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냥이
- 조회 수 1305
- 댓글 수 5
- 추천 수 0
위대한 성인과 함께 살아가는 행운
여러분은 지치고 힘들 때 누구에게 기대나요? 고민이 생겼을 때 어디에 의지하나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선배, 삶의 등대가 되어주는 부모님이 생각날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기며 고난과 번뇌를 이겨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위대한 성인(聖人)의 말씀을 오직 경전을 통해서만 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륜, 혜민스님, 황창연 신부님, 이해인 수녀님 등 우리 곁에는 이 시대의 훌륭한 정신적 멘토가 있습니다. 이 분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지친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합니다. 처진 어깨를 토닥여 줍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위로와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또 있습니다. 바로 스마트폰입니다. ‘명언’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하면 어마어마한 개수의 어플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소크라테스도 있고 플라톤도 있습니다. 괴테가 충고하고 쇼펜하우어가 조언합니다. 니체의 독설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자기계발서는 살 필요도 없습니다. 도서판매 순위권에 올랐던 소위 읽힌 책들의 핵심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만 따른다면 우리는 습관의 위력을 체험할 수 있고 아침 30분의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달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언급하지 않은 시와 에세이 등을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좋은 말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요’, ‘공감합니다’에 클릭을 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위로가 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등의 댓글이 줄을 섭니다.
왜 우리는 따뜻한 말씀과 좋은 글, 명언에 극히 공감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다음 3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신뢰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일면식 없는 행인이 건넨 한마디가 아닌 신학과 철학에 깊이 있는 분들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수용합니다.
둘째, 실제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작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인생을 건 고민을 몇 번이나 할까요? 오히려 일상의 사소한 근심과 걱정이 쌓이면서 지치고 힘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짧은 영상과 단문의 글로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셋째, 항상 새롭게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내용이라도 지난 주 읽었던 명언과 이번 주 읽었던 좋은 말은 전혀 다릅니다. 새롭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멘토의 말씀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명언, 자기계발서의 수많은 방법과 법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 아닌가요? 비슷한 내용을 각자의 개성으로 표현했기에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익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겁니다.
사람은, 아니 정확히 남성은 위대한 성인(聖人)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들을 ‘마누라’, ‘와이프’, ‘여친’이라는 부릅니다.
“술이 나쁜 것이 아니라, 폭음이 죄이다.” - 벤자민 프랭클린
“제발 술 좀 작작 마셔!! 적당히가 안돼?” - 마누라
“부자가 되고 싶으면 버는 것뿐 아니라 모으는 것도 생각하라” - 벤자민 프랭클린
“이 카드값 뭐야? 왜 맨날 당신이 내?” - 와이프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 - 벤자민 프랭클린
“오빠 변했어. 맨날 게임이나 하고, 잠만 자고, 귀찮아 하고” - 여친
무엇이 보이시나요? 사랑하는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고 오랜 시간 함께하고 싶은 소망이 보입니다. 헛된 욕망을 자제하라는 전언(傳言)과 가정의 미래를 생각하는 슬기가 엿보입니다. 변치 않는 마음과 ‘상호 기본적 신뢰’라는 사랑의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왜 남성들은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걸까요? 그들이 성인(聖人)이 아니고 신학과 철학의 깊이가 없어서? 새롭지 않아서? 아닙니다. 관계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저 마땅히 옆에 있는 존재로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고, 이기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명언을 잔소리로 처리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들도 성인(成人)입니다. 가장 사랑해서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입니다. ‘나’라는 종교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깊이와 이해가 남다릅니다. 가장 신뢰해도 된다는 말이지요.
그들은 작은 일에도 함께 고민해주고 진심으로 걱정해 줍니다. 그래서 근심이 쌓이는 것을 미연에 막아줍니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항상 새롭고 다양합니다.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어르고 달래기도 합니다. 윽박을 지르기도 하고 방치라는 처방을 하기도 합니다. ‘결별’이라는 최후통첩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도 합니다.
지치고 힘든 세상, 따뜻한 조언과 위로의 한마디가 듣고 싶다면 멀리서 찾지 마세요. 우리 곁에 있는 그들은 처음부터 까칠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다가도 떡을 생산해 내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부처님이며 벤자민 플랭클린이고 괴테며 니체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성인과 함께 살고 있는 행운아입니다.
** ”네 아버지는 마누라말은 무지하게 안 들어” 위대한 성인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