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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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적인 독서량으로 유명한 에릭 호퍼는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일곱 살에 어머니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함께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어머니는 죽고, 뇌에 충격을 받은 그는 양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그리고 암흑의 8년을 보내고 열다섯 살이 되었는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눈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것입니다.
깜짝 놀란 그는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시력의 회복이 일시적인 축복일 것이라 판단했던 그는, 무엇보다도 눈이 멀어 있는 동안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 곧 독서와 세상 구경을 실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미친듯이 독서에 탐닉했으며 집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눈이 암흑으로 닫히기 전에 볼 수 있는 모든 책과 모든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호퍼가 죽기 전까지 다시 실명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생의 대부분을 떠돌이가 되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막노동, 사금 채취, 부두 야적장 일 등 여러 육체 노동 직업을 전전하며 ‘걷고, 일하며, 사색하는 생활’을 즐겼습니다. 한 번도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그였지만 독서와 방랑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해 세계적인 철학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길 위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방랑하던 어느 날, 그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서 어떤 문제를 고민하다가 혼자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딪칩니다. 그 문제를 풀려면 엄청나게 힘든 사고 과정을 겪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손이 저절로 배낭 속의 책으로 뻗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그는 그 행동이 ‘힘든 생각을 회피하려는 수작’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그는 진정한 학자가 될 수 없을 테고, 그것은 받아들이기 불쾌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책을 집어서 바람 속으로 던져 버립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는 점에서 책이 우리의 사고를 훈련하는 좋은 도구임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자칫 우리가 책에서 ‘완벽한 답’을 찾으려 하거나, 책이 그런 답을 제공하려고 할 때 생각은 제한된 채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되려 책에 읽히게 됩니다. 호퍼는 ‘적극적인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한 평생 나는 모든 사색을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해 왔습니다. 번쩍이는 모든 생각들은 일을 하던 중에 떠오른 것들입니다. 나는 따분하고 반복적인 일을 즐기곤 했지요. 파트너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 뒤쪽에서 문장을 짜 맞추었던 거지요. 그러다가 은퇴를 하고 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시간을 내가 다 차지했어도 뭘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도 머리를 아래로, 엉덩이를 위로하는 것이 사유의 가장 좋은 자세일 겁니다. 동시에 두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영혼의 스트레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아주 생산적이지요."
책의 기능은 결론이나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사유의 재료를 제공하고 영감을 점화시키는 것입니다.나머지는 실천의 몫입니다. 오늘 배운 것을 오늘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지식은 근육에 새겨지고 우리는 삶이라는 허들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한 책: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이다미디어
[알림] 김정은 연구원의 두번째 책 <엄마의 글쓰기>가 출간되었습니다. 한땀 한땀 엄마의 마음으로 손바느질해 엮은 책이니 널리 알려주세요. 사춘기 자녀를 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bhgoo.com/2011/82627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