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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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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0시 15분 등록

나는 쇼핑이 싫다.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 물건을 열심히 고르고, 장바구니에 담은 물건에 여기저기서 긁어 모은 쿠폰을 쓰는 재미를 몰라서가 아니다. 반대로 얼마 차이 나지도 않는 것에 과도하게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몇 백 원이라도 더 싼 곳에서 사려고 삼 십분 넘게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거나, 이 카드 저 카드를 뒤적거린다. 더 문제는 그렇게 해서 사는 것들이 뭐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활용품에 불과한 것들이 많다. 천원 더 비싸게 주고 사도 크게 달라질 것들이 없는 것들이다. 쇼핑이 나를 옹색하게 만드는지,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옹색함을 쇼핑을 통해 발견하는 것인지 요즘은 구분조차 힘들다.

 

쇼핑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는 충동적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일이 많아지는 탓도 있다. 갈수록 갖고 싶다필요 하다를 잘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갖고 싶거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있으면 그 때 마다 충동적으로 사지 않고, 일단 메모지에 적어두고 일 주일에 한 번씩 모아서 사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가죽 구두, 가죽 벨트, 면도 크림, 섬유유연제, 방향제, 그리고 책과 밀대 걸레 등 생각나는 대로 일단 적어 둔다. 적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산 것 같은 쾌감이 들고,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면 충동적인 마음이 잦아들고 갖고 싶은 것과 필요한 것의 경계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의 순간 종이에 적힌 물건들을 보면서 그 물건이 있으면 내 생활이 어떻게 나아질까 하는 생각 보다는 없어도 불편하지는 않을지를 생각해 본다. 그러면 대게는 크게 세 분류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들이다. 이런 물건들은 바로 탈락이다. 그렇게 가죽 구두와 가죽 벨트가 탈락 됐다. 두 번째는 없으면 조금은 불편할 것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대체 가능한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있다면 구매 결정을 다음 주로 미룬다. 면도 크림, 섬유유연제 그리고 방향제가 보류 되었다. 면도 크림은 아쉬운 대로 비누로 거품을 만들어 써보기로 했고, 섬유유연제는 일단 남아있는 걸 다 쓰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없으면 아주 불편하고 다른 것들과 대체가 절대 불가한 것들, 다시 말해 즉시 사야 하는 것들이다. 연구원 과제로 사는 책들이 그런 경우다.

 

그런데 6개월 가까이 나의 리스트에서 계속 보류 되었으면서, 매번 나의 장바구니 위시리스트에 올라오는 물건이 있다. 바로 밀대 걸레다. 무릎이 닿은 채로 걸레로 방을 훔칠 때 마다, 빨개진 무릎을 보면서 이번 주에는 반드시 산다고 마음을 먹지만 밀대 걸레는 매번 최종 관문에서 고배를 마신다. 나에게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서 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매달 밀대 걸레를 50개는 넘게 살 수 있는 돈을 식비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절약(節約)은 분명 권장해 마땅한 생활 습관이다. 나 역시 가급적이면 물건을 아껴 쓰고 불 필요한 물건은 충동적으로 사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생활에서 무엇을 중요시 하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며,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의 태도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약이라는 것이 아무리 좋은 삶의 태도라 할 지라도, 무엇을 위한 절약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그것은 목적지를 잃고 무작정 항해 하는 돛단배와 다를 것이 없다. 밀대 걸레 하나 사는 데 6개월을 넘게 고민하면서 정작 그것의 수 십 배가 넘는 돈을 매달 식비로 지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절약은 목적지를 잃고 무작정 달리는 돛단배와 다를 바 없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절약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일상 속에서 얻는 나의 만족감을 높이는 것이다. 얼마 전 5년 가까이 쓰던 전기 면도기를 대신해 좋은 날 면도기 하나를 샀다. 면도용 크림을 함께 사서 아침 마다 날 면도기로 면도를 시작한지 한 달이 되었는데, 아침 마다 샤워를 하면서 면도를 하는 시간이 그렇게나 즐거울 수가 없다. 원래 수염이 많이 자라는 편은 아니지만 광고에서 보는 것처럼 아침마다 턱에 면도 거품을 한 가득 바르고 슥슥 면도를 하는데, 그것은 마치 군인들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비장한 각오로 군장을 챙기듯 회사로 출근하기 전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나만의 즐거운 의식이 되었다. 내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나의 이미지가 또 그것을 통해 내가 느끼는 만족감이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나에게 심어준 허상이라면 또 어떤가. 내가 이렇게 매일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어린 시절 핫도그를 먹을 때 꼭 겉에 있는 빵을 먼저 먹고, 안에 있는 소시지는 나중에 먹곤 했었다. 그게 핫도그를 맛있게 먹는 방법인 줄 알았다. 어른들로부터도 좋은 것은 항상 나중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고된 것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고 들어왔다. 어른들이 즐겨하는 말 가운데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인고의 시간이 다 가고 나면, 달콤한 열매처럼 행복의 시간이 온다는 말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혹시 나처럼 어려서부터 핫도그에 있는 소시지는 항상 나중에 먹었던 사람들 그리고 어른들의 말씀처럼 좋은 것은 항상 나중으로 미루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모두들 그렇게 바라던 여유는 찾았는지, 또 지금 좋은 것들만 누리면서 살고 있는지 말이다.

 

다소 격한 표현이지만 아끼다 똥 된다라는 말에 더 공감이 가는 요즘이다. 날 면도기와 면도크림을 알게 되면서 매일 아침 나의 샤워 시간이 즐거워졌다. 지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은품으로 받아서 꾸역꾸역 쓰고 있던 섬유유연제는 버리고 다우니를 좀 사야겠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하는 빨래가 즐거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다. 밀대 걸레도 하나 장만해야겠다. 매번 무릎이 빨개지면서 방을 닦지 않아도 되고, 선 채로 방을 훔칠 수 있어서 더 자주 즐거운 마음으로 방 청소를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손이 닿지 않던 침대 밑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은 덤으로 오는 즐거움일 것이다.

 

절약은 그 자체가 삶의 태도 일 뿐 절대 그 삶 자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목적을 향한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니다. 절약이라는 좋은 습관도 그것을 통해 얻는 일상의 만족감이 없다면 자신의 삶을 비루하고 고루하게 만들 뿐이다. 이제부터는 핫도그를 먹을 때 빵만 먼저 배어 먹지는 않을 것이다. 나중으로 미뤄두었던 여유를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지금 당장 누려보고자 한다. 그것으로 행복 할사람이 아닌 지금 행복한사람이 되는 나만의 비결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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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1:30:48 *.124.22.184

그래서 절약이 좋다는 거야? ㅎㅎㅎ

누구나 절약하는 물건과 상황이 다른 거겠지.  각자의 기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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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1:59:04 *.33.184.175
절약은 좋은 거지만 나의 삶을 즐겁고 풍성하게 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에요.. ^^
 
맞다! 그리고 웨버누님이 알려주신 이오덕 선생님 글쓰기 방법 앞으로 많이 배워서 따라해보려고 합니당^^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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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2:12:33 *.18.218.234

생활밀착형 소재라 그런지 이번 글 잘 읽혔어요.

물론 그 와중에 메시지 있어서 좋았고.


그나저나 청소를 그렇게 열심히 한다니 예비신부 부럽고~

(아마 관리자형이라 결혼 후에도 청소는 정욱씨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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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5 09:05:58 *.71.149.234

이 나이 들어 느끼는 건 정욱 말대로 너무 쓸데없는 것에 아끼는 것 같아. 택시비, 주차비.

그리고 밀대는 꼭 사라. 나도 해보니까 밀대가 편하다. 절약보다 몸이 먼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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