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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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 옛 시인의 가락에 맞춰 시마(詩魔)와 함께 춤을 추다
술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달밤을 바라보면 국수가락처럼 주욱주욱 나오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국수자락 주욱주욱 뽑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 정민 교수는 여러 수레의 초고 끝에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탄생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에 그러한 출생이 비밀이 있었다니! 그 한 편의 시는 시마에 사로 잡힌 시인의 심장을 토해내는 것과 같다는 것 또한 저자는 알려준다.
가락으로 다가온 한시
저자는 어쩌다 한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는 고등학교 때 한시에 대한 깊은 매력을 처음느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한시는 ‘가락’으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한시를 창으로 노래하듯이 가르쳤는데 한시를 노래로 부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던 저자는 집에서 오르간을 치며(그 때 집에 오르간이 있을 정도면 비교적 부유했던 모양이다) 직접 악보도 만들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의 고등학교 때 취미는 한시의 20수, 30수를 백지에 베껴 쓰고 외우는 것이었다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때 한시를 노래처럼 접하게 된 그는 다른 이들이 한시를 고리타분한 한자 텍스트로만 느낄 때 그 한자 사이에 있는 음과 가락을 들은 것이다. 행간의 뜻만이 아니라 행간의 음을 먼저 득한 사람. 이러한 한시의 가락에 사로잡힌 그는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오는 한시란 한시는 다 외웠다고 한다.
맹자가 이끈 한문공부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국문학과에 진학한 저자는 대학 시절에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시집을 읽다가 좋아서 베껴 쓴 노트도 꽤 여러 권이 있었고 창작에 대한 미련은 대학원 석사 논문을 쓸 때까지도 접지 못했다는 저자. 그런데 어느 순간 깨끗이 마음이 정리되었다고 한다. 대신에 그때 언어를 매만지던 버릇이 추후 한시를 읽고 분석할 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한문공부에 매달린 계기는 <맹자> 덕이었다. 대학 4학년 때 <맹자>가 한 줄도 해석되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고 한문공부에 매달린다. 본격적인 한문공부는 이 시절 이뤄졌다고 한다. 관심과 재미에서 시작한 한시는 그의 전문분야가 되었고 이제 그는 아침마다 일을 시작하기 전 한 시를 한 수씩 번역한다고 한다.
스승의 식사 속도를 맞췄던 제자
저자는 대학 4학년 여름방학 한문특강 때 이기석 교수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 후 10년 가까이 이기석 교수를 모신 그는 조교 때 한문특강에 사람이 오지 않아 만나는 후배마다 붙들어서 강의를 듣게 하여 후배들이 그만 보면 도망을 쳤다 한다. 이기석 교수는 몸이 약한 분이셨던 것 같다. 강의가 12시에 끝나면 천천히 걸어 식당으로 갔고 식사도 빨리 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저자의 부인도 그 때 한문특강을 들었고 당시 저자가 밥을 교수님 속도에 맞추어 먹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다. 아마 이러한 장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지 않았을까. 저자와 부인의 연애사 또한 은은한 묵향이 나는 한 편의 시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저자의 한문 공부는 순전히 이기석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한다. 한 글자라도 직역하지 않으면 혼이 났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해석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포천에 있는 이기석 교수님의 산소는 저자가 이런 저런 일로 속이 상하거나 사는 일이 너무 힘이 들 때 찾아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글마 들린 저자
저자의 몰입과 몰두는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남다르다. 누군가 그에게
시마가 아닌 글마에 사로 잡힌 것 같다고 했다. 처음에 석사논문을 쓰면서 석주 권필을 만난 그는 박사과정에
있으면서도 석주에 관한 글을 계속 썼다. <주생전> 논문을
쓸 때는 하루에 열 여섯 시간씩 논문을 쓰기도 했고 꿈에 석주가 나타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꿈에서
그를 두어 번 만났다고 한다. 신들린 것처럼 쓴 덕분에 목릉문단에 대한 거시적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사람만 뚫어지고 보고 있으니까 어느 순간 그 주변까지 눈에 다 들어오게 되어 1999년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을 묶게 된다. 200자 원고지로 4000매의 분량이었다 하니 가히 글마 들린 덕이다.
병마보다 센 글마
건강하지 않아도 그에게 달라붙은 글마를 떨쳐낼 수 없었다. 식도 장애로 체중이 14키로나 줄었던 때에도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명청대의 청언소품에 마음을 뺏기게 된 그는 A4지 이면지를 반으로 잘라 청언소품 원문을 하나씩 붙였다고 한다. 전철을 타고 다니며 번역을 하며 그 여백에 다시 저자의 평설을 적었다고 한다. 화장실에도 놓아두고, 소파 옆에도 놓아두고, 탁자 밑에도 놓아두고, 가방 속에도 늘 있었던 메모들. 그렇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지혜>와 <한서이불과 논어병풍>, <내가 사랑하는 삶>이 나오게 된다. 앞의 두 책은 대부분 지하철에서 했고, 나중 책은 그 해 맹장 수술과 식도 수술로 두 번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에서 했다고 하니 가히 글마가 병마보다 세다 하겠다.
생각의 씨앗으로 마음의 텃밭을 만들다
그의 책상 바로 옆에는 원통형으로 된 파일 박스가 있다. 원래는 병원 환자
챠트를 정리하는 시스템인데, 우연히 길 가다가 사무기 영업소에 있는 이 물건을 보고는 거금을 들여서
샀다고 한다. 가만 앉은 자리에서 뱅글 돌리기만 하면 수백 개의 파일이 팽그르르 돌아가는 논문의 씨앗
창고라 한다. 논문이 완성되어 수확을 하고 나면 다시 분류하여 보관해 둔다고 하니 이 파일박스는 생각의
씨앗인 동시에 마음의 텃밭이라 하겠다.
한시를 잘 이해하려면 한시를 쓴 사람의 마음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저자. 시 속에서 시인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그 시인이 시를 지을 때 들었던 가락, 리듬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 한다. 그 지점에 도달하면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갖게 되는데 그 정서적인 교감의 매력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저자. 그의 안내와 함께 시인이 들었던 우주의 가락을 함께 들어보자. 시마에
사로잡힌 시인의 열정과 광기를 느껴보자.
내 마음 속 책갈피
5 몸가짐은 무겁게 말은 더욱 아껴서, 오래 함께하고 싶다. 초판을 낼 당시 다섯 살배기 아들은 아빠가 저하고 안 놀아주고 다시 연구실로 갈까 봐 집에 오면 막무가내로 양말부터 벗겼다. 그러던 녀석이 이제 훌쩍 커버려 아비가 올려다보아야 하는 장정이 되었다. 그 세월을 두고도 왜 할 말이 없겠는가?
7 새로움에 팔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은 어디가서 찾을 것인가. /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시마에 붙들린 듯 다른 일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근원이 깊지 않고 보니 퍼가기만 한 샘에 고인 물이 얼마 없다. 다시 저 원두로부터 청정한 물줄기가 콸콸 솟아나기를 기대해본다.
17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이나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18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된다.
19 시인은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다. /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가 있다. /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 윗 길이 된다.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리는 편이 아니라 생각하는데 문제는 누설할 천기가 없음. 시를 지어 보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천기를 알게 될까. 어쨌든 시에 대해 흥미는 생긴다. 말을 건네는 사물들, 사람들에게서 천기를 찾아보자.
20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 공중지음, 상중지색, 수중지월, 경중지상이 그것이다.
행간도 아니고 맥락도 아니고 공중에 매달려 있다니. 공중지음! 숨바꼭질 같은 장르.
22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22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사물이 직접 말을 건넨다.
사물은 언제나 말을 걸고 있다. 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의 귀를 좀 더 예민하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시는 들리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23 시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을 갖추고 있다.
23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23 행간에 감춰진 함축, 단어와 단어가 만나 부딪히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취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핵폭탄 같은 시. 함축된 것이 터져나올 때의 깨달음이라는 폭발력. 시에 관한 한 문외한이지만
요새는 이끌림이 느껴진다. 벌써 시집 몇 권을 사고 말았다.
24 사방은 고요하고, 정신이 해맑다. / …시인의 시선 속에 떠돌고 있는 법열의 생취
26 마치 단원 김홍도의 붓끝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듯하다.
일연의 붓끝을 느낀 고운기처럼.
27 막상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시시콜콜 갈라 따지는 것이 오히려 시의 총체적 이해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시를 시시콜콜 따지면 어쩌자는 거야. 그런데 학창시절에 시를 따져가며 공부하는 환경이었다.
28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한 유도리.
28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29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조각 영각에 있다.
29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 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靈覺)이라고 한다.
들리지 않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러한 영각이 가능한 제 3의 눈과 귀.
32 이명은 자기만 알고 남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코골기는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기만 모른다.
33 뒷날 자신의 저술을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 장독대의 덮개로나 쓰일 것을 생각하며 탄식하였다. / 막상 그가 죽고 나자 <<태현경>>은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저술이 되어 낙양의 종이 값을 올렸다.
나는 내 책 주면서 라면 받침대로 쓰시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장독대의 덮개라고 표현했구나. ㅋ
37 사의전신(寫意傳神)/ 입상진의(立像盡意)/ 상세한 설명대신 형상을 세워 뜻을 전한다.
부탄에서 탕가와 마니차를 보며 만다라 보면서 깨달음이 오고 옴마니반메훔 외우면서 마니차를 돌리면 마니차 안에 감긴 경전이 돌아가며 경전을 읽는 셈이 된다는 것이 웃겼는데. 그림을 통해 또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일반 대중(문맹자를 포함)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37 절을 그리라고 했는데, 화가는 물 길러 나온 중을 그렸다. 화제에서 요구하고 있는 장(藏)의 의미를 화가는 이렇게 포착했던 것이다.
39 달리는 말의 꽁무니로 나비 떼가 뒤쫓는 그림이었다.
41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43 시는 의미해서는 안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
44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독자를 외로움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 만약 시인이 직접 나서서 시시콜콜한 자신의 감정을 죽 늘어놓는다면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패션쇼의 모델들을 보면 모두 무표정. 그러한 무표정이 옷의 화려함과 맵시를 더욱 드러낸다.
46 옛사람은 시를 지음에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게 하였다.
48 몹시 권태로워서 변화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태는 사서 고생하는 이유다.
49 겉으로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여도 그 안에는 아직 쓸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항변이다. 이 거문고와 화로의 원관념이 바로 시인 자신인 것을 알게 해준다. 시인은 결국 지금 세상이 쓸모없다고 자신을 버려도, 나는 아직 가슴 속에 경국제세의 포부를 간직하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주식은 실현하지 않으면 수익도 손실도 아니다. 쓸모도 간직만 하면 의미 없어.
49 ‘홀로 앉아 있음’의 참의미는 하수상한 시절에 때를 기다리는 오롯한 몸가짐과 기다림이었던 것.
53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행간을 읽고 맥락에서 파악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것도 나의 착각 또는 자만이려나. 최소한 곧이 곧대로 사전적 의미로 읽지는 않는 편이다. 어릴 때엔 따져 가며 읽는 게 비판적 독서인 양 착각했던 시절도 있다. 그 역시 하나의 지나가야 하는 과정인 거 같기도 하다. 독서의 마지막 단계는 쓰여 있지 않은 것을 읽을 줄 아는 단계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시인 듯.
54 글자는 스무 자에 지나지 않는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감정과 씩씩대는 나귀의 숨소리, 그와 함께 커져가는 두 사람의 맥박 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지 않은가.
좋을 때다. 그리고 낭만적 시절이다. 요새 노래 가사는 너무 직설적이다.
55 시인이 만일 3.4구에서 ‘몹시도 수줍은 아름다운 그 모습,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라.’와 같이 표현했다면 시가 아니라 유행가의 가사가 되고 만다.
56 다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목 뒤의 주름과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 대한 관찰을 화가는 놓치고 말았다.
관찰. 이 관찰력을 키우려면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좋다. 그림과 관찰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시와 그림도 함께 가는 것인가. 시를 지어보겠다면 그림을 먼저 그려보자.
58 월계화는 잘 그리기가 어렵다. 대개 사계절 아침저녁의 꽃술과 잎 모양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봄날 정오의 것이다. 찰나의 순간
59 정신은 간데없이 손끝의 기교만으로 그리려 드니, 난초를 그린다는 것이 파가 되고, 대나무를 그렸는데 갈대가 되고 만다.
60 용모에 부족함이 있는지라 분을 바르고 연지를 칠한다. 재주가 부족하므로 전고를 끌어다 쓰고 책에서 찾는다. 옛사람의 문장이라고 해서 다 잘된 것은 아니다. 꾸며서 웃고 거짓으로 슬퍼하는 것이라면 나는 광대일 뿐이다. 그 연유를 헤아려보면 진정 나타내려고 한 것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인용 많은 글이 그래서 보기 불편 했었나보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인용은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다.
60 어느 날 소나기가 창문에 후드득거리자 갑자기 시 한 구절을 얻었다.
그냥 뭐 이 표현 자체가 시다. 소나기가 창문에 후드득. 느닷없는 시 한 구절.
61 김류의 시는 단지 강흔의 시를 아래위로 바꾸고 앞뒤의 순서도 뒤집었다. 그러고 나서 허사를 교체했을 뿐이다.
번호 매겨 확인해보니 꼭 수학같다. 문학 중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인간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바둑 이 차지하는 위치와 같다 할까. 시만큼은 알파고가 짓지 못할 거 같지만 이런 경우를 보면 불가능할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62 밥 먹으니 배부르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탄력이 없고 여운도 적다. 어음 면에서도 음악미가 부족하다.
66 대개 이러한 것이 경물과 시인의 정신이 만나 결합되는 양상들이다. / 시는 본바탕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덕지덕지 화장한 여인의 분내를 경멸한다. / 예술과 기술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69 싱거워서 뭉클한 사연이다. 츤데레네.
71 그의 시를 읽노라면 필자는 늘 그 잔잔한 슬픔에 감염되어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71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표현이 좋다.
72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여백의 미. 서구에서는 지도의 여백이 정복을 이끌었거늘.
72 두 사람 사이에는 한마디의 말도 직접 오가지 않았다. 유명한 환이삼롱의 고사가 이렇게 생겨났다. / 실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는 부질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어쩌다 보니 주변에 ‘토론’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지인이 되었는데 한번 이야기해봐야겠다. 사실 나 역시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언어는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는 쪽이라 그럼에도 ‘토론’이 소통에서 갖는 역할이나 의미에 대해 물음표가 있긴 함.
74 필설로 옮기려고 하는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져버린 기심(機心),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취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77 그리하여 문자로 세울 수도 없고 가르쳐 전할 수도 없는 부처의 정법안장 미묘법문이 그에게로 이어졌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바로 이것이다.
78 성인은 상을 세워서 그 뜻을 다하고, 괘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며, 문사를 이어서 그 말을 다한다. 여기에서 입상진의(立像盡意)의 말이 나왔다. 말로 뜻을 다할 수 없다면 형상으로써 뜻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79 그 분석 유추의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시를 분석하는 것과 방불치 아니한가.
80 그 안에 담긴 뜻은 그래서 사람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풀이된다. <<토정비결>>이 언제든지 신통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다.
81 하지만 이것을 비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니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생동하는 깨달음이 되었다.
89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는 인식의 갱신에서 시인은 몰아의 희열 속으로 빠져든다.
90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와 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한다.
91 묘는 어렴풋함에 있으니, 그 속에서 비로소 솜씨가 드러난다. 애매모함 속
91 시를 낱낱이 해부하여 파헤치고 나면, 남는 것은 언어의 시체뿐이다. 시는 100미터 미인.
95 이 나라에서 지위의 높고 낮음은 단지 시를 쓰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95 천자 최치원이 당시풍만 좋아하여 자기와 같이 송시풍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박대하여 등용치 않으므로 참을 수 없어 거병했다는 사연이니, 참으로 시 왕국다운 반란 이유다. 이에 이색의 천거로 토벌의 임무를 맡게 된 심의는 몇만의 군대를 주겠다는 천자의 제의를 거절하고, 소영비술만으로 대적하겠다며 첨두노 몇을 데리고 혼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소영비술이란 천지의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피리 부는 비술로 다름 아닌 시를 말함이요, 첨두노란 머리가 뾰족한 하인이니 붓의 다른 말이다. 말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왕국일세.
96 두보를 천자로 하는 중국의 시 왕국에 천자 최치원이 초청되어 두 나라의 시인들이 시로써 재주를 겨루는 내용 등 적잖은 흥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98 또 이 경우 시인의 의도는 단지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므로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가 요청된다.
100 무릇 광경을 서술함은 국풍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라서 참되고 두터운 맛이 적다.
시경
101 감성의 욕구는 자칫 무절제로 흐르기 쉽고, 이성의 욕구는 논리의 함정에 쉬 빠진다.
나는 논리의 함정에 빠지는 편은 아니다 무절제로 흐르기 쉬운 스타일이니 조심. 그래도 나이 드니까 이것도 덜하더라.
101 젊은 시절 격동하는 감정의 분출과 화려한 비유로 독자를 사로잡던 시인도 만년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담한 언어에 담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본다.
106 이러한 낭만적 상상은 일그러지고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에서 자아를 멀찌감치 떼어놓아 정서적 정화와 일탈을 경험하게 한다. 소외효과
106 상상의 화면으로 그려낸 평호의 긴 둑은 곧 윌리엄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박목월이 그려낸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눈에 비친, 남도 삼백리의 타는 저녁노을과도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107 애초에 갈 길은 있지도 않았다. 인생이란 결국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 아니겠는가. 길을 가로막고 달려드는 낙엽은 시인에게 인생은 이와 같이 덧없는 것이라고, 길은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스무 자에 불과하지만 길 가는 나그네의 신고와 뼈에 저미는 외로움이 생생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107-108 이안눌의 기가서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 흰머리의 어버이 근심할까 저어하여,
그늘진 산 쌓인 눈이 깊이가 천 장인데 / 올 겨울은 봄처럼 따듯하다 적었다네.
먼 변방 산은 길고 도로는 험준하니 / 서울에 닿을 제면 한 해도 늦었으리.
봄날 올린 편지에 가을 날짜 적은 뜻은 / 근래 부친 편지로 여기시라 함일세.
欲作家書說苦辛(욕작가서설고신) / 恐敎愁殺白頭親(공교수살백두친)/
陰山積雪深千丈(음산적설심천장) / 却報今冬暖似春(각보금동난사춘)
塞遠山長道路難(새원산장도로난) / 蕃人入洛歲應闌(번인입락세응란)
春天寄信題秋日(춘천기신제추일) / 要遣家親作近看(요견가친작근간)
아이고 참 아름다운 시다.
108 때로 들뜬 어감으로, 간혹 슬픔에 젖어 노래하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는 법은 좀체 없다.
109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선종과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다. 또 쓸데없는 수식을 배제하고 섬세한 관찰과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제재 상 일상생활에의 관심과 밀착이 두드러진다.
110 다만 그 집착을 마음에서 걷어내 전미개오(轉迷開悟)하고 나면 공연히 육신을 괴롭힐 이유가 없다. / 즉 성도 성불에의 욕망은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막아서듯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 빚어낸 허망한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다.
111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알아 지저귀고 망울 부푸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구도의 깨달음도 이와 같다. 누가 알려주어서 관념으로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통연자득, 활연관통해야 한다.
111 흔히 큰 사찰의 대웅전 둘레에 그려진 심우도의 이치를 시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것이 있을까.
심우도도 영웅여정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112 정작 봄은 자기 집 뜰 매화가지 위에 와 있었던 것이다.
파랑새 여정 다시 볼 수 있는 눈
112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113 이는 즉 자연물을 통해 물아일체의 온유돈후하고 충담소산한 경지를 노래함으로써 음영성정하는 시풍으로 대표된다.
마음을 무찌르는 게 아니라 눈을 찔러서 일단 적었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소.
113 퇴계가 연곡리라는 곳에 갔다가 맑은 못을 보고 느낌이 있어 지었다는 시이다.
아들래미가 야구를 하다가 방망이에 공이 몇 번 맞자 “아! 느낌 있다! 느낌이 있다!”하며 좋아했다. 어떤 ‘감’을 잡은 것이다.
116 이러한 결구는 대개 각몽을 위한 장치이다. 복귀에 앞서 이색은 심의를 깨끗이 목욕시키고 칼로 배를 갈라 먹물 몇 말을 붓는다. 그러고는 40년 뒤에 다시 만나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꿈, 여정
116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뿐이다.
119 외우던 시절
121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남포’라는 말은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정운이 담긴 말이 되었다.
남포로 가는 배, 비 내리는 남포항 같은 거도 다 그 남포인가?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부른 사람인데.
121 이로 보면 정지상의 ‘송군남포’라는 표현이 중국 사신들에게 일으켰을 정서적 환기가 실감난다. / 4구의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나니’도 두보의 이 구절을 환골탈태한 것이다.
‘송군남포’는 다른 시인들도 이미 쓴 표현이고, 정지상의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는 두보의 別淚遙添錦水波(이별눈물 아득히 비단 물결에 보태지네)를 살짝 바꾼 건데..굴원과 두보의 표현을 담은 정지상의 송인이 어떤 면에서 잘 지었다고 하는건지? 그 시대 詩作에 있어서 모방과 창조 간 경계의 허용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모르겠네?
123 ‘기’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고, ‘승’은 이를 이어받아 보충한다. ‘전’에서는 시상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 2구와 3구 사이에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 할 때, 4구 ‘결’에 가서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
어머! 이건 시의 영웅여정이다! 전은 바로 ‘전환’이다. 단절을 통한 전환, 전환을 통한 단절. 그렇게 자신만의 성소에서 무언가를 꾀하고 결은 바로 ‘귀환’이다. 스토리를 구상할 때 영웅여정 모델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가능하겠다. 심우도도 결국 영웅여정이다.
123 이 시는 하평성인 가운을 쓰고 잇다. 이 운목에는 歌, 多, 羅, 河, 戈, 波, 荷, 過 등 한시에서 자주 쓰이는 운자가 많이 포진하고 있어서 고금의 시인치고 이 운으로 시를 쓰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얻어내기가 몹시 어렵다. 실제 이 작품 뒤로도 아예 多, 歌, 波의 운을 그대로 써서 차운한 시가 적지 않으나,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작품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오늘날 운자는 한시 감상에서 특별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지만, 중국 사신의 찬탄 속에는 앞서 남포가 주는 신운 외에, 이러한 운자 사용의 산뜻함도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마음이 아닌 눈을 찔러서 일단 적는다. 작곡을 하려면 결국은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가를 가지고 하듯 한시를 지을 때 역시 그러한 ‘운’을 가지고 리드미컬하면서도 뜻이 담긴 시를 짓는 것이 관건이다 뭐 그런 이야기인 듯 싶다. 이건 뭐 작사작곡보다 더 높은 경지가 한시의 詩作 아닌가 싶다.
126 또 柳의 중국 음은 머무른다는 의미의 留와 똑같다. 그러니 버들가지에는 가지 말고 머물러달라는 의미도 있다.
128 1, 2구와 3, 4구 사이에는 많은 시간의 단절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봄날 아지랑이 속에 한번 떠난 임은 매미가 목청을 틔우는 여름이 다 가도록 돌아올 줄 모른다. 그녀는 날마다 역참에 홀로 나와 하릴없는 기다림을 계속한다.
공리가 나왔던 ‘오월의 마중’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129 어느 조경학자가 우리나라 한시에 자주 나오는 초목의 빈도수를 조사하여 통계 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한시에 나온 초목의 빈도수를 조사했다는 것 자체는 참 기발한데 그 해석이 아쉽긴 하다. 그래도 시도는 기발했다.
131 임이 찾지 않는 꽃밭엔 잡초가 우거졌다.
임이 찾지 않는다, 잡초가 우거졌다라는 표현을 전혀 안하고 그저 황폐한 풀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곤충으로 알려진 반딧불을 언급함으로써 청량함과 황량함을 표현하다니.
137 제목을 붙이지 않은 채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무제시는 이상은 이래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는 염정풍의 분위기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140 특정 단어 위에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정운이 얹힌다.
140 한시 감상에서 이러한 어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시를 전혀 엉뚱하게 곡해할 염려가 크다. 대게 특정의 어휘가 정운을 머금는 과정에는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내적 교감이 전제된다.
영문학과 그리스신화와의 관계
141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 속에 감춰둔 암호와도 같아, 이것을 해독하지 않고는 그 시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 수가 없다.
143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148 ‘망 쳐진’을 ‘망가져버린’으로 읽어 기막힌 표현이라고 감탄을 거듭하는 바람에 필자는 졸지에 훌륭한 시인이 되고 말았다.
153 사람들은 그 푸름이 한나라 황제를 향한 변치 않는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 찬탄한다.
말도 안돼. 그저 그 흉노왕이 멋진 사람이었기를. 실제로 더 잘생겼을 수도.
153 오랑캐 땅 화초가 없다고 하나/ 오랑캐 땅엔들 화초 없을까?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마는/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네.
이게 장원이었다고라. 아빠는 그림을 못 그리는 편인데 어릴 때 상을 탄 적이 있다고 한다. 도화지를 하늘색으로 칠하고 검은색 물감으로 작은 십자가를 그린 후, 제목을 비행기라 했는데 덜컥 상을 탔다고. 예술은 주관적인 것.
154 안 가르쳐주겠네. 귀엽네.
156 환한 달밤이면 개들은 제 몸을 비비 꼬며 달빛을 보고 컹컹 짖어댄다.
158 지지배배 지지배배 쉴 새 없는 그 소리를, 시인은 시시비비 시시비비쯤으로 듣고 있다.
158 논어 위정에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니라(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라고 한 구절이 있다. 원문을 소리 내어 읽으면 꼭 제비가 지지배배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제비가 논어를 안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
아…할 말이 없다. ㅋ
159 번역을 거부하는 시다. 반역적인 시라 하겠다.
162 참으로 귀신이 곡할 붓이 아닌가.
167 이에 대한 처방은 무엇일까? 서울과 시골의 중간쯤에 사는 것은 어떨까?
시골에 살다 보면 병원이 문제되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의 이웃과 달리 시골에서 맺어야 하는 이웃과의 관계는 끈끈함도 있지만 동시에 얽매임도 있다. 서울과 시골의 중간쯤에 사는 것이 처방이 되는 것이 아니라 ‘5도 2촌’ 또는 ‘4도 3촌’의 삶이 그 처방이 된다. 나는 이미 그러한 처방대로 살고 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우리의 정서를 위해서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다만 엥겔지수가 아닌 가솔린 지수가 높다.
168 병주란 말은 망향과 그에 따른 모순 심리의 정운이 담뿍 담긴 말이 되었다.
170 이외에도 고사를 모르고 글자의 사전적인 뜻대로만 번역하는 데서 오는 오류는 연구자들 사이에 수도 없이 발견되는 것이다.
고려 사회의 성 풍정이 타락했다고 지적했다니 너무 한다. 자기만 오해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 있게 지적질이라니 답이 없네. 내가 읽어도 그렇게 해석은 안되던데. 솜옷 지어서 보내요. 나 근데 임신했어요. 설령 이렇게 읽히더라도 ‘이게 아닐 건데…’하며 다른 뜻이 아닐까 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172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 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175 마음에 일어나는 정을 건네듯 사물에 보내면, 사물은 답이라는 듯이 흥을 불러일으킨다.
177 시인은 가장자리를 굳이 감추려 들고, 읽는 이는 경물 안에 감춘 시인의 정을 자꾸 들춘다. 한데 합쳐졌던 정과 경이 독자의 의경 속에서 어느 순간 분리되면서 새로운 미감이 발생한다.
179 정과 경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서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좋은 시다.
180 사람이 천하를 널리 보지 못하면 시가 국한되고 만다. / 너는 모름지기 중국말을 배우고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
180 행만리로의 강산지조가 있어야만 비로소 시가 얽매임 없이 툭 터진다. 시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라면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것도 마다할 것 없다고 스승은 제자를 부추겼다.
183 떨어진 꽃잎을 보고 정이 촉발되어 ‘일춘사’가 ‘일생사’로 확장되었다. 뭔가 행간이 있는 시다.
184 “…모름지기 경과 뜻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좋다.” 문제는 언제나 정과 경의 조화다.
186 기약을 두지 않은 독서라 ‘간서’다. 보려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어 본다는 뜻이다.
배가 고픈게 아니라 입이 심심해서 주전부리를 하듯이 눈이 심심하여 책을 찾을 때가 있다. 여행 중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 자는 것도 지쳐 그냥 책을 읽었다. 그게 간서.
190
아내는 술을 퍼와 내게 권해 따라주네/
얼큰해져 이불 덮고 다시 높이 누웠자니/
가슴 속에 불평 있음 깨닫지 못하겠네.
높이 누웠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침상이 높아서 그렇다는 것인가. 한자를 보니 高臥이다. 고와의 뜻을 검색해 보니 사전적 의미는 높은 데에 누워 있음을 말하는 것이나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서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 함. 그러한 비유에서 가슴 속에 불평 있음 깨닫지 못하겠네가 더 와닿는다.
191 밤중에 누워 시를 읊조리다 느낌이 있어 느낌이 있어가 有感이네.
191 교향악의 합주처럼 완벽한 하모니가 아닌가.
191 아내는 소리 내서 읽으려면 컬컬하겠다고 술을 걸러 내온다.
설마. 달밤에 염불 외지 말고 얼른 마시고 자라는 뜻 아니었을까.
192 경물과 정이 어우러져 서로 자기편으로 당기고 이끌릴 뿐, 먼저와 나중이 없다.
192 봄바람 묵은 병이 애처로운지 / 약 달이는 창가로 바람 보낸다.
192 꽃은 지난 해와 다름없는데 주인의 쇠락은 좀체 회복될 기미가 없다. /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무상을 되새기는 정조가 애틋하다. 물아일체의 호흡이 따뜻하다.
나는 이런 물아일체의 호흡을 언제 느꼈나. 힘들게 절벽을 올라갔는데 그 절벽 사이에서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휙 하니 불어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땀 좀 씻으라며. 난데없이 시원한 바람이 틈새에서 불어와 놀라우면서 반가왔다.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서 강풍, 자연풍 눌러댈 줄이나 알았지, 이렇게 ‘적시에’ ‘불어오는’ 바람은 간만이었다. 자연과 더욱 많이 호흡을 하고 이런 나의 통제가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 우연한 만남 그래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더 많이 가져봐야겠다. ‘물아일체의 호흡’
193 주관 정의가 객관 경물에 완전히 녹아들어 차 향기를 맡고 빗소리를 듣는 주체가 시인인지 나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196 길가 집은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들러쳤다.
일전에 삼국유사 읽을 때 견훤이 아들에 의해 ‘위리안치’ 되었다는 말이 있어서 검색해봤더니 위리안치는 가시 많은 탱자나무를 집 둘레에 울타리 쳐서 꼼짝 못하게 하는 거라고. 탱자나무가 이래 저래 울타리로 사용되었구나.
196 곡식을 향해 돌진하는 병아리 떼의 행진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떼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다. 그런 노래를 불렀는데..예전엔 그렇게 병아리가 행진하는 모습들을 많이 봤을 거고 최소한 나 초등학교 때엔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파는 경우도 많았다. 요새 아이들은 병아리 볼 일이 없네. 이런 시가 나왔고, 신해철은 병아리 얄리를 노래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병아리가 제재가 될 일은 없는 거 같다.
197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맞추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스민다.
들은 이야기인데 중세시절인가 한 여자를 두고 경쟁을 하는 남자 둘이 있다면 여자를 가운데 두고 끌어당겨서 자신한테 끌어당기는 남자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잔인하다고 했더니 ‘아니지,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한테로 끌려가면 되니까’라고 하더만. 선택에 스미는 감정.
197 시 속에서는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고 만다.
201 시인의 그때 감정 상태나 놓인 환경에 따른 선택이 있을 뿐이다.
202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206 다섯 자 시구를 읊조리느라 몇 오라기 수염이 또 희어졌네. / 온종일 찾아도 못 얻겠더니, 때로는 저절로 찾아오누나.
235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 미쳐야 미친다. /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235 그들 안에서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나의 글에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다. 흡인력이 없는 글은 일기장에나 쓰여져야 하는 것.
235 우연히 같게 써진 한 글자 앞에서 그는 입신출세의 꿈마저도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235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이를 본 아버지가 그에게 그림 공부를 정식으로 허락했다.
빌리 엘리어트가 주체할 수 없는 춤을 춘 후에 광부인 아버지가 그의 천재성을 깨닫고 결국은 아들의 진로를 인정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237 도적떼가 감격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 장면을 삼국유사에서 봤던가? 도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일이 제법 되는 것 같다. 그 옛날 도적도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백성이었기에 그랬을까?
237 자신의 눈을 찔러 소경이 되었다.
서편제도 뭐 이런 류의 스토리 아닌가. 득음하기 위한 恨. 그런데 예술을 위한 혼신과 폭력의 경계가 애매할 수 있다. 허벅지 살을 베어 효를 행하는 이야기처럼 스스로 눈을 찌르는 이야기도 뭔가 불편하다.
237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
239 남쪽 시내로 가서 황소 등에 걸터앉아 관찰하곤 했다. 근 100일이나 날마다 수염을 꼬며 고심하다 마침내 단 한 구절을 얻었다. / 푸른 산 허리를 날며 가르네.
239 오늘에야 옛사람이 말하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었다. 뒤에 마땅히 이를 잇는 자가 있을 것이다.
239 그 뒤 몇 해가 지나도록 바깥 짝을 얻지 못했다.
시에 있어서 대구를 찾는 것은 인생의 반려를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구나. 정말 딱 궁합이 맞는 그런 시구. 음과 양의 만남 같은.
240 선인들의 시 한 구절에 대한 애착과 노력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241 그 순간 퍼뜩 시상이 떠올랐다. 주박은 나무꾼을 붙잡고 “잡았다!”고 소리쳤다.
심봤다! 유레카! 따봉! 올레!와 같은 외마디. 나는 심봤다의 순간을 일상에서 얼마나 겪어봤는가. ‘퍼뜩’, ‘난데없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그 소리를 위해서는 한 동안의 골몰과 몰두, 몰입이 있어야 한다.
241 이 애가 심장을 다 토해야만 그만두겠구나.
어머니의 표현력도 이미 장난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물려주신 재능이군요.
241 술에 취하거나 초상이 있는 날이 아니면 언제나 이같이 했다.
242 옥황상제께서 백옥루가 완공되어 그대를 불러 상량문을 짓게 하려 하신다. / 천상에 또 백옥루가 완공된 모양
천사가 부족해서 착한 사람들을 먼저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와 비슷. 이렇게 천재와 미인과 선인들을 일찍 다 데리고 가버리니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죠.
242 올해 꽃 지자 낯빛도 시어지니/ 내년에 꽃이 피면 다시 누가 있으리오.
243 위상은 <초사> 76권을 저술한 후 심혈이 다 닳아 죽고 말았다. / 창작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몸여인’에서 열심(熱心)은 심장을 열 받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것을 읽었다. 노력을 하고 애를 쓰는 것은 좋지만 그 열심이 심장을 열받게 하는 수준이 되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트뿅뿅 날리며 신명 나는 굿판 같은 희열의 열심으로서의 열심이 좋지 않을까. 하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열정에 영혼이 불태워지는 상황이니.
243 어이해 한가로이 있지 못하나 / 마음이 몸과는 원수 되었네 如何不自閑 心與身爲仇
나는 한가로이 지내는 편이고 스스로를 닥달하는 편이 아니라서 한가로이 있지 못하고 몸을 혹사하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결국 그런 사람들이 뭔가 이뤄내긴 하는 모양. 그래도 나는 몸과 마음이 원수되는 것보다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모방해서 변용해 보면
어이해 한시도 바쁘지 않나 / 마음이 몸과는 친구 되었네. 如何不自忙 心與身爲朋
245
두 구절을 삼 년 만에 겨우 얻고서 / 한번 읊자 두 줄기 눈물 흐른다.
벗들이 만약에 칭찬 않으면 / 가을에 고향 산에 가서 누우리.
兩句三年得 一吟雙淚流 양구삼년득 일음쌍루류
知音如不赏 歸臥故山秋 지음여불상 귀와고산추
새벽에 이 글 읽고 한참 웃었다. 뿌듯함과 솔직함이 함께 느껴져서 유쾌하다. 3년 만에 얻은 두 구절에 ‘감격한 나머지’ 한달음에 썼다는 저 글이 더 재미있다. 흐르는 두 줄기 감격의 눈물과 두 구절이라는 대비. 그리고 나서 그렇게 감격스러운 3년 만에 얻은 귀한 시가 뭔가 하고 보자니 오히려 더 싱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3년 만에 얻든 득의구라 하니 기록해본다.
연못 아래 그림자 홀로 가는데 獨行潭底影(독행담저영)
나무 곁의 이 몸은 자주 쉬누나 數息樹邊身(수식수변신)
249 가도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우에 모아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으며 빌었다. “이것이 내가 한 해 동안 고심한 자취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구본형 소장은 한 해에 책 한 권을 내는 것으로 한 해의 자취를 기념했는데. 나도 한 해를 보낼 때 수확할 수 있는 나만의 곡식을 만들 수 있을까.
251 좋은 시구 찾기를 범 찾듯 했고 / 알아줌 만나면 신선 만난 듯
글쓰기의 비선실세 최순실이 필요하다. 칭찬해줄 수 있는 친구 알아주는 신선.
251 구절마다 깊은 밤에 얻은 것이니 / 마음은 하늘 밖서 돌아온다오
밤에 그 분이 오시는구나. 이 분은 야행성이었나보다.
252 그는 자신의 시에 그러한 기상이 스미게 하려고 꽁꽁 언 추운 하늘을 향해 말을 타고 내달리는 자학을 마다하지 않았다.
생텍쥐베리도 글 쓰다 말고 야간비행 하러 나갔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거 같다. 파일럿이니 그게 가능하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글 쓰다 말고 말달리러 갈 수 있는 환경도 부럽네. 요새는 시동 걸어야 하는건가. 그러나 야간비행이나 겨울날 말달리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랴.
252 소동파가 적벽부를 짓자, 사람들은 그가 고치지 않고 단숨에 지은 줄 알았다. 막상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얼마 전 읽은 글은 단숨에 읽혀서 ‘이 사람이 이 글을 썼을 때엔 여러 번 고쳤을까 아니면 한달음에 썼을까’ 궁금했었다. 물론 여러 번 고쳤겠지. 하지만 읽는 사람은 한달음에 썼나보다..라고 느낄 정도의 자연스러움을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퇴고가 필요하다.
253 슬프다 무익한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 / 아무 짝에 쓸모없는 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
254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 몇 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 천 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257 사실 실용으로 말하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258 당나라 때 시의 융성은 약간은 미친듯한 열기와 목숨을 건 집착 속에서 이룩되었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두 눈을 바늘로 찌르며, 심장을 다 토해낼 듯, 가슴속에 찬 서리가 든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들은 오직 시를 위해 살았고, 시를 위해 일생의 심력을 쏟아 부었다.
264 그동안 이현욱이 쓴 시는 그가 쓴 것이 아니라 시마가 이현욱을 시켜 대신 구술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접신을 통해 쓰여지는 글이 길이 길이 남는 글이라고 생각됨. ‘받아써라!’라고 할 때 넙죽 받아쓰며 그 자신은 그저 메신저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경우. ‘신이시여, 이게 진정 제가 쓴 것입니까?’ ‘아니다, 내가 쓴 거다. 넌 받아쓴 거다’라는 대화가 일어나는 그 결과물. 그 경지가 되려면 무아, 몰아, 몰두가 선행되어야 한다. 결국 매일 매일의 어떤 노력이 접신을 가능케 한다. 현재의 나에게는 그것이 필사, 독서, 글쓰기이다. 퀄러티야 어쨌건 매일 하고 있다.
269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달려드는 증상이 이른바 시마 증후군이다.
동기 중 한 명이 떠오르는 글이다. 사물, 관찰, 비밀, 표현, 시도 등이 그의 키워드다. 그에게는 시나 희곡같은 형식의 글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시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뭔가 감성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시를 지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자꾸 생긴다.
282 시귀는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이다.
나는 누군가 궁금하면 스토커처럼 잘 알아내는 편이다. 그래서 저자연구도 재미있어 하는겐가. 인물에 대한 관심이 있다(물론 모두에게는 아니고. 궁금증이 생기는 인물은 적은 편). 단 궁금증이 생기는 인물에 관해서는 뒷조사를 잘한다. 이런 집착이 사람이 아닌 어떤 주제로 쏟아진다면 글 좀 나올 건데.
282 생각이 많으면 심화가 타오르고, 심화가 타면 신수가 고갈되어 심장과 신이 교통이 안되므로 사람의 생리가 끊어진다. 많은 문인이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장수하지 못하니, 그 하는 일이 이러한 까닭이다.
작년에 ‘육미환’을 처방해서 만들었다. 신장의 기운을 돋아 허리에도 좋지만 남성의 난임에 도움이 되는 처방이라 한다. 신수가 훤하다는 말도 신장의 기운과 관련이 있다. 문인에게 결핵이 많은 것은 환경적 요인이라면(햇빛 안보고 골방에 쳐박혀 담배 피우며 글쓰는) 그 옛날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장수하지 못한 것은 생각이 많아 타오르는 심화로 인한 것이었구나. 생긴대로 병이 온다.
283 시마가 떠나가면 시와 넋두리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 시마를 쫒아내겠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이규보의 경우는 오히려 행복하다.
일기는 일기장에, 어제 밤 쓴 일기. 이런 표현이 나오는 글, 시마가 떠난 글. 그 분이 안온 글.
283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서정주의 ‘봄’이라는 제목의 시였던가. 그런데 저 구절은 와 닿는 감정은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288 이런 까닭에 문장을 짓는 것은 늘 길 위의 나그네나 초야에 묻혀 사는 인사에게 있었다.
나야말로 길 위의 나그네이자 초야에 묻힌 은둔리아인데 문장은 어디에?
288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진대 비중상 그렇다는 겐가.
288 라이오넬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달콤하고 기름진 것을 먹고 싶어 하면서 날씬한 몸매를 위해 돈을 들여 다이어트를 하는 현대인
289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룰루랄라~하는 노래는? 슬픔과 분노가 시를 터지게 하지만 기쁨과 환희는 노래를 부르게 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도 간과하지 말자는 뜻이다.
290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글솜씨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 글을 지을 때 품었던 마음자리를 얻는 것이다.
290 감촉만 남긴 채 꿈이 그렇다.
291 옛날 서백은 유리에 구금되어 <<주역>>을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채에서 곤액을 당하여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쫓겨나 <<이소>>를 지었고, 좌구는 실명한 뒤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가 잘리고 나서 병법을 논하였고, 여불위가 촉 땅으로 옮기고 나서 <<여람>>이 세상에 전한다.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힌 채 <세난>과 <고분>을 지었다. <<시경>> 삼백 편은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바다. 이분들은 모두 뜻에 맺힌 바가 있으나 이를 펼쳐 풀어버리지 못한 까닭에 지나간 옛일을 서술하여 장차 올 일을 생각했던 것이다.
맺힌 뜻이 없어. 한도 없고.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 하지만 ‘권태’가 변화를 갈망하기에 뜻과 한이 없어도 결핍과 궁이 없어도 창작은 가능하다.
292 분이란 마음으로 통하려 하지만 아직 얻지는 못한 상태를 말한다. 恨과 어떻게 다른가.
294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296 이때 시를 창작하는 행위는 삶에 대한 올곧음을 견지함과 같고, 시를 포기함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타성에 야합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 시를 지어보자. 대충이라도. 말이 안되도. 어차피 말이 안되는 것이 시다.
297 단순한 경제적 결핍은 시인의 발분 욕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 측면이 배제된 궁은 궁이 아니라 빈이다.
298 궁이라는 상황이 개입되어 인식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여기에서의 궁은 결국 영웅여정에서의 시련.
298 일상성을 뛰어 넘는 인식의 갱신이 필요하다. 이는 현실과 밀착되어 있을 때에는 알기 어렵다. ‘그 무엇’ 밖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시인의 내부에 유감을 머금게 해서, 그 결과가 다시 예술 위로 퍼부어진다는 것이 시궁이후공의 기본 생각이다.
300 빼어난 시 떠돌이에 있다던 그 말. 秀句在羈窮(수구재기궁)
나도 떠도는 사람인데 시는 어디에 있느뇨. 나도 한번 길 위에서 시를 뽑아 보리아.
301 대체로 문학은 충족에서 나오지 않고 상실과 일탈에서 나온다.
박경리 선생님의 말을 옮겨 본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은 불행의 편이고 끊임없는 단련에서 나온다. 그러나 불행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문학보다 삶이 우선이기 때문에...” à 나는 여기서 문학은 불행의 편이라는 것보다 불행을 자초할 필요가 없고 문학보다 삶이 우선이라는 것에 밑줄을 긋고 싶다.
307 상실감이 강하면 회복에의 갈망도 커진다. 동일성의 추구란 현실과 자아, 혹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 형성된 파국적 관계를 청산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회복에의 갈망과 마찬가지로 유지에의 갈망도 크다. 현상유지에의 갈망, 따라서 꼭 상실감이나 결핍에서 좋은 시가 나온다고 보는 것에는 나는 반대.
318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 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그릇이라기보다는 씨앗이 아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 같은 사람은 그릇이 다르다기보다는 씨앗이 다른 것. 수용소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그릇이 작다고 하기엔 처한 환경이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319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321 과거 영웅들의 체취 어린 산과 언덕을 지나는 감개야 남다를 수밖에 없다. 빈털터리의 처지에도 풍월을 끌어들이는 여유가 자못 거나하다.
322 모든 것이 낯선 타관 땅에서 옛 친구와 약속도 없이 만났을 때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이런 순간을 겪은 적이 있다. 티벳 여행 시 만났던 동갑내기 친구. 수 년이 지나 다시 티벳으로 갔는데 라싸의 어느 거리에서 그 친구를 우연히 또 만나고 말았다. 그 친구 역시 두 번째 티벳 방문이었는데 수년 간 서로 다른 일을 하다가 비슷한 리듬과 주기로 그렇게 마주치게 된 것은 정말 대단한 시공간적 인연이었다. 이성이었다면 아마 운명으로 알고 결혼했을 것이다.
322 이간 세상의 유쾌한 득의사를 노래한 것이다.
그러게 득의사만 노래하며 살 수 있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324
낭군께선 우뚝한 재주를 지니시곤 良人的的有奇在(양인적적유기재)
무슨 일로 해마다 낙제하고 오십니까 何事年年被放廻(하사년년피방회)
이제는 그대 낯을 뵙기 부끄러우니 如今妾面羞君面(여금첩면수군면)
그대여 오시려면 밤중에나 오소서 君到來時近夜來(군도래시근야래)
이 여인네 멋지네. 하사년년피방회에서는 잔소리의 포스가 느껴진다. 하사년년!
325 꿈길이 토막 나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夢短不到家라는 말 좋네. 써먹어야겠다. 잠을 이루지 못해 꿈길이 토막났다니. ‘꿈길’을 새겨놓자. 그 길 위에 진달래가 뿌려질 수도, 산사태가 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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