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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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장소는 찾기 쉬웠다. 씨클라우드에 들어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니 " 명석이 어서 와" 하며 맞아 주신다. 내 기억에 선생님께서 나를 '명석'이라고 불러주신 것은 세 번쯤 된다. 메일서비스를 시작하던 즈음에 한 번 불러주셨던 것 같고, 선생님의 2007년 버전 미래풍광을 정리한 글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두 번 다 글이었고 후자를 찾아보니 '명석'이 아니라 '한명석'이다. 그러니 글이 아닌 말로 내 이름을 불러주신 것이 처음인 셈이다.
---- 각별하게 아름답고 간곡한 글이니 선생님의 2007년 버전 미래풍광을 한번씩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http://www.bhgoo.com/zbxe/48441
아마 선생님께 나는 편치않은 제자인가 보다.^^ 선생님보다 불과 세 살 적은 내 나이가 원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무뚝뚝하여 할 말만 하는 내 성격 탓이거니 하고 있었는데 강좌를 시작한 후 생각이 번져갈 때가 있었다. 불과 2년간의 경력이지만 여러 스타일의 수강생을 만났다. 똑똑하여 자기 할 일 알아서 다 해도 내게 곁을 주지 않으면 , 우리의 만남은 기능의 교환에 불과하다. 반면에 남들 눈에는 훤히 보이는 장애물에 걸려 헤매고 있는 사람이라도 내 의견을 존중하고 구하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정이 느껴졌다. 적절한 아웃풋으로 진도는 맞추는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저 가르치는 역할로만 한정해 놓고 나를 알아가려는 시도가 전혀 보이지 않거나 배려심조차 없는 사람을 접할 때도 있었다. 그때 비로소 선생님의 심경을 조금이라도 짚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내 경우 선생님과 달라서 소규모 비즈니스 차원이지만 관계의 본질은 같았다. 니가 필요해! 니가 좋아! 서로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사이라면, 의미있는 일을 성취하기도 어렵고, 설사 한다해도 '일' 이상의 의미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역할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만나게 된다.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 속으로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도 내 댓글을 씹으면 내 조언이 필요없다보다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관계는 살아있는 생물체같아서 그냥 머물러 있는 법이 없고, 계속 커지지 않으면 메마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니, 지속적인 관심과 표현으로 가꾸어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나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깨달은 지금, 나는 기꺼이 '표현'하는 제자가 되려고 한다. "모임에 올 때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와야한다, 그것이 첫째"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삶 속에 구현하는 골수 제자가 될 것이다.


올 송년회에는 '나는 연구원이다' 가 새로 도입되었다. 올해 책을 낸 연구원들이 10분간 강의를 하여 청중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나가수' 식으로 누가 기발한 코너라도 준비해 오려나 신경이 쓰였지만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발표날이 와 버렸다.
발표자 4명 중 내가 꼴찌인데, 앞의 세 사람이 모두 잘 한다. 차분하게 자신의 사례를 들어가며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엑기스를 뽑아 주는 모습도 좋았고, 여유만만하게 유능한 발표자임을 드러내는 호탕함도 좋았고, 진솔하게 사람 마음을 파고 드는 소탈함도 좋았다. 게다가 모두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유머까지 갖추고 있다. 이런, 내 이야기는 유머는 커녕 너무 구닥다리로 진지하기만 한데 큰일이군. 설상가상으로 홀짝거리며 마신 몇 잔의 와인 때문에 머리가 엉키는 기분이다. 하려던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천만다행인 것은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긴장하기보다 무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처음만 잘 시작하면 그런대로 넘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날의 발표를 위해 내가 가장 신경쓴 것은 이야기를 빛나게 하는 키워드를 빼먹지 않는 것이었다. -- 이 날은 '오리진' 하나만 빼 먹었다. 자신의 감각을 믿는 사람만이 미세하게 느낌을 잡아채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여 한 분야의 오리진이 될 수 있다는 내용 -
무대쪽의 조명이 밝아서인지 청중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어두운 채로 실루엣만 보이는 정도. 거의 반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어둠 속에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청중이 미동도 없이 빨려 오는 것이 느껴진다. 가끔 수업 중에 이런 순간에 접하면 좋아서 온 몸이 짜릿해지는데 이 날은 미처 그런 쾌감을 느낄 새도 없이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 나갔다. 발표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도 의아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아무런 욕심도 생기지 않았다. 내 표 하나라도 보태는 것이 경연에 임하는 자세일 것 같아 뒤늦게 채점표 하나를 받아들었을 뿐이다.
'올해의 연구원상'은 내게로 돌아왔다. 2위와 근소한 표 차이라고 했다. 역시나 얼떨떨한 채로 수상하기 위해 다시 앞에 섰는데 뜻하지않게 눈물이 차오른다. 입술까지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올들어 처음으로 나이드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서러움이다. 연구원 이래 5년간, 글감이 떠오르면 타자치는 시간밖에 들지않던 호시절이 가고 이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야만 하는데 대한 당혹감이 터진 것이다. "벌써 막히네요. 어려울 때면 저 만년필을 보면서 평생현역이 되겠습니다." 하는 인사말의 배경은 그런 것이었다.
촌스러운 나는 연구소에서 가끔 하는 허깅이 참 불편했는데 갈수록 편해지고 있다. 선생님께서 슬쩍 안아주고 말려는 것을 내가 꼬옥 힘을 주어 껴안았더니 선생님께서도 다시 한 번 꼬옥 안아 주신다. ^^ 연구원 동문회장 희석씨도 그 긴 팔로 꼬옥 안아주어서 아주 편안했다. 꽉 끌어안은 두 팔이 축하하는 마음의 강도라도 되는 양 저 사진이 참 좋다.
실전에서 무덤덤했던 것에 비하면 선물은 새록새록 좋다. 2년 전에 첫 책을 내고 연구원상으로 받은 펠리컨이 살짝 가볍고 번지는 감이 있었는데 그 두 가지를 확실하게 개선한 몽블랑인 것이다. 무게감이 맞춤하고 사각사각 써지는 촉감이 좋아서 자꾸만 쓰고 싶다. 손으로 쓰는 일이 늘어날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본의아니게 '올해의 연구원상' 2관왕이 되었다. 첫 책을 낸 분들께 조금 미안하다. 내년부터는 해당이 되어도 사양해야겠다. 하지만 시상과 상관없이 이런 기회를 자주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ted를 본따서 연구원들의 미니강연을 정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말과 글을 단련하는 것으로 필생의 과업을 삼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가수들이 갖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이디어를 짜내 전에 없던 새로운 편곡과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처럼, 그리하여 스스로도 놀랄만한 역량을 발굴하고, 그것을 통해 당사자와 청중이 동시에 행복해지며 저절로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연구원들도 연구성과와 발표능력과 진정성을 수시로 점검하고 훈련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다.
올 송년회에서는 유독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앞자리에 앉아 무대만 쳐다 보았다. 같은 기수와 그 외에 아주 익숙한 사람 극소수와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다.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도 쑥스러움을 탄다. 그런데 희석씨도 인사말에서 쑥스럽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8개월 만에 만났기 때문이다. 두 세 달에 한번씩 연구원들이 편하게 말과 글을 가지고 즐기며 기량을 훈련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 기수를 넘어 다른 연구원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있다면, 서로에 대한 정보가 늘어 관심을 표하기도 좋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엮어낼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어느새 7기도 마무리 시점, 갈수록 앞선 기수는 아득하고 새로운 기수는 낯설다. 연구원 커뮤니티에 무언가 획기적인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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