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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연구
고운기
1961년 전남 벌교
출생. 시인이자 국문학자다.
그는 <삼국유사> 전문가로 가장 유명하다. 20년 넘게 <삼국유사>를 연구하며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재조명해서 10권 가까이 관련 책을 저술했다. <삼국유사>만 갖고 쓸게 뭐가 그리 많을까 싶은데, 단순 번역서 (<삼국유사>, 홍익출판사
2001), 원작자인 일연의 전기(<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일연을 묻는다>)부터 해서, 자신만의 해설서(<길 위의 삼국유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다른 유명인을 이용한 해설서(<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에 이를 이용한
글쓰기 책(<삼국유사 글쓰기 감각>)까지 알뜰하게
뽕(?)을 뽑은 느낌이다.
하지만 고운기는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이라는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6권의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다. 6번째 시집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가 꼭 한달 전 (2017.06.30)에 출간되었다. 그가 <삼국유사>를 통해 고대의 인문과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전개한다면, 시를 통해서는 서정과 서사가
유기적으로 겹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에서 역시 풍요로운 서사와 문화적 콘텐츠를 새롭게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해서 우리 문화의 연속성과 확장성
규명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삼국유사>에서 빌려
온 작품들을 선보여서 고전의 상상력에서 다양한 서정적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그가 지닌 시적 감각이 단순히 타고 난 것이 아니라 고전문학 연구자로서
현대시를 쓰는 과정에서 얻은 성찰과 균형감각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시집 전반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운기의 지인들은 그를 ‘저평가
우량주’라고 아쉬워한다고 한다. 그가 <삼국유사> 권위자로 너무 유명해서 상대적으로 시인으로서의
능력은 저평가되고 있음을 아쉬워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서정시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지나치게
규범적인 서정시법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화려한 수사나 꾸밈, 과장된
감상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도 서정시의 영역을 지켜내고 낭만적 서정주의자로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유사>를 가지고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까와 함께 그가 쓸 다음 시들도 기대된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385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것을 다루는 일연의 태도는 뭔가 자신감에 차
있다. 보고 들은 것과 몸소 체험한 것이 일체를 이루는 부분이기에 그랬으리라. 보고 들은 것과 체험한 것을 쓰는 것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386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젼래 경위만이 아니라 일연이 가진
역사 의식의 일단을 읽게 된다. 지난주에 앞 부분을 읽으면서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자처하는 “고려” 시대의 일연이 왜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썼는지 의아했었다. 이런 이유에서였구나. 이제 이해가 된다. 고려의 국민이기도 하지만 승려인 일연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389 이 기록으로 놓고 보건대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잠시 뒤에 소개할 신라와 비교한다면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어떤 이유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지닌 대륙적 기질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라고 해서 민간 신앙이 없었을 리 없고, 4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것이 나름대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큰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394 신라는 앞선 두 나라에 비해 불교를 만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우람한 줄기에 무성한 가지를 뻗는 나무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렇듯 신라에 불교가 자리잡기까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신라의 불교 부흥을 보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의 전래라는 게 원래 그런건가 싶기도 하다. 그
후 천년이 지난 후에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을 때의 “탈”을
비교해 보면 불교가 정착하기 까지의 탈은 별로 탈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399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 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信佛)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405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는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지.”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단다’는 표현은 셰익스피어만 했는 줄 알았는데, 이런 글을 <삼국유사>에서
볼 줄이야. 어떻게 저런–나의 살을 베어 새 한 마리를 살리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406 이미 몸을 버리기로 한 순교자의 절개는 눈물겹거니와, 이를 말리는 왕의 애정 또한 깊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단다’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시비왕이 고행을 할 때였다. 메추라기가 매에게 쫓겨 시비왕의 품으로 들어왔다. 왕은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매에게 먹였다. 정녕 법흥왕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417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417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근래에 경주를 자주 갔지만 거의 보문호수 근처에서만
머물렀다. 기껏 유적지라고 갔던 곳이 불국사나 석굴암 정도다. 앞으로도
경주는 자주 갈 것 같다. 다음 번에 갈 때는 보문호 둘레만 달리고 올 것이 아니라 여유있게 가서 황룡사
터에 가서 잠깐 누웠다 와야겠다. 424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라가 가진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 또는 본지수적사상(本地垂迹思想)이라 부른다. 425 그러나 아쇼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 나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도대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해야
잘생긴 사람들을 죽이는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을까? 나도 외모에 콤플렉스 있어봐서 그 심정 잘 알겠고, 열등감이 나의 성취의 원동력이라 할 정도로 열등감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 이건 너무 심했다. 433 이 때 이미 황룡사의 금당에는 장륙존상이 모셔져 있었다. 황룡사의 착공이 553년, 완공이
569년 그리고 장륙존상의 조영이 574년이다. 인도 모델의 불상 앞에 중국 모델의 탑이 서려는 순간이다. 절은
본디 왕궁으로 쓰려고 지었던 화려한 건물, 그야말로 신라 건축 문화의 총합이 여기 있다. 그러나 신라의 기술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신하들이 백제의 기술자를
불러오자 해서 아비지(阿非知)라는 이름난 기술자를 정중히 초청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왕비의 말에 따라 백제 무왕이 만들었다는 미륵사를
떠올리게 된다. 왕비는 다름 아닌 선화공주, 진흥왕의 딸이요
선덕여왕의 누이다. 이 때 이미 무왕은 죽고 난 다음인데, 미륵사와
그 탑을 만들어 본 경험을 가진 백제는 그만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고, 신라와 백제의 왕실이 가장 가까운
인척 관계를 맺고 있을 때니만큼, 불탑을 만들자는 일에 그만한 부탁쯤이야 들어 주었으리라. 434 어쨌거나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황룡사에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그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을지라도 그 터만이라도 정말 꼭 가봐야겠다. 434 이에 올라 보라, 어찌
구한(九韓)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평화로움을 깨닫겠네 라고 노래한다.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역시 큰 사람은 다르다.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452 들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쐈다.
그 중 한 마리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리고 가 버렸다. 거사가 그 깃털을 집어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이 모두 짐승들로 보였다. 그런 까닭에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 눈에 대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는 학의 깃털은 곧
그를 출가로 이끄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 깃털의 진짜 주인은 오대산의 다섯 성중이요, 그 가운데서도 문수보살이었으리라. 처음부터 그에게는 문수보살의 계도(계도)가 걸려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여기서도 짐승을 먹기 위해서 죽이는 대신에 본인의
살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나 짐승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야 자신의 살을 벨 정도가 될까? 나도 짐승의 고기를 안 먹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살을 벨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절대 안 든다.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455 나는 사실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와 가까워진 것은 전적으로 <삼국유사> 연구
때문어었는데,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聖所)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경우,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도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그리고 나는 <삼국유사>
연구 같은 특별한 이유도 없지만 절을 좋아한다. 절에서 나는 향 냄새도 좋고 옛집 같은
포근한 느낌도 좋다. 마치 오래된 성당에 들어갔을 때의 편안함 같은 느낌이 오래된 절에 갔을 때도 느껴진다. 나에게는 성당도 절도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성소(聖所)의 역할을 한다. 462 장춘은 바다로 다니는 상인을 따라 나갔다가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어머니가 민장사의 관음보살 앞에 가서 7일 동안 힘껏 기도를 드렸더니
장춘이 홀연히 이르렀다. 그간의 일들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큰바람을 만났지요.
배가 깨져 같이 탄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오지 못했는데, 나는 작은 판때기를 탁서 오(吳)나라 해변에 이르렀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저를 델다 들판에서 밭을 갈게 했지요.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 온 것 같은 이상스런 스님이 나타나 위로해 주시더니, 나를
데리고 함께 갔습니다. 앞에 깊은 도랑이 나오자 스님은 나를 옆구리에 끼고 건너 뛰었구요. 어둑어둑한 사이에 우리 마을 말씨와 우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습니다. 살펴보았더니
벌써 이 곳에 도착하였어요.” 471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2000년 가을, 중동의 예루살렘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다시 벌어졌었다. 그 현장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이 머물렀던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에
두려워 떨고 있는 한 소년과 소년을 지키려고 온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 그러나 사격을 중지해 달라는
아버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결국 배에 총을 맞고 아버지의 품에서 숨져가는 소년을 보았을 것이다.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굴정현의 꿩 모자가 마치 소년 부자의 이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 꿩 식구들을 살린 조상을 가진 후손으로 우리는 그나마 착한 사람들일까. 그러게. 도대체
신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짓을 다른 사람들–자신의 형제라고 불러 마땅한–에게 하는 걸까? 제발 신의 이름을 붙여서 자신들의 악행을 정당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72 어느 날,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나이 스물에 가깝고 얼굴이 아리따운 한 낭자가 산중 박박의 처소를 찾는다. 그러면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한다. 박박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여자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낭자는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부득의 처소를 찾는다. 부득은 머뭇거리면서 이 밤중에 어디서 오는가 묻는다. 부득은 “이 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마저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오”라고 말하며 여자를 들인다. 게다가
부득은 여자를 자고 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밤이 깊어 여자에게 산기(産氣)가 있자, 이 난처한 경우에도 정성스레 시중을 들어 준다. 이 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지극해서’ 였을 뿐이다. 그런데 낭자의 출산을 위해 준비해 준 목욕물이 금빛으로 변한다. 낭자는
스스로 자기가 관음보살이라 밝히고, 스님의 대보리가 이뤄지도록 돕겠다고 말한다. 간밤 계를 더렵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부득의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역시나 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생명도
사랑할 줄 아는 것 같다. 생명을 중히 여겨 벌레도 안 잡는다는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자신의 수행에 해가 된다며 내치는 모습이 참 모순적이다. 수행해서 혼자 도를 깨치면 뭐하나. 478 날 저문 산길에 가는 곳마다 사방이 막혀 있네 소나무 대나무 숲은 사방이 막혀 있네 골짜기 시냇물 소리는 낯설기만 한데 자고 가기를 바라는 것은 길을 잃어서만 아니요 스님께 계율을 일러 주려 함이네 내 청을 들어만 주실 뿐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마오 ~ 부득과 박박이 갈라지는 극명한 지점이다.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敎條的)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부득은 여자를 암자 안으로 맞아들여 머물게 했다. 밤 깊도록 맑은 마음을 지키며 등잔불 아래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웠다고, 일연은 조심스럽게 쓰고 있다. 481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 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현신인지도 모른다. 485 아무리 급박하다지만 출가승이 암자 안에 젊은 여자를 들여놓는다는
것은 여간한 결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계를 저버렸다는 오해의 소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면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참 보살행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수순중생(隨順衆生)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부득의 행위는 이 같은 참 보살행의 소치임이
분명하다. 유혹을 끊고 면벽수행을 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참 보살행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뭐가 중요한지 아는 것.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렵다. 너무 어려워서 나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응원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을 키우자. 낙산사의 힘 496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497 나는 이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 명명하였다. 이런 만남은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이다. 더러 이 이야기를 가지고 의상이 원효보다 한 수 위라거니,
의상 계통의 후손들에게서 제 스승을 원효보다 더 낫게 보이려고 만들어진 이야기라거니 설왕설래(說往說來)한다. 그러나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에 늘 원효를 배치하는 일연의 일관된 기술을 염두에 둔다면, 누구를 편들거나 깎아내리자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무릎을 칠 일, 거기서 애석해 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위기, 원효는 그렇게 인간답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더 나아간다면, 이런
정도?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 의상과 원효의 일화를 읽고 원효가 더 진정한
깨달음에 근접한 승려라고 알고 있었는데… 의상은 그 보다는 뭔가 원칙주의적이고 본능적으로 깨닫는다기
보다는 배워서 깨닫는 승려? 그런데 이런 해석도 가능하구나. 어쨌거나
원효는 동네 아저씨 같은 재미있고 매력을 지닌 분. 그건 맞았던 것 같다. 504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邯鄲之夢),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따듯한 불을
쬐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 사는 온갖 영고성쇠(榮枯盛衰)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나는 많은 꿈을 꾸지만 일어나면 대부분의 경우,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한단지몽까지는 아니더라도 긴 시간(몇 년 정도)을 너무 생생하게 경험하고 오는 일이 있다. 그런 꿈을 꾼 날 잠에서 깨면 너무 생생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무섭기도 할 정도다. 그러나 “한 세상 사는 온갖 영고성쇠(榮枯盛衰)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깨달음은 없다. 타고나는 건가 보다. 507 희미한 등불만 빛을 토하는데 밤은 완연 깊어 있었다. 아침이 되어 수염이며 귀밑머리가 하얗게 샌 것을 알게 되었다. 망망히
세상사는 뜻이 없어지고, 이미 수고로운 인생에 지쳐 마치 백년 고생을 다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이 얼음 녹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잠잠히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회하는 마음 끝이 없었다. 508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다행이다. 나만
그런건 아닌가 보네.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523 “육재일(六齋日)은 봄과
여름에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때를 가림이다. 기르는 동물
곧 말, 소, 닭, 개를
죽이지 않는 것과, 자잘한 동물 곧 한 번 저미지도 못할 것을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대상을 가림이다. 이 또한 오직 필요한 만큼만 하고, 너무 많이 죽이지 말아야 하리니, 이것이 세속에서 좋은 계이다.”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535 궁궐의 관리가 원효를 찾아 나섰다.
이미 원효는 남산에서 내려오다 문천교를 지나는데, 관리를 만나자 거짓으로 물 속에 떨어졌다. 위아래 옷이 몽땅 젖었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
압히고 빨아 말리게 하였는데, 그러자니 자고 가게 되었고, 이어
공주는 태기가 있었으며, 설총(薛聰)을 낳게
되었다. 역시 매력이 넘치신다. 537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한 이후 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불렀다. 어느 날 우연히 배우들이 가지고 노는 커다란 박을 얻었는데, 모양이
괴이하여 그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었다.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지 길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無碍)라 이름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모든 마을 모든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다녔는데, 노래로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를,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짓는
옹기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 538 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이런 원효였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잘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 아니었을까? 너무도 훌륭하지만 저자가 말한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란 게 이런걸까? 나는 원효처럼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너무 큰 사람보다는 오히려 성실하게 노력하고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는 의상이
오히려 인간적이어 보인다. 541 태어나지 말 것을, 죽음이
괴롭구나. 죽지 말 것을, 태어남이
괴롭구나. 의상, 화엄의 마루 551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565 선묘를 의상이 다시 만난 것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서였다. 등주의 선묘 집을 찾자 그녀는 단 앞에 무릎을 꿇고 일심으로 합장 공경 예불하고 있었다. 의상은 선묘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만 보다 발길을 돌린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선묘는 선창가로 달려나가 보지만, 배는 이미 떠나고, 멀리
의상의 모습은 아스라하기만 하다. 이 때 선묘는 몸을 바다로 던진다.
그런데 순식간에 용으로 바뀌어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해 신라까지 이르렀다. 왜 몸을 바다로 던졌을까? 안타깝다… 했는데, 용으로
바뀌어 의상을 호위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용이 될 걸 예감하고 바다에 뛰어들었을까? 568 국난을 구하고, 부석사
같은 큰 절을 지으며 화엄종을 전한 의상의 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불도(佛道)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이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법사란 말속에는 의상의 교조적 신앙 태도가
함의된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가장 좋은 그리고 쉬운
방법은 유혹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예전에 다니던 성당 신부님이 말씀하셨었다. 젊은 분이었는데 주변에서 유혹, 특히 이성에 대한 유혹을 어떻게
이기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본인의 의지를 믿고 유혹을 가까이 해서 시험에 들게 놔두는 사람들도
있다. 유혹을 이기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의지력을 과신하는 바람에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원효처럼 얽매이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 무리에 섞여 살면서 깨달음을 얻고 전파하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동네 아저씨 같은 원효보다 의상이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569 나는 아직 인도에 가 보지 못했다.
다녀온 사람들을 통해 귀동냥이나 하며 막연히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귀동냥 가운데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다. 인도의 자연과 인도인의 성품에서 강렬하게 인상을 받는 그 천연스러움 또는 한가로움
같은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의 충격, 아니 그보다
더 심한 한반도의 살아 있는 액션 영화만 보다가, 오히려 그 정반대의 상황이 역으로 충격적이었다고들
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것만 일까 싶었다.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화보다 저 세상의 부귀를
더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지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그렇지만 거기라고 사람 사는 세상인 바에야 왜 호사를 바라지
않고 다툼이 없겠는가 의문스러워 해본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목적으로 혹시 그렇게 길들여
놓지나 않았을까? ~ 다만 한 가지, 힌두
문화라는 큰 틀에서 그것이 길들여진 것이건 아니건 지금 그들이 사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거기
부러운 부분이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와 정말로 달리 사는 모습에 대한 문화적 충격이었으리라. 우리가 지금
너무 모질게 살고 있어서 그것은 더욱 선명했겠고. 나도 인도에 아직 가보지 못했고 가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다. 내가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인도도 가봤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만큼 인도가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여행지여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왠지 나는 인도가 끌리지 않는다. 아마도 저자가 말하는 이런
이유에서인 것 같다. 인도에서, 특히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서
화장하는 걸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깨달았다거나 뭔가 느꼈다는 사람들을 보면 공감이 가기 보다는 거부감이 더 느껴진다. 그냥 그렇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590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길가에 삼이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 캐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은이 널려 있었다. 한 사람은 삼베를 버리고 은으로 바꾸어 들었다. 또 가다 보니 금이
널려 있자, 은을 들고 있던 사람은 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처음의 삼베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들고 돌아왔다. 좋은 것을 보고도 취하지 않는 바보스런
사람을 비유한 이야기다. 내 얘기 같다.
아무래도 나는 미련하게 삼베를 그대로 끝까지 들고 돌아올 것 같다. 597 진표는 금강산의 발연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효도를 다하다 세상을
뜬 것으로 되어 있다.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제자들은
그 시신을 옮기지 않고 뼈가 모두 삭아 내릴 때까지 공양했다. 거기에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푸른 소나무가 생기더니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마르고 다시 한 그루가 자라났다. 뒤에 또 나무가 나오니 그 뿌리는 하나였다. 601 샘은 없었다. 아니 본디
있기는 있었다고 했다. 절에서 만난 스님 한 분은, 수도가
들어오자 샘은 빨래터로 전락했고, 얼마 안 있어서 그나마 절 안팎에 콘크리트 포장을 하면서 묻어 버렸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했다. 사실 그 샘이 일연이 보았다는 그것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닐 가능성이 더 크지만 자리는 분명 그 자리일테고, 샘은 이 절이
생겨난 유래와 성격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물이다. 없던 것도 만들어 놓을 바에 있는 것마저 없애
버린 처사가 무작스러워, 속으로 ‘점찰법회 자리에 웬 약사여래람?’ 이렇게 중얼거리며 산을 내려온 적이 있었다. 아는 사람에게는 이게 얼마나 무식한 짓인지 기가
막히겠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불편하고 이제는 쓸모 없는 샘일 뿐이었겠지. 저 샘뿐이 아닐
거다. 저런 식으로 파괴된 유산들이 너무도 많겠지만 어디까지 보존하고 어디부터는 새로 개발해도 될는지
의문이 생긴다. 어쨌든 돼지에게 진주목걸이를 주는 바보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나는 진주목걸이를 못 알아보는 돼지는 아닌지 생각해 본다.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607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이렇게 버림받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의 눈 밝은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 619 원원사 터에서 내려오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왔다. 이 책에 실리고 싶었나 보다. <삼국유사> 어디에도 다람쥐 얘기는 나오지 않지만 내가 다시 그리는 <삼국유사>이니 다람쥐의 소원을 들어 주기로 했다. (경주 원원사 터) 재미있다. 이렇게
사람을 따르는 동물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뭔가 상서롭지 않기도 하고 그렇다. 정작 다람쥐는 제 갈
길을 간 것 뿐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이 책의 재미 중의 하나.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623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불쌍한 어린 아이에게 베푼 덕이 곧 내게 해준
일이라고,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에게 말한다. 아마도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위로하자는 차원의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625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에
의해 만들어진 미타사의 예불에 욱면이라는 여자도 참가한다. 그런데 그 집 주인 귀진은 자기 종이 함께
나와 있는 것이 못내 못마땅한 표정이다. 일거리를 잔뜩 주고는 하루 안으로 마치라 해놓고 자기는 절하러
절에 간다.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얄궂은 성격이
너무나도 잘 묘사된 대목이다. 있는 사람들이 노블레스 오블레쥬는 커녕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누기 싫은 심술궂음이 밉살맞고 꼴보기 싫다. 그런데 참 익숙한 풍경이다. 나도 많이 그랬던 것 같다. 마음의 크기를 좀 키우면서 살자. 627 하늘에서 내린 소리 부처를 이루게 했네 손바닥을 줄로 꿰어 육신을 잊었으니.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629 밤마다 몸을 단정히
바로 앉아, 한 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며 염불했지요. 때로
16관을 짓고,그 관이 다 되어 밝은 달빛이 집 안에 비쳐올
때, 그 빛을 타고 가부좌한 채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에 가고자 아니 해도 어디를 가겠습니까? 천리를 가는 사람은 첫걸음부터 알아보는
것이지요. 633 그러나 역시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역시 나는 엄장보다 광덕이 더 끌린다. 이래서 내가 인간미가 없다는 말을 듣는건지도 모르겠다.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651 “호랑이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해쳤으나, 좋은 처방으로 잘 이끌어 주어서 그 사람들을 치료했다. 짐승이라도
인자한 마음씀이 저와 같으니, 이제 사람이면서 짐승만 못한 이들은 어찌하리.” 652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살펴보자. 절에서 탑돌이를 해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죄악을 징벌하려
하자 스스로 대신했으며, 신이로운 처방을 전하여 사람을 구했고, 절을
세워 부처님의 계율을 가르쳤다. 이는 한갓 짐승이 인자한 성품을 가져서가 아니다. 아마도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내는 여러 가지 방법이고, 김현이 탑돌이에
할 수 있는 한 온 마음을 다하는 데 감동하여 적이 도움을 주려 했던 것일 따름이다. 그 때에 큰 도움을
받은 것이 마땅하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656 “임금께서도 진신석가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많이 들었던 일화인데 신라시대 효성왕의 얘기였구나. 이제는 좀 기억하고 다른 데서 얘기할 때 자연스럽게 써먹어 보자. 656 그렇다면 누가 그 성인을 만나는가?
의상 스님과 같이 치밀하고 정성스런 사람이 만날 것이며 효소왕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가에서 외치듯이 기도하는 무리들을 보고 예수님은 말한다.
“하늘 나라에 이르거든 하느님은 저들을 결코 모른다 할 것이다.” 그리고 첨언하지 않았는가, 골방에 숨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에게 하느님은 다가올 것이라고. 그러나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도 만남은 만남이라고, 나는 설명했다.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효소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부랴부랴 그 뒤를 좇아갔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절을 짓고 공양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우리에게는 더 많고, 또 소중하지 않은가? 663 향불 태우고 부처님 세우며 새로 그린 탱화도 보며 공양 받는 스님네들 옛 친구 부르고 떠들썩하네 이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비치기 더디었다네 667 경흥이 비록 국사라는 높은 위치에 있어서, 말을 타고 다닌들 그다지 흠이 될 일은 아니겠으나, 그 본연의 신분이
승려이므로 스스로 경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다른 관료들처럼 위엄차게 행차하는 풍경은 도저히 덕이 되지
못할 일이요, 그것 하나로 끝나지 않고 무릇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런 데 바탕을 두고 있다면, 진정한 구도자의 길과 사표가 되는 데서 멀어지는 것이리라.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피은(避隱) 숨어 사는 이의 멋 67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慕情)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숨어 사는 일에 대한 생각은 동서양이 다르고, 같은 동양에서도 철학에 따라 다르다. 공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나고, 없으면 숨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숨음과 드러남의 매개체는 ‘도(道)’다. <예기(禮記)>에서는 도가 행해지는 사회를 대동사회(大同社會), 그렇지 않은 사회를 소강사회 (小康社會)라 하였다. 요즘 TV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인이 떠오른다. 복잡한 세상과 인간관계가 싫어서 산에 들어가서 혼자 사는 것 같은데… 방문자가 이틀 뒤에 떠날 때면 그새 정이 들어서 보내기 싫다는 둥, 안
가고 같이 살면 안되겠냐는 둥 한다. 그럴거면 왜 혼자 저러고 사는지 이해가 안 됐었는데… 모든 사람이나 현상을 내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들지 말자. 그냥 뭔가
그들만의 곡절이 있겠지. 686 장바닥에서는 어진 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니 속의 송곳도 한 번 드러나면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그르친 것이지 구름과 산이 깊지 않아서 아니라네.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691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할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는 것이었다. 손순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고 아내더러 말했다. “아이는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잡수실 것을 뺏어버리니, 어머니가 너무 배고파하시는구료. 이 아이를 묻어 어머니가 배부르도록 해야겠소.” ~ 아무리 효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사람을 그것도 자식을 죽여가면서까지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독후감을 쓰는 당사자들이
자식의 입장이어서 그랬을까, 정말로 자신들에게도 죽음으로 해야 할 효도가 온다면 무섭기도 했겠다. 굳이 그것만이 아니라면서, 손자를 죽여 자신의 배가 부르게 된 것을
안 할머니는 어떻게 마음이 편하겠냐고, 넌지시 핑계를 할머니의 마음 쪽으로 돌리는 학생도 있었다. ~ 이미 다 산 목숨, 이제
굻어 죽은들 여한 없을 할머니는 차라리 손자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희생할 마음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순에게는
어머니인 할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오히려 불효가 아닐까? 나 역시 이해가 안 된다. 요즘은 워낙에 내리 사랑이나 자식에게는 당연히 뭐든지 주려하고 잘해서 그렇지 않은 듯 해도 또 반면에 그 반대
급부가 강조되어서 부모와 자식이 뒤바뀐 것 같은 경우도 많다. 뭐든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하자. 701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어머님은 많이 늙으셔서 오직 제가 옆에서 지켜야 합니다. 이 일을 놓고 출가라니요, 어찌 차마 그러겠어요?” “아니다. 나를 위한다고
출가를 못하다니. 그건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이야.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三牢七鼎)으로 나를 모신들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 앞에서 옷과 밥을 빌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정말
내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703 삼뇌는 소, 양, 돼지를 일컫는다. 칠정은 일곱 개의 솥에다 각각 음식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이 둘을 합치면 그지없는 진수성찬이다. 그런 진수성찬으로 대접을 받은들, 아들이 수련에 들어 도에 이르는 것만 못하다는 어머니의 확고한 신념과, 남의
집 문 앞에서 걸식을 해도 좋다는 각오, 그것이 진정을 진정이게 했다.
어쩌면 참된 효도가 무엇이겠냐는 일연의 질문을 담고 잇는 진정의
이야기는, 여덟 살에 어머니 곁을 떠나, 그 어머니가 70년을 홀로 사시도록 이 세상에서는 외롭게만 해 드렸던 자신의 삶에 대한 답변이지 않았을까?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711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712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威儀)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신라 사회뿐만 아니라 요즘도 그런 것 같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 뭐든지 과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게 가장 좋으면서도 어려운 듯 하다. 722 영재는 이 노래를 지어 그들을 조용히 타이른다. 나는 무기 따위를 두려워 않는 사람인데, 그대들도 즐거이 법을 듣는다면
모두 나처럼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도 자랑할 일은 못 된다. 마음의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볼 수 없다는 첫 대목이나, 조그마한
선업을 행하고 자랑이나 늘어 놓으랴는 마지막 대목을 음미해야 한다. 도의 큰 길은 여전히 어려운 법이다. 노래를 듣고 감동한 도적들은 비단 두 필을 내놓는다. 영재는 웃으면서 말한다.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고,
바야흐로 깊은 산중으로 피해 가서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떻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 노래 한 곡에도 감동하는 도적들이나, 한 구비 너머 두 구비까지 내다보는 영재의 깨달음이나, 모두 놀라운
경지에 있다. 그러게 보통 도적이 아니다. 요즘의 도둑들에게 저런 노래를 들려준다면, 아니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깨질지도 모르겠다. 보통 도둑이 아닌걸 꿰뚫어 보고 그런걸까? 정말 모두 놀라운 경지에 있다. 일연, 혼미 속의 출구 725 그러나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역시 일연도 원효나 부득같은 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전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726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회연이라 지어 밝음(明)과 어둠(晦)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名) 다음에 자(字)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 있다. 이름 하나도 그냥 짓지 않았다. 어둠과 밝음이 하나라니. 너무 깊은 진리라 이해가 안 되지만 훌룡한 의미라는 건 알겠다. 733 새로운 시대상을 창출한다는 명제 앞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산문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그 업적을 널리 현창하여야 하는 일이다. 739 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741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는 국가의 변괴를 물리칠 연승(緣僧)으로 부름을 받을 만큼 도와 덕이 높은 승려였는데,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는
모르고 다만 향가를 지을 뿐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승려가 범어로 주문을 외우지 못함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경덕왕도 흔쾌히 받아들였으니, 두
사람이 취하는 이런 태도의 근저에는 신라 불교가 가진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다름 아닌 향가의 대표적인 시인에게서 보이는 이런 태도가
곧 향가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다.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남의 나라 말을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나라말로 향가를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 배울만 하다. 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내가 저자라면 l 목차에 대하여
<삼국유사> 원전의
목차를 그대로 가져왔으므로 저자 고운기가 목차에 끼친 역할은 미미하다. 그냥 이대로도 좋지만 완전히
새로 해석하고 싶었다면 첫번째 편인 ‘기이’ 편을 제일 마지막으로
보냈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기이’를 읽을 때는 책장도 잘 안넘어가고 너무 지루해서 <삼국유사>가 참 재미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후 ‘흥법’부터 재미있어졌다. 나
같은 독자가 끝까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흥미로운 부분을 앞으로 빼는 것은 어떨까? l 보완이 필요한
점 <삼국유사>는 그냥 <삼국유사>로만 썼으면 어땠을까? 물론 <삼국사기>등 다른 책과의 비교나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 등은reference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괜찮지만 그 때문에 책이 길어지기도 하고 내용이 산만해서 읽기 힘들어지기도 했다. 집중력을 높이고 흥미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그냥 <삼국유사>에만 집중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l 이 책의
장점 서사뿐 아니라 사진이 글 내용과 무척 잘 어울리고 아름답다. 저자나 사진작가의 말대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정성들여 찍은 사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책이 아니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는 느낌이다. 경주와 부여, 특히 부여가 가보고 싶어졌고 여기 나온 유적지와 이야기를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와 유적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l 내가 저자라면
원저가 워낙에 긴 책이라 그랬겠지만 너무 길어서 끝까지 읽기가 힘들다. 내가 저자라면 반복되는 내용이나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부분을 드러내겠다. 솔직히 처음에 책 두께만 보고도 압도되어서 그냥 읽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과제가 아니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책이다. 아깝긴 하지만 사진을 좀 빼고 서사를 줄여서 책 두께를 좀 줄여서 먼저 읽고 싶은 책으로 만들겠다. 정말 아깝지만 그래도 겉모습만 보고 질려서 아예 손도 안대는 책으로 만드는 것 보다는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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