.
나는 국내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내용이 너무 뻔하고 유치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사실 내가 즐겨
보는 미국 드라마도 내용이 뻔히 예상되고 인물들의 관계나 구성이 말도 안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한국
드라마 못지 않은 막장 드라마도 많은데, 출생의 비밀 없이는 진행이 안 되는 그런 수준 낮은 드라마나 보는 사람과는 다르다며 잘난
척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앞으로 엄마와의 즐겁고 웃음이 넘치는 일요일 저녁 식사를 위해서 주말 연속극 하나 정도는 봐줘야겠다.
“엄마, 혹시 그 쌍둥이 죽은 게 아니라, 부잣집에 입양보내졌던 거 아냐? 그래서 부자 남자랑 결혼해서 부잣집 사모님이 되고… 어느 날 내가 결혼할 남자 부모랑 상견례 하는 자리에서 엄마랑 그 쌍둥이랑 딱 마주쳐서, 쌍둥이 자매인 걸 깨닫고 우리 결혼 반대해서, 나는 울면서 헤어지고…”
여기 이 부분 김수현 작가인줄 알았어요..^^ (소근)
이번 칼럼의 맛은 '깔라만시'로 하겠습니다!! 왜냐구요? 모르겠어요 ㅎ 그냥 상큼했어요. 왠지 맡은 일은 뭐든 똑부러지게 잘하는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누나의 모습과 무릎 반쯤 나온 추리닝 입고 어머니와 저녁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 평범한 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서 좋았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