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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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면 - 위대한 삶을 살다가 오늘 세상과 작별하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오신 길, 당신의 사랑이 가슴에 가득합니다. 당신의 아들로써 부끄럽지 않은 한의사,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 어머니의 여생,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잘 모시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아버지…>
아버님의 차트번호는 1번이다. 남편이 한의원 개원 후 등록한 첫 환자분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차트번호가 1만 번을 기념하게 된 어느 날, 문득 차트번호 1번을 들춰보게 되었다. 그렇게 1번 환자의 차트에 남긴 남편의 메모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 것이다. 2010년 2월 2일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 남편은 아버님의 차트에 메모를 적었고 수 년이 지난 어느 날에서야 우연히 내가 읽게 되었다.
가족처럼 치유하겠다는 다짐, 가족이었던 1번 환자가 마지막 숨을 뱉을 때까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한 그 마음가짐을 1만 번의 환자에까지 이르게 하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남편은 고향에서 아버님이 쓰셨던 오동나무 약장을 가지고 왔다. 약장의 서랍을 열고 닫을 때마다 수십 년 전 아버님 역시 그 서랍을 열고 닫을 때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며, 아버님의 이름을 걸고 최고의 약재만 약장 서랍에 채우겠다는 남편. 아울러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아버님의 처방전 묶음도 모두 고향에서 가지고 왔다.
‘처방전’과 ‘약장’은 아버님이 남겨주신 가장 큰 유산으로 현재 우리의 공간에 놓여져 있고 차트번호 1번은 남편에게 있어 초심을 잊지 말라는 상징으로써 존재한다. 남편의 메모에서 아버님을 추억하다 어머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머님의 차트번호는 2번이다. 어머니의 여생, 걱정하지 않도록 잘 모시겠다는 남편의 다짐에서 나의 역할을 환기하게 된다. 환자들을 가족처럼 대하겠다는 나는 정작 가족인 어머님께는 일반 환자들만큼이나 살뜰하게 해드리고 있나.
에너지가 넘치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어머님이시기에 챙겨드려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머님 역시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시는 스타일이라 당신이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며느리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편이셨다.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나도 참 박정하다. 남편이 아버님께 남긴 메모 앞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은 처방전과 약장이라는 ‘유산’도 남겨주셨지만 당신에 이어 2번이신 어머님을 부탁한다는 ‘유언’ 또한 남기셨다. 그렇게 치료의 수단과 치료의 대상을 함께. 나는 혹 치료의 대상을 짐으로 여기는 건 아니었나. 유산으로서의 처방경험만을 욕심 낸 건 아닌가.
딸아이는 아버님의 성품과 어머님의 재능을 물려 받았다. 어머님을 닮아 손재주가 좋은 딸아이를 어머님도 특별히 아끼신다. 어느 날 어머님은 딸아이의 웃자란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계셨다. 뇌수술로 머리카락이라곤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어머님께서 손녀의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는 모습. 그 모습에서 보여지는 뚜렷한 대비에 뭔가 짠한 울림이 있어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하며 사진을 찍는 바로 그 순간 딸아이는 남편의 어릴 적 모습으로, 어머님은 숯 많은 까만 머리의 젊은 시절 어머님으로 변신한다.
35년 전 경북 문경. 이유 모를 알러지 반응으로 극심한 호흡곤란을 일으키던 7살의 남편. 아버님과 어머님은 막내아들의 갑작스런 증상에 놀라 유명한 소아과 의사를 찾아 문경에서 대구까지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간다. 힘겹게 찾아 진료를 받은 후 그 의사에게서 들은 말은 아래와 같았다.
“이 아이는 가망이 없습니다. 포기하시고 아들을 하나 더 낳으시죠.”
아무리 가망이 없다 한들 따듯한 외피를 살짝이라도 두른 말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차갑기 그지없는 기계음이었던 모양이다. 두 분은 힘겨워 하는 어린 아들을 안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아무 말 없이 각자 창 밖만 바라보고 계셨다 한다. 너무 기가 막혀 오히려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더라며 그 날을 회상하셨다. 포기하라고? 자식을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나?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젊은 부부는 집에 돌아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아직은 처방경험이 부족했던 아버님이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처방을 찾았고 어머님은 그 처방대로 밤새 약을 달여 발버둥치는 아들에게 억지로 먹인다.
가망이 없다던, 포기하라던 그 아들은 자라 한의사가 되었다.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는 삭발의 어머님, 그 모습에서 어린 남편과 젊었을 때의 어머님이 오버랩 되고, 이어 기차 안에서 서로 창 밖만 쳐다봤을 젊은 부부의 막막한 심정까지 상상이 되었다. 머리가 희어지고 등이 굽어지고 눈이 침침하며 귀도 들리지 않는 노쇠한 부모님을 바라보며 그만큼 무력하고 온전히 부모님께 의존해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겹쳐 떠올려 본다. 그렇게 무력한 존재임에도 따듯한 시선으로 보살펴 주셨던 부모님의 바로 그 따듯한 시선으로 나는 지금 부모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차트에 적힌 메모 하나가 과거의 여러 장면들을 소환했고 급기야 비슷한 경험을 녹여낸 중천 김충열 선생의 한시를 읊조리게 된다. 묘비명이건 차트의 메모건 추후 읽으며 후회함이 없도록 효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은 어머님과 친정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릴 일이다.
母亡三十六周回, 어머님 돌아가신 지 어느덧 36년이 되었는데
每讀碑銘切痛哀, 매번 묘비명을 읽을 적마다 가슴이 아프고 애통합니다.
生育恩加再活德, 생육해 주신 은덕에 죽음의 병에서 또한 건져 주셨으니
昊天罔極地無涯' 호천망극 갚을 길이 없나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