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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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세계적인 여자가 되라는 뜻의 세희(世姬)야"
때는 1987년 내가 중 1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짝 세희는 소위 부잣집 딸이었다. 성북동에 위치한 동구여중은 ‘꿩의 바다’가 있는 부촌 아이들과 시(詩) ‘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이 되는 달동네 아이들이 함께 다니는 곳이었다. 세희의 집은 1층이 전면유리였는데 "꿩들이 자꾸 유리창으로 날라와서 머리 부딪혀서 죽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망 좋은 저택이었고 80년 대였음에도 차가 있고 기사님까지 계셨으니 상당한 부자였던 셈이다. 그래도 당시엔 딱히 위화감 없이 잘 지냈다. 세희와의 교집합은 책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쓰는 아이였다. 곧잘 전날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세희를 통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엊그제 일같다. 그렇게 나에게 세희는 책 많이 읽고 글 잘 쓰는 부잣집 딸로 기억되어 있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잘난 척 하지 않고 친구들을 두루 사귀었던 아이. 이후 그녀는 외고를 가고 나는 일반고를 갔다. 같은 동네이니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이후엔 어떤 간극때문이었는지 몇 번을 우연히 만나 연락처를 주고 받아도 자꾸만 만남이 끊겼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4살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는 어느덧 40대의 중년여성이 되어 있었다.
<논어>를 읽던 어느 날이었다.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는 글귀에서 눈길이 멈췄다. ‘마흔이나 쉰이 되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 과연 40대에 접어 드니 한 영역에서 나름의 성취를 한 친구들은 여기 저기서 그 이름이 들려오긴 했다. 문득 세계적인 여자, 세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나서 검색을 했고, 세희가 현재 <맘앤앙팡> 편집장이고 육아 관련 책도 몇 권 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육아서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는 나는, 단지 그 친구를 글로 만나기 위해 그녀가 쓴 <엄마생활백서>라는 책을 주문하였다. 한 줄 한 줄 읽으며 그녀의 30여 년 인생을 업데이트 하였다. 사실 그녀가 전달하는 육아관련 정보는 나에게는 큰 의미는 없었다. 다만 육아를 언급하면서 그녀의 인생이 함께 이야기 되기에 그 지점에서 나는 책을 통해 그녀와 수다를 떠는 기분을 가지게 되었다. ‘너, 여전히 글 잘 쓰는구나.’ 그렇게 타고난 재능을 살려 40대 편집장이 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가 괜히 만족스럽고 뿌듯했다.
또 다른 인연 이야기. 시공간적 배경은 동일하게 성북동 동구여중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성북동 비둘기’로 알려진 산동네와 ‘꿩의 바다’로 알려진 부자동네가 공존하는 성북동. 이 아이들이 함께 다녔던 동구여중. 빈부의 차이가 그렇게 컸음에도 우리는 정말 빈부개념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순수했을까 싶다. 비둘기 동네에는 판자집이 많았다. 친구네 판자집에 갔을 때 아빠와 오빠가 집을 지었다는 말에 “우와! 너희 아빠랑 오빠 손재주 좋으시다!”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들 사이에는 위화감이 없었다 해도,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았다. 잘사는 집 아이들과 못사는 집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차별은 매우 심했다. 억울하다고 생각되면서도 그 땐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그런 곳에 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국어 선생님이 오셨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그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교과서가 아닌 그런 책을 선생님은 더 많이 읽어주셨다.
1989년에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전교조니 참교육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국어 선생님이 전교조 교사라는 소문이 돌았고 교장 선생님 눈 밖에 나서 곧 잘릴 것이라는 말도 들렸다. 세월이 30여 년 조금 안되게 흐른 어느 날, 그 때 그 선생님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떠도는 가난한 시인이 되셨을까. 현실에 적응은 못하셨을 거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의 성함을 검색해 보니 이게 왠걸. 책을 7권이나 내신 현직 국어교사라니!
유동걸 선생님. ‘토론의 전사’라는 책 시리즈와 함께 토론교육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현직 국어교사로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떠돌이 시인 또는 낭인을 짐작한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인 동시에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한 모델을 보고 있다는 기쁨에 전율했다. 그렇게 경계에서 흐르는 캐릭터답게 최근 발간한 선생님의 책 제목은 <헤르메스적 글쓰기>이다.
연락이 단절되었던 30여 년이라는 공백 덕에 유동걸 선생님의 처음과 지금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첫 교사생활을 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 학생들을 경제적 배경이나 학업성적으로 차별하지 않았던 그 때의 초심과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토론’이라는 키워드로 국어교육의 현실에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얼마 전 선생님을 뵈었다. 30여 년만의 만남인 것이다. 10대였던 나는 40대가 되었고, 20대였던 선생님은 50대가 되셨다. 당시 소문대로 선생님은 곧 동구여중을 떠나셨다고 한다. 참교육을 실천하려는 과정 속에서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그 시련을 잘 핸들링 하면서 타협도 배척도 아닌 현실과 매끄럽게 손 잡는 법을 터득하셨다고 한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알려주었던 세희, ‘꽃들에게 희망을’을 알려주셨던 유동걸 선생님. 중학교 시절의 두 인물은 세월이 흘러도 휘발되지 않는 자신의 재능과 관심사를 가지고 이제는 어엿하게 자신의 이름을 건 책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세월이 담긴 책 한 권. 아니 책 몇 권이 나를 반갑게 하고 또 한번 자극한다. 나 역시 내가 생각하는 가치에 나의 재능을 더한 책을 내어 내 이름과 인생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인생의 중반에서 내 이름을 알리자. 명함이 아닌 책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아. 무엇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상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일상이 내 책의 페이지가 될 것이기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