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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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고운기 지음, 현암사
17주차 (7/24~7/30)
티올(윤정욱)
1. 작가 분석
가. <탑상> 편에는 강원도 오대산과 월정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자주 언급 된다. 왜 일까?
1206년 생인 일연은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1219년 출가를 하게 된다. 그의 나이 14세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22세에 승려들의 과거 시험인 선불장에 나가 합격할 때까지 이 절을 떠나지 않았다. 저자(고운기)는 14세에서 22세에 이르는 호기심 가득한 청소년기를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온전히 보낸 일연이, 자기가 살았던 곳 주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간직했던 흔적을 『삼국유사』 곳곳에서 보았다고 한다. 월정사에 대한 일연의 기록이 상세한 이유 역시 그러한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나. 일연과 어머니 (일연에게 어머니란 어떤 존재였을까?)
세상 사람 모두에게는 단 한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머니의 존재다. 일연도 마찬가지였다. 14살의 어린 아들을 출가시킨 일연의 어머니는 일연이 일흔을 넘은 나이로 고향 땅으로 돌아 왔을 때까지 살아있었다. 삼국유사 곳곳에 어머니를 향한 그의 마음을 슬며시 드러나는 부분을 볼 수 있다.
(469) 개인사의 그늘에 놓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삼국유사는 때로 일연의 생애와 견주었을 때 보다 맑게 이해되기도 한다.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向念)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69) 그것은 앞선 장춘과 그의 어머니 보개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아들을 찾고자, 애끊는 마음을 부처님 앞에 가 빌고 비는 어머니는, 다름 아닌 일연과 그 어머니의 대역(代役)들이다.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287) 신라의 멸망 원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 했다. (중략) 수도인 경주가 통일 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288) 그러나 돌이켜 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è 개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가진 재능과 열정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면 에너지는 결국 소모 되고 말 것이고,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고 또한 반복되는 상황이 익숙해 질 무렵에는 그 옛날 신라가 멸망했던 것처럼 개인의 인생도 그 빛을 다하게 될 것이다.
(325) 이론의 왕실이 보다 튼튼한 체계를 갖춘 것은 역시 나라 시대였다.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이고 드디어 자신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시대, 이 때를 아스카(飛鳥)문화라 한다.
(325) <신당서>의 제 220권에 나오는 <동이전> ‘일본’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이 내용을 <신라본기> ‘문무왕’ 조 10년에 전재해 놓고 있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최초 사용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대목이다.
(327) 서동은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실현 가능성 없다는 이 일을 돌파할 꾀가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 서동요 발췌
선화공주님은
남 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밤에 알을 품고 간다
(332)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338) 이야기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쪽에 서다 보니, 삼국시대 말기에 발전하는 불교의 미륵 사상과 관련시켜, 서동의 선화공주 빼앗아 오기를 미륵보살 쟁탈전으로 해석하는 재미있는 견해도 나왔다.
(364) 가락국기는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史料)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372) 노래에서는 맞이하려는 대상을 거북이로 상정하고 있다. 이 거북이는 용으로도 바꿔볼 수 있다.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이는 왕왕 용의 다른 모습이거나 똑 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 신성한 동물의 하나다. 그러나 존대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378)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航海)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苦海)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흥법 (興法)]
(385)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부의 『삼국유사』는 완연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일, 탑과 절을 만든 경위, 고승들의 전기 등이 누벼지는데, 일연 자신이 승려 출신이기에 그랬을까, 전반부에 비할 때 이야기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인용한 책도 다양하다.
(386)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389) 고구려에 첫 승려가 온지 꼭 12년 뒤, 백제에도 중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러 온다.
(391) 찬(讚)이라고 하는 『삼국유사』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시들이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처음이 먼 길을 걸어 또는 세찬 바다를 헤치고 이 땅에 이른 순례자들을 위해 바치는 헌시다.
(402)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왜 그랬는지 그 기준은 『삼국사기』와 비슷할 터이나, 한 가지 추가한다면 불교역사주의적 의식이 작용했다는 점도 앞서 지적했다.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 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13) 백제에 비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도교를 신봉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가 쇠퇴해진 데 대한 아쉬움이 컸겠지만, 굳이 그것만으로 이유를 댈 수야 없다.
(414) 고구려의 후반기에 도교가 번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적는 일연의 태도는 현저히 불굥롸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입장이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 것 때문이라는 결론에서 그 의도는 명백해진다.
(415) 삼국의 흥망을 불교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려 했던 일연의 태도는 의천의 이 같은 입장과 더불어 결론 내려지고 있다.
[탑상 (塔像)]
(417)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421) 『탑상』 편은 기본적으로 탑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부분이고, 거기에 경전과 사리가 추가된다.
(424)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라가 가진 불국토사상 또는 본지수적사상이라 부른다.
(428) 불교미술사학자들은 불상의 출현을 서기 1세기경 쿠샨 왕조 때로 보고 있다. 석가모니 열반 후 500여 년이나 지났을 무렵이다.
(434)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 중 두 가지에 해당된다. 나머지 하나는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옥대다.
(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저 유명한 『화엄경』의 이야기에서, 문수 스스로 남쪽을 두루 돌며 깨닫고 동쪽으로 오는데, 거기서 만난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 데 부모라고도 한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리라.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로 이런 문수 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49) 문수보살은 매일 아침 서른여섯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45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475)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 :
(481) 자비롭고 희생적인 어머니의 정성과 같은 성격을 가진 이가 관음보살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 더욱 강화된 생각이라고 한다.
(481) 박박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어, 어떻게 된 일인지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눈에 씌운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먼. 그대는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이루었네. 바라건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만 말아주시게. 부디 함께 가야지?”
è 깨달음은 부득이 얻고, 박박은 무임승차를 하려는 것인가?
(496)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기거서 우연히 스치는 수 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è 깨닫는 과정도 치밀하고 항상 준비가 철저해 보이는 의상대사 보다 다소 미숙해 보이지만 인간미가 있는 원효대사의 그것이 더욱 마음에 끌린다.
(499) 굴산사가 있는 지금의 명주군 국정면 학산리는 다름 아닌 범일의 고향이었다. 여기 재궁마을의 우물가 학 바위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 여자는 표주박에 해가 담긴 물을 마시고 와서 잉태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이다.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505) “조신의 꿈” 가운데서,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è 승려 조신이 강릉 태수의 딸을 보고 반해 그 사모하는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다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그 꿈 속에서 태수의 딸과 50년을 함께 살다가 마지막에는 곤궁한 삶과 근심, 고통으로 인해 아내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다 선잠에서 깬 조신은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일연의 그의 마음을 한 편의 시로 대신 표현하게 된다.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이처럼 우리네 인생의 덧없음을 꿈으로 나타낸 설화는 많다. 본문에서 소개 된 한단지몽(邯鄲之夢)이 그렇고, 당나라 전기소설 가운데 하나인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역시 유사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주제는 눈 앞에 놓인 현실을 살아내기에도 버거워 하는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고,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의해 (義解)]
[신주 (神呪)]
[감통 (感通)]
[피은 (避隱)]
[효선 (孝善)]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가. 왜 왕력(王歷)은 빠져있는지?
삼국유사의 시작은 역대 왕들의 순서를 약술한 왕력(王歷)으로 알고 있는데, 고운기의 삼국유사에는 왕력에 대해서는 빠져있고, 처음부터 기이(紀異)에 대한 기술로 바로 이어진다. ‘들어가는말’에 간략히 언급은 되어 있지만, 상세하게 별도의 장으로 구성을 해서 언급을 해 두는 편이 나을 듯 하다.
나. 각 장 별 본문에서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음
# <흥법 (興法)> : 불교적 성격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일, 탑과 절을 만든 경위, 고승들의 전기 등)
# <탑상 (塔像)> : 탑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 모음 (경전, 사리 관련 내용 추가)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 간의 관계를 한정지음 (?)
나.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의 전파와 발전의 관점에서 바라 봄 (?)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무엇이 달라졌는가?)
일연은 자신 이전에 삼국의 역사를 풀어 쓴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떠한 내용은 사기를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내용은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다. 또 어떠한 내용은 사기의 내용을 차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생각을 드러낸 부분도 있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하나 만을 읽거나 그 둘을 따로 읽는다 하여도 그 둘의 차이를 일반 사람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러한 수고를 저자(고운기)가 대신해 주었다. 본문 413페이지를 보자.
① 고구려 말 무덕과 정관 연간에 나라 사람이 다투어 오두미교를 믿었다
② 당나라 고조가 이를 듣고 도사를 보내서..
③ 다음 해,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불교와 노자를 배우겠다고 하자, 당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를 인용했다고 하나 여러 군데 일연의 손질이 가해졌다. 특히 ①은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이다. 일연이 붙인 것이다. 삼국사기가 먼저 있고, 나중에 일연에 의해 삼국유사가 지어졌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째, 더해지고 빠진 내용을 통해 일연이 삼국의 역사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김부식과 일연이 고려 전체의 시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15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고려가 어떠한 시각으로 삼국의 역사를 바라보는지 가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연에 의해 더해지고 빠진 내용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저자(고운기)의 시각을 지켜볼 수 있다. 고구려의 후반기 무렵에 대해 일연은 어떻게 평가 했는지 저자(고운기)의 시각이 이러하다.
(414) 고구려의 후반기에 도교가 번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적는 일연의 태도는 현저히 불교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입장이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 것 때문이라는 결론에서 그 의도는 명백해진다. (중략) 삼국의 흥망을 불교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려 했던 일연의 태도는 의천의 이 같은 입장과 더불어 결론 내려지고 있다.
나. 찬(讚), 삼국유사의 백미
삼국유사의 백미 가운데 하나로 나는 찬(讚)을 꼽고 싶다. 본문 곳곳에는 일연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찬(讚)이 소개되었다. 찬(讚)은 삼국유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까?
첫 째, 대개는 노래 또는 싯구로 표현되어 있는 찬은 전체적인 삼국유사에 생기를 불어 넣는 역할을 한다. 일부의 찬은 압운이나 운율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다.
둘 째, 우리는 이 찬(讚)을 통해 해당 시대에 발생한 사건과 등장인물에 대한 일연의 평가를 엿볼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아래는 찬(讚)에 대한 저자(고운기)의 평가를 살펴보자.
(486) 일연이 쓴 찬시 속에서 이런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또한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 한시, 민요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 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다. 현장감 있는 사진 구성
현장감 있는 사진들 덕분에 본문을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양하고 현장감 있는 사진과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고생했을 작가(양진)의 수고가 눈에 선하다. 덕분에 책을 보면서 저자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가. 백제와 고구려 분량 추가 확보 가능한지?
삼국유사의 원문을 보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고운기 저자의 삼국유사에서 신라에 대한 언급의 비중이 80% 이상이고, 백제와 고구려는 각각 10%가 채 되지 않는 듯하다. 이 부분에 대한 아쉬움은 저자(고운기) 스스로도 본문에서 밝힌 바가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원문도 이렇게 편차가 심한지 확인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분량도 더 늘리는 편이 좋을 듯 하다.
나. 왕위 계승도 별지 구성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 왕위 계승에 대한 별도의 표가 없어서, 별도의 자료를 통해서 대조해가면서 본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통일 신라의 경우도 왕위 계승도가 138p (신라 중기), 218p (통일 신라), 274p (신라 후기)에 각각 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것 역시 통일 된 느낌은 적다. 또한 고대 왕국 성립 초기의 왕위 계승도에 대해서는 삼국 모두 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워 아쉬웠다. 왕위 계승도에 대한 자료가 별지로 구성되어 있으면 본문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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