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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살러 갑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제주행 배를 타고 있다. 그 옛날 젊은 시절 1년 조금 넘게 배를 탄 이후에 실로 오랜만에 타보는 배이다. 그때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배를 탄 것이었고 이번에는 가족여행을 위해서 배를 타고 있는 셈이니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들과 배를 타고 제주를 가는 기분이 참으로 이상하다. 벌써 7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과 같이 나는 아직 민간인의 준비가 덜 되었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와 같이 여행을 한다는 것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하긴 그 동안은 여행이라고 해봐야 길어봐야 4박 5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같이 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분명 그간의 여행과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배는 생각보다 너무 낡았다. 1987년에 건조되었으니 선령이 30년이라는 얘기다. 이런 생각이 들면 안되는데 세월호 참사가 떠올랐다. 이 낡은 배와 좁은 선실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부디 이런 참사는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본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그 중에 자전거여행을 하는 외국인이 눈에 띄었다.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 같은데 자전거 앞뒤에는 각종 가방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아마 추측컨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그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모양이다. 구리빛 얼굴을 가진 그 사람은 여자였다. 여자혼자서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나온다. 아마 이런 여행경험이 그녀에게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큰 자산으로 남겨질 것이다. 나도 젊은 시절 배낭여행을 꿈꾸었다. 하지만 배낭여행은 젊은 시절 나에게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사실 1년 동안 아무 생각없이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혼자서 여행을 가고 싶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으로 실행을 못하고 있다.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평생 그런 여행을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래도 죽기 전에 꼭 산티아고 순례길은 꼭 걸어보고 싶은데. 너무 늦으면 나이 때문에 힘들 것 같은데 그게 사실 걱정이긴 하다.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상상의 질서’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 된 것이라고까지 말이다.“이를테면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보자. 이런 욕망은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한다. 한편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저자의 뛰어난 통찰력을 감안하면 완전히 거짓된 말은 아닐텐데 왜 그런 말을 할까 생각해본다.
여행지가 해외이든 국내이든 그 많은 사람들은 무수한 목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정말 그런 사람들의 욕망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걸까? 그냥 남들이 가니까 가는 것이고, 남들에게 나는 어디로 여행을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는 것인가? 어디 유명한 해외에 나가면 있어 보이기 위해 그런 것인가? 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현재 전 세계는 237~242개국이라 한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도 이렇게 많은 나라,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개인적으로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자연환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생각해본다. 그런데 이런 여행이 자연스럽지 않다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오히려 그 옛날 수렵채집인의 사피엔스의 삶처럼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앞으로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하라리의 말처럼 이 여행이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여행인지 아닌지를 꼭 곱씹어 봐야겠다.
이번 여름 나는 요즘 그렇게 유행하는 ‘한 달 살기’를 제주도에서 시작하기 위해 배를 타고 있다. 그동안 제주도에 관광으로 온 것과 출장을 합치면 거의 30 ~ 40번 정도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관광으로 와봐야 제일 길게 온 것이 4박 5일 정도였다. 번갯불에 콩 튀기듯 여행 준비를 하고 비행기를 타고 숙소를 잡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유명한 관광지와 맛집을 체크하고 각 날짜에 어디를 갈건지 미리 스케쥴을 정하고 여행을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여행은 줄곧 이런 패턴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그러지 않았다. 오로지 정해진 것은 숙소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즉석 선택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한 달 살기’역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다양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남들이 하니까 그냥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나에게 ‘한 달 살기’는 참 좋은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번여행에서 나는 몇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다.
첫째,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얘기를 하고, 더 많은 추억을 쌓는 것이다. 그동안 애들은 학교를 다니고 나는 나대로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물리적 시간은 있었지만 그것을 가치있는 시간으로 바꿔보지는 못했다. 이번만큼은 아이들의 시선에서, 아이들의 생각을 공유해 보겠다고 다짐해보지만 이 글을 적고 있는 순간에도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나를 발견한다. 에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둘째, 무리한 계획 없이 목표를 세우되 그 날 그 날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여행을 하는 것이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무계획적이지만 의미있는 날들을 보내고 싶다. 관광지 한 곳을 가더라도 여유 있게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다. 다만 계획이 없다보니 자칫 집에서 보내는 것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경계하자. 셋째, 아침에 계획없이, 알람없이 늦잠을 자는 것인데 나는 제외된다. 연구원은 방학도 휴가도 없기 때문이다.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연구원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실 이 시간도 행복하다. 넷째,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나를 좀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동안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롭고 이국적인 이 도시에서 나를 돌아보고 관찰해 보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글로 적고보니 이번 여행이 대단히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말그대로 무계획적이고 의미를 두지 않는 여행인데, 그리고 설령 하루죙일 방안에서 뒹굴뒹굴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 의미 없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 정말 쓸데없는 원칙을 세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냥 살아보련다. 이게 정답일 수 있다. 그렇게 ‘제주 한 달 살기’는 시작되었다.
'한 달 살러 갑니다'라는 제목에서 클릭할까 말까 하다가 클릭.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제주행 배를 타고 있다.
--> 여기에서 완전 부러움. 초반부터 기선제압 너무 하는 거 아니요?
제주도 가는 배 안에서 쓴 글이 무슨 '탐라원정 출사표'같소. 기상장군.
물리적 시간은 있었지만 그것을 가치있는 시간으로 바꿔보지는 못했다.
--> 이거 좋네요. 가치 있고 느슨한 시간 지내고 오세요. 정학씨 만나서 배 보며 술잔도 기울이고.
글고 누가 연구원은 방학도 휴가도 없대요? 알람 버리고 늦잠자요!!!
그냥 한 주 제껴~!!! 그대에게는 5번의 제낌기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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