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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5일 13시 19분 등록

연극과 화해하기

11기 정승훈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책을 보니 초등학교 학예회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때 반마다 1년에 한 번 학예회라는 걸 했다. 일종의 장기자랑 같은 거다. 학생들이 하고 싶은 걸 정해서 했다. 몇 학년 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연극을 했다. 엄마역할이었다. 왜 엄마는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여겼는지 모르지만 엄마의 한복을 챙겨가서 입었다.

 

 책상을 모아 교실 칠판 앞쪽에 단을 만들었다. 연극하는 아이들은 그 위에서 했다. 엄마의 한복을 입고 대사를 하는 중이었다. 전혀 웃긴 장면이 아니었는데 아이들이 뭐라 하며 웃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손가락질 하는 것은 바로 나의 실내화였다. 실내화가 낡아 여기저기 해져있었다. 한복이 길어 보이지 않았는데 걸으면서 실내화가 보였던 것이다. 누군가 그걸 보고 이야기하면서 웃기 시작한 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사는 하고 있지만 아무도 내 대사에 집중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 분량이 끝나 빨리 내려가기만을 바랬다. 내 역할을 마치고 내려와서도 연극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해야 하는데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라 잊어버렸는지 더 이상 웃지 않았는데도 나의 실내화가 창피했다. 실내화가 해지기 전에 사주지 않은 엄마에게 화가 났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알고 있지도 않을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까지 같이 창피했다. 그 나이또래 아이들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을 텐데, 실내화를 보고 웃은 아이들이 너무도 미웠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면 새 실내화를 사주셨을 거다. 하지만 난 새 실내화를 사달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학예회는 내 기억에 최악의 학예회였다. 이후 학예회에서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연극과 멀어졌다.


 올해 3, 내가 활동하는 시민단체의 상담위원 2기 출범행사가 있었다. 상담을 극화한 퍼포먼스를 한다는 얘기를 담당자에게 들었다. 난 당연히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난 무대에 올랐다. 모든 상담위원이 참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길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웃으며 이렇게 하는 게 더 좋겠다. 여기선 이렇게 하자.’ 의견을 내면서 재미있게 만들어갔다. 나는 어떤 의견도 내지 않고 그저 지켜보며 내 역할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무대에 올라간 이상 주춤거리며 어색하게 하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했다. 반응은 기대이상이었다. 연극 활동을 했던 상담위원이 잘 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저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했어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 말을 들은 그 분이 어쩐지…….” 하면서 모든 사람에겐 연기에 대한 본능이 있어요.”라고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더 길게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원래 긍정적이고 남에게 칭찬을 잘 하는 분이라 그저 립서비스로 한 말일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연극은 그 해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몇 년을 했었다. 그것도 재밌게 했었다.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같은 대부분 동화책에서 본 내용이었다. 대본이랄 것도 없이 동화책 내용을 재현했다. 몸이나 손동작은 어떻게 할지 어디서 나와 어디로 들어갈지 서로 이야기했다. 따로 배운 적도 없는 아이들이 모여서,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한 편의 연극을 만들었다. 연습 장소는 친구네 집이었다. 친구네 집에 가서 연습하며 틀린 동작이나 대사 실수를 보고 뭐가 그리 웃겼는지 배를 잡고 방바닥을 구르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마지막 학예회 때문에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소극적이라 남 앞에 서기 힘들어했는데 어떻게 연극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30년이 지나 관객에게 받은 상처를 관객에게 치유 받았다. 이렇게 나는 연극과 화해했다. 아니었다. 6월 오프 과제였던 나의 신화 의식 행하기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했던 것을 보면 아직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다. 어쩜 이대로 화해하지 못하고 끝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어떤가. 연극인이 될 것도 아닌데.

IP *.124.22.184

프로필 이미지
2017.08.08 14:28:36 *.111.17.132
"30년이 지나 관객에게 받은 상처를 관객에게 치유 받았다."

이 표현 너무 좋아요~!^^
많은 감정이 포함된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렸을적의 아픈 기억도 있고 세월의 무게감도 있고 진한 아쉬움도 있고

이것 말고도 더 많은 감정이 배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7.08.09 19:59:30 *.124.22.184

 어렸을 때의 기억인데 아직도 남아있는 것보면 내가 의식하지 못한 감정이 있을 수도 있겠지. 

아마 '가난'이란 걸 창피하게 여기던 마음이 보태졌겠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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