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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2일 21시 01분 등록

한시미학산책 (82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정민(1960 ~ )

1960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소동파의 적벽부를 외울 만큼 한문과 고전문학에 자신이 있었는데 대학 4학년 때 <맹자>가 한 줄도 해석되지 않는 데 충격을 받고 미친 듯 한문 공부에 매달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유유히 가다가 한 번씩 하고 웃음이 터지는 그의 글에서 느껴지듯 유머 감각도 빼어나다. 그는 일반 책이 지식과 정보를 준다면 고전은 지혜를 준다. 값싼 매뉴얼이 아닌 원리와 근원을 가르쳐준다. 사람은 머릿속 생각지도를 잘 관리해야 하는데 사유를 정돈하고 심화하는 데 우리고전만큼 좋은 게 없다고 했다.

 

그는 1년에 700~800페이지 분량의 책을 3권을 출판하기도 했다.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사람들이 자꾸 잠은 언제 자느냐고 묻는데, 나 같은 경우 평균 7~8시간은 자야 해요. 잠도 잘 자요. 잠이 부족한 날은 저기 있는 의자 펴놓고 10~15분씩 쪽잠이라도 자요. 한번 뭔가를 시작했다 하면 화장실도 참고 가열하게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화장실도 자주 가요. 차를 많이 마시니까(웃음). 놀면서 하는 거죠 뭐. 대신 잡일을 안 하려고 하죠! 외부 강연 같은. 지난 4~5년간 한 적이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럼 많은 강연 요청에 대해 저자는 1000건 이상 온 것 같아요. 근데도 안 해요. 이런 전화는 두말 않고 끊어버리니까. 책이 나오고 출간 기념 강연은 몇 번 했어요. 저자로서 예의니까.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대중 강연은 안 해요. 강연, 가면 좋아요. 돈도 많이 받고. 그런데 오며 가며, PPT 자료 준비하며, 시간을 너무 많이 뺏겨요. 남의 떡은 절대 공짜로 먹는 게 아니에요. 돈맛을 들여 자주 강연을 다녔으면 책도 많이 못 썼겠지. 마음을 자꾸 바깥으로만 두면 나중엔 껍데기밖에 안 남아요.” 라고 하며 말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강연 준비하는 시간과 오가며 드는 시간이 강연을 하는 시간에 비하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구본형작가도 일주일에 두 번이상은 강연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강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생각해봐야할 부분이다. 아직 고민할 정도로 많은 강의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저서로 조선 후기 고문론 연구,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 초월의 상상등이 있고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풀이한 비슷한 것은 가짜다를 펴냈으며 연암의 편지 수십 통을 발굴해서 풀이하고, 연암 산문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그밖에 미쳐야 미친다, 한시미학 산책,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등 여러 책을 펴냈다.

한시미학 산책<현대시학>19942월부터 19965월에 걸쳐 연재한 글을 모아 출판한 책이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개정판 지은이의 말 (2010)

혹 지난 책을 아껴 읽어주신 독자라면 달라진 부분을 견줘본 일이 필자에게처럼 기쁨이 되었으면 싶다.

~ 나도 책 쓰면 이렇게 개정판까지 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묵은 자취를 매만지는 작업은 때로 새로 쓰기보다 힘들다.

초판을 낼 당시 다섯 살배기 아들은 아빠가 저하고 안 놀아주고 다시 연구실로 갈까 봐 집에 오면 막무가내로 양말부터 벗겼다.

아들의 마음이 보인다.

초판 지은이의 말 (1996)

한시는 전달의 특수성 때문에 오늘날 그 효용가치를 상실했다. 한시는 전문 연구자들의 학술적 관심사가 되고 있을 뿐,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버린 낡은 길이다.

그랬다. 고등학교 때 처음 배운 고시조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특히 서구 문예이론에만 친숙해 있는 우리에게 한시의 높고 깊은 미학 세계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도 그렇기를 기대한다.

새로움에 팔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은 어디가서 찾을 것인가. 개중에는 저도 모르면서 떠드는 현학이 있고, 속임수도 없지 않은 듯하다.

다만 옛말에 말을 듣기 전에는 그래도 알 만했는데 들을수록 아리송해진다.”더니, 자칫 이짝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첫 번째 이야기 ; 허공 속으로 난 길 한시의 언어 미학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 빛깔

연암 박지원의 <답창애>란 글에 동네 꼬마가 천자문을 배우다가 게으름을 부리자, 선생이 야단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야단맞은 꼬마의 대답이 걸작이다.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천자문을 펼치면 처음 나오는 말이 천지현황이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했다. 꼬마의 생각에는 암만해도 하늘이 검지 않고 푸른데, 책 첫머리부터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으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고 만 것이다. (17)

너무 재밌어서 그저 웃음이 난다. 당돌하면서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꼬맹이가 어린 뚱냥이처럼 느껴진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버린다.” 연암이 <능양시집서>에서 한 말이다. (17)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18)

어디 시 뿐이랴. 글이란 이래야 한다. 그래서 쉽지 않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이다. (18)

이런 찬사가 없다. 동서고금 모두가 시를 최고의 경지로 보고 있다. 이 책을 다 보고나면 나도 시에 대해 좀 눈이 뜨이려나.

 

영양이 뿔을 걸 듯

시인은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를 쓰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하지 않고 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19)

시라는 것은 성정을 읊조리는 것이다. 성당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마치 공중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19)

엄우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덧붙인다. 언어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시인이 한 번 사변의 늪에 빠져들면 생취는 간데없고 진부한 관념의 시체들만 뒹굴게 된다. (19)

여하튼 시란 쉽지 않다.

영양은 뿔이 둥글게 굽은 양이다. 잠을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기 위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잔다고 한다. 그래서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20)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된다. (20)

흥취 또한 이와 같다.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22)

너무 좋은 글귀들이 많아 발췌가 끝이 없다. 그냥 책 전체를 해야 할 정도다.

 

허공 속으로 난 길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23)

행간에 감춰진 함축, 단어와 단어가 만나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취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23)

이래서 쓰는 것도 어렵지만 읽는 것도 어려웠구나

이웃집 꼬맹이가 대추 서리 왔는데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맹이를 쫓는구나.

꼬맹이는 되돌아서 노인에게 소리친다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진 살지도 못할걸요.”

당돌한 꼬맹이다. 그런데 왜 서글플까. 나이가 들어서인가.

스무 자에 불과한 짧은 시인데 담긴 함축은 참으로 심장하다. 한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대목이다. (28)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한시는 이미지의 구성이 탄탄하고, 언외의 함축이 유장하다. 그로인해 한시의 감상은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바탕이 요구된다. (28)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 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이라고 한다. (29)

오늘날 시 쓴다는 저들 무리는

시의 바른 의미는 생각지 않고,

겉으로만 꾸며서 치장 일삼아

한때 기호 맞추기만 구하고 있다. (30)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이런 한탄은 있나보다.

시를 배우면서 그 뜻을 온축하지 않는 것은 거름흙에서 맑은 샘물을 긷고, 고약한 가죽나무에서 기이한 향기를 구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죽을 때까지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정약용 (31)

 

이명과 코골이

이명은 자기만 알고 남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코골이는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기만 모른다. ... 정작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명에는 쉽게 도취되면서, 자기의 코 고는 습관만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32)

 

두 번째 이야기 ; 그림과 시 사의전신론

그리지 않고 그리기

시와 그림은 전통적으로 서로 연관이 깊다.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란 말도 있다. (37)

한 번은 그림대회에서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 나네.” 라는 화제가 주어졌다. ... 달리는 말의 꽁무니로 나비 떼가 뒤쫒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서 향기가 나므로 나비는 꽃인 줄 오인하여 말의 꽁무니를 따라간 것이다. (39)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놀랍다.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그리는 허를 찌르는 화가다.

그리려는 대상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물 길러 나온 중, 말의 꽁무니를 쫒아가는 나비, 난간에 기댄 소녀, 피리 부는 뱃사공, 남녀의 신발 한 켤레로 대신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41)

 

말하지 않고 말하기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와 소통한다. (43)

흔히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운데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 반대로 독자는 시인이 하고 싶었지만 절제하고 걷어낸 말, 즉 행간에 감추어둔 뜻을 어떻게 충분히 이해하고 깨닫느냐의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된다. (45)

옛사람은 시를 지음에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게 하였다.” 시인이 다 말해버려서 독자가 더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46)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막으니

온종일 문을 닫아걸고 있으리. (48)

진흙탕 길은 곧 뜻있는 인사가 자신의 경륜과 포부를 펼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제한하는 현실의 상황이다. (49)

한시 자체의 내용을 아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 시가 쓰여진 시대적 상황까지 알아야 그 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의 어깨가 없다

마음은 미인 따라가고 있는데

이 몸은 부질없이 문 기대섰소. (53)

노새는 짐 무겁다 투덜대는데

그대 마음 그 위에 또 얹었으니. (54)

일상적인 예상을 빗겨가는 이러한 비약에는 참으로 사람을 미혹케 하는 예술적 매력이 넘쳐흐른다. (54)

 

정오의 고양이 눈

꽃이 활짝 피고 색이 말라 있는 걸 보니 이것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의 모란이다. 고양이 눈의 검은 눈동자가 실낱같이 가느니 이 또한 정오의 고양이 눈이다.” 예술작품의 진가는 이렇듯 알아보는 안목 앞에서만 빛나는 법이다. (58)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알기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관찰이다.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것이다. (59)

공이 실제 경물과 만나 먼저 이 구절을 얻었을 것이다. 나머지 구절은 그 다음에 만든 것이다. 시 전편의 참된 뜻이 모두 이 구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만 비점을 쳤다.” 비록 속인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안목 있는 사람 앞에서 가짜는 금세 판별되고 만다. (60)

이 대목을 보며 왜 내가 쓴 칼럼이 생각날까. 결국 중언부언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감동을 줄 수 없다.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반드시 능히 묘사하기 어려운 경치를 형상화하여 마치 눈앞에 있는 것같이 하고, 다하지 않는 뜻을 머금어 말 밖에 드러나게 한 뒤라야 시가 지극하게 된다.”

형상화하여 묘사하는 글이어야 하지 설명하거나 추상적 표현으론 감동을 끌어낼 수 없다. 이를 알면서도 쉽지 않다.

시인의 진실한 느낌이 없는 시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해도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맹자는 아무리 서시와 같은 미인이라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지나간다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고 있어도 올바른 표현을 얻지 못하면 읽는 이들은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는다. 또한 시는 본바탕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덕지덕지 화장한 여인의 분내를 경멸한다. (66)

 

세 번째 이야기 ;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

싱거운 편지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69)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빠끔히 내민 달과 친하다니 말이다. 그리움을, 보고 싶단 말을 이리 전하는 마음. 삼천 리 밖에서 보낸 편지치고는 싱거워서 뭉클한 사연이다. (69)

한시의 내용보다 해설이 더 한시를 빛나게 한다. 저자의 힘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

옛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 말 않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71)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72)

실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는 부질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73)

이황과 이이가 딱 한 번 만났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뻘인 두 사람은 잘 통했다. 서로 헤어지며 아쉬워했다.

필설로 옮기려 하는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져버린 기심,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취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언어는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74)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언어란 이렇게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고, 시비가 생겨난다. (76)

이걸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글은 말은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76)

이 글을 칼럼 제목으로 잡았다.

석가가 연꽃을 따서는 제자들에게 들어 보였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의아해할 때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하여 문자로 세울 수도 없고 가르쳐 전할 수도 없는 부처의 정법안장 미묘법문이 그에게로 이어졌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바로 이것이다. (77)

내 혀가 있느냐?

언어가 제아무리 불완전한 존재라 해도,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가 없다. (78)

사람의 마음도 뜻 없이 던지는 한마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79)

지난 번 내가 썼던 칼럼이 생각난다.

말하는 이의 입상이 듣는 이에게 진의되기까지는 이렇듯 몇 차례의 유추와 비약이 감행된다. ... 중과 부스럼, 이 두 사이에는 ----부스럼이라는 여러 단계의 유추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이 여러 단계를 복원시켜야만 의미가 비로소 파악된다. (79)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말해도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81)

맞다. 들을 혹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비가 오면 천지가 구분되지 않고 동서를 알 수가 없다. 바람만 불고 비가 오지 않으면 단지 나무의 가지만 보인다. 비는 오지만 바람이 없으면, 나무 끝이 축 처지고, 행인은 우산이나 삿갓을 쓰고, 어부는 도롱이를 걸친다. (82)

날씨를 주변 사물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니.

화면 속에 두 사람이 나오면, 으레 한 사람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고, 한 사람은 두 손을 맞잡는다. 가리키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고, 맞잡은 사람은 듣고 있는 사람이다. ... 이것이 바로 그림에서의 입상진의이다. (84)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섬돌 쓰는 대 그림자, 먼지는 그대로요

못을 뚫는 달빛에도 물에는 흔적 없네.

대나무 그림자는 바람에 일렁이며 섬돌 위를 빗질한다. 그래도 섬돌 위의 먼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달빛은 연못 밑바닥을 뚫고 비친다. 물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90)

멋진 표현이다.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시에서 입상진의를 귀히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막상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몇 줄의 교훈이거나,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단편뿐이다. (91)

시를 낱낱이 해부하여 파헤치고 나면, 남는 것은 언어의 시체뿐이다. (91)

 

네 번째 이야기 ;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당시와 송시

꿈에 세운 시의 나라

최치원은 당나라, 특히 화려하고 유미한 시풍으로 대표되는 마당 시기의 인물이니, 그가 당시풍을 추구한 것은 당연하다. ... 반면 송시풍을 추구했던 김시습은 자신의 뛰어난 역량에도 벼슬길에서 소외된 것이 불만스러웠고,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96)

소설형식을 빌어 이런 내용의 글을 쓸 정도면 당시와 송시의 차이가 얼 만큼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작약의 화려함과 국화의 은은함

당시를 두고 흔히 중국 고전시가의 꽃이라고 말하여 계절로 치면 봄에 해당한다고들 하고, 이에 반해 송시는 가을에 비긴다. (99)

당인은 광경을 즐겨 서술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 영묘가 많다. 송인은 의론 세우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 포진이 많다. (100)

당시가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취향이라면, 송시는 고전적이고 이성적인 취향이다. 감성의 욕구는 자칫 무절제로 흐르기 쉽고, 이성의 욕구는 논리의 함정에 쉬 빠진다. (101)

당시를 존중하는 사람은 송시를 배척하여 배울 바가 못 된다고 한다. 송시를 배우는 사람은 당시를 배척하여 나약해서 배울 것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모두 편벽된 이론이다. 홍만종 <시화총림증정> (103)

내가 전공한 인문학에서도 보이는 모습이다. 동양철학은 고루하게 취급하고 서양철학만을 추구한다.

 

당음, 가슴으로 쓴 시

예전부터 시에서 서정 함축을 중시하고 의흥이 뛰어난 시를 당음이라 하고, 생각에 잠기고 이치를 따지며 유현한 맛을 풍기는 시를 송조라고 일컬어왔다. (103)

이달이 언어로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은 서구 낭만주의 시들이 그려 보이고 있는 이국정서의 표출과 다를 것이 없다. (106)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흰머리의 어버이 근심할까 저어하여,

그늘진 산 쌓인 눈이 깊이가 천 장인데

올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적었다네. 이안눌 <집에 편지를 부치며> (107)

이와 같이 당시는 가슴으로 전해오는 정감의 세계를 노래한다. 때로 들뜬 어감으로, 간혹 슬픔에 젖어 노래하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는 법은 좀체 없다. (108)

송조, 머리로 쓴 시

대체로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선종과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다. 또 쓸데없는 수식을 배제하고 섬세한 관찰과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제재 상 일상생활에의 관심과 밀착이 두드러진다. (109)

이슬 젖은 풀잎은 물가를 둘러 있고

조그마한 연못 맑아 모래조차 뵈지 않네.

구름 날고 새 지남은 어쩔 수 없다지만

때때로 제비 와서 물결 찰까 걱정일세. 이황 (113)

여기서 퇴계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사물 자체의 세계가 아니다. 맑고 일렁임이 없는 연못은 사실은 일체의 삿됨이 끼어들지 않은 순수 무구한 마음을 상징한다. (113)

저자가 설명을 하니 알겠는데 그냥 보면 당시와 송시의 차이를 한 눈에 알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당시가 대상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레 시인의 정의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는 데 반해, 송시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를 대상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114)

당시는 짧은 글에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라 어렵고, 송시는 더 나아가 의미까지 읽어내야 하니 어렵다. 시를 어려워하는 내겐 두 사조 모두 읽기는 하나 그 뜻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뱃속에 넣은 먹물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115)

심의는 복수가 차서 배가 부른 것을 이색이 앞으로 40년 동안 인간 세상에서 사용하라고 넣어준 먹물로 치부하는 오만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하리.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116)

심의도 그래서 그런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자 소설형식으로 위안을 얻으려 한 건 아닐까.

 

다섯 번째 이야기 ;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의 정운미情韻味

남포의 비밀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남포란 말은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정운이 담긴 말이 되었다. (121)

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고, ‘은 이를 이어받아 보충한다. ‘에서는 시상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 2구와 3구 사이에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할 때, 4에 가서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 (123)

버들을 꺾는 마음

저 임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125)

당나라 때는 벗과 헤어지며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절류’,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남포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125)

의 중국 음은 머무른다는 의미의 와 똑같다. 그러니 버들가지에는 가지 말고 머물러달라는 의미도 있다. (126)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임 못 잡았네. 임제 <패강곡> ‘대동강 노래’ (129)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부채는 더운 여름날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다. 하지만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하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힌다. 마찬가지로 한때 내게 그토록 다정하던 임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131)

남포버들가지는 이별을, ‘가을 부채는 버림받은 여인이구나. 이 책을 다 읽으면 이런 많이 알게 되고 한시가 달리 보이겠다.

난간에 기대어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다. 그래서 누각에 오르거나 난간에 기댄다는 뜻의 등루’, ‘의루’, ‘의란혹은 빙란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긴다. (135)

아직 안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슬픔, 이별, 기다림에 대한 감정들이다.

한시에서 무제를 표제로 내거는 것은 마땅히 붙일 만한 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채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무제시는 이상은 이래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는 염정풍의 분위기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137)

 

저물녘의 피리 소리

향수는 그리움에 사무쳐 <옛날을 그리는 노래>를 지었다. 이후 석양 무렵의 피리 소리는 옛날을 그리워함, 또는 가고 없는 벗을 향한 그리움의 정운을 띠게 되었다. (138)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대개 특정의 어휘가 정운을 머금는 과정에는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내적 교감이 전제된다. (140)

동시대, 같은 나라에서 겪은 공감대라는 것이 작용하는 것이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143)

 

여섯 번째 이야기 ;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신문의 신간 소개를 보니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라는 제목을 단 수필집이 보이나. 여기서 그리고그림을 그린다인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인가. 아니면 단순히 ‘and’의 뜻인가. 또는 사람을 그려놓고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인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인가? 이 경우 언어는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기를 즐기지 않는다. (148)

한국어의 특징으로 주어, 목적어 등이 순서와 상관없이 올 수 있고, 조사도 생략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시는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동음이어도 존재한다. 여러 가지로 언어는 해석을 달리하기에 오해도 생긴다. 난 당연히 ‘and’로 생각했다.

 

오랑캐 땅의 화초

일상의 언어에서 의미는 어느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는 그른 것이 되지만, 시의 언어에서는 꼭 그렇지가 않다. 이 대목에서 모호성ambiguity의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150)

애매함(uncertain, ambiguous)과 같이 애매모호로 쓰다 보니 구분을 잘 못한다. 많은 부분 애매하면서 모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ambiguity’라는 말은 두 길로 몰고 간다는 뜻에서 나왔다. (150)

뛰어난 시는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극대화한 시라고 말해도 괜찮다. (150)

특히 춘래불사춘이라는 구절은 1980년 봄에 보 정치가가 당시 군부의 서슬 푸른 위세를 빗대어 말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던 사연 많은 구절이기도 하다. (153)

봄이 와도 봄 온 것 같지가 않네를 보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윤동주의 싯구가 생각난다. 며칠 전 <택시운전사> 영화를 봐서 더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나보다.

개가 짖는 이유

첫째 개가 짖어대자

둘째 개가 짖어대네.

셋째 개도 따라 짖으니

사람일까, 범일까, 바람 소릴까?

산 달은 촛불처럼 환히 밝고요

뜰에는 오동잎새 소리뿐예요.“ 이경전 (155)

환한 달밤이면 개들은 제 몸을 비비 꼬며 달빛을 보고 컹컹 짖어댄다. (156)

지지배배 지지배배 쉴 새 없는 그 소리를, 시인은 시시비비 시시비비쯤으로 듣고 있다. 일껏 시비를 벗어나고자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있는 나에게 제비가 자꾸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좀 더 가늠해보고자 따지는 것 같더란 뜻이다. (158)

이렇듯 모호성은 문화적 교양이나 문화 관습을 공유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158)

이렇게 설명을 듣고 나니 재밌기도 하고 이해도 잘 된다.

 

무지개가 뜬 까닭

한시에서 모호성은 흔히 문장 성분이 생략되어 그 여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한다. (158)

백로 하나 버들 뿌리 밟고 서 있고

백로 하나 물속에 그냥 서 있네.

산허리 짙푸르고 하늘은 캄캄한데

무수한 백로들이 번드쳐 날아간다.

아이가 소를 타고 시내를 첨벙대자

시냇물 건너편에 무지개가 오르누나. 박지원 <도중에 날이 잠깐 개어> (160)

소 탄 아이의 첨벙대는 물장난이 백로를 놀래 깨웠고, 백로의 비상이 날을 개게 하고 무지개를 띄웠다. 자연이 인간과 만나 하나로 교감하는 현장이다. (161)

한문으로 된 한시를 한글로 해석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다시 해설까지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저자다.

시인은 제목으로 분위기를 잡아놓고, 정작 시 속에서는 독자의 예상을 외면하고 딴청을 부렸다. 여기에서 의미의 단절이 온다. 단절을 채워 제목과 본문을 잇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겼다. (162)

 

백발삼천장

흰머리 풀어헤쳐 삼천 장 됨은

근심으로 이다지 길어진 걸세. 이백 <추포의 노래> (162)

어느 날 우연히 거울을 보다가 문득 흰머리를 발견하고 놀란 마음을 삼천 장의 길이로 환치하여 다짜고짜 백발삼천장의 표현으로 말문을 열었다고 본 것이다. (163)

같은 걸 보고도 이렇게 표현하는 건 아무나 못하는 것~

백발삼천장은 시인의 머리칼이 아니라 달빛을 받아 흰 깁을 펼쳐놓은 듯 길게 흘러가는 추포의 강물 줄기로 보아야 옳지 않을까? 안 그래도 시름에 겨워 있던 시인은 좀 전에 흰 깁 같다던 강물을 굽어보다가 문득 네 머리칼도 나처럼 희게 세었구나.’ 하는 탄식을 떠올렸던 것이다. (164)

이건 저자만의 생각이라는 건가?

이백이 쳐놓은 언어의 그물에 고금의 독자들이 다 걸려들었던 것일까. (165)

~ 해석이 저마다 다르다는 거네. 여섯 번째 이야기가 모호성에 관해서였으니 그런 한시를 예를 들은 거구나.

사전을 찾아보면 병주는 흔희 2의 고향이란 의미로 나와 있다. (166)

서울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전원의 목가적 풍광을 사모한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면 며칠이 못 되어 다시 도회의 번화한 풍광과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립게 마련이다. (166)

또 병주란 말은 망향과 그에 따른 모순 심리의 정운이 담뿍 담긴 말이 되었다. (168)

 

뱃속 아이의 정체

4구는 울며 보내고 돌아올 때 뱃속에 있던 아이 편에요.”라고 옮겨야 한다. 뱃속에 아이가 있던 시점은 여러 해 전 남편이 수자리 살러 떠나던 당시다. 그러니까 그때 뱃속에 있던 그 아이가 아버지의 겨울옷을 가져다주러 변방으로 떠날 만큼 자랐다는 말이다. (170)

꼼꼼한 독시의 과정 없이 무성의한 치레나 선입견에 의한 오독으로 일관하는 이런 해설은 오히려 독자의 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172)

한시를 읽는다는 것은 우선 한자를 모르니 어렵고 그 시의 작자나 시대적 배경과 정운을 모르니 해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제대로 해석한 한시를 읽는 것이 나 같은 독자에겐 현명한 방법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172)

 

일곱 번째 이야기 ; 사물과 자아의 접속 정경론情景論

묘합무은, 가장자리가 없다

봄날 해는 느릿느릿

가을 바람 스산해라.

정을 줌은 건네듯이

흥이 읾은 답하는 듯. 유협의 문심조룡<물색> (175)

봄날의 하루해는 느릿느릿 좀체 흐르지 않고, 가을바람은 공연히 뼈에 저밀 듯 스산한 마음을 일으킨다. 마음에 일어나는 정을 건네듯 사물에 보내면, 사물은 답이라는 듯이 흥을 불러일으킨다. 경물은 이렇듯 시인의 눈 속에서 어느 순간 정으로 착색된다. 숲과 구름이 한데 합쳐지듯 경과 정은 하나로 결합되어 분리할 수가 없다. (175)

선녀의 옷은 꿰맨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천의무봉이다. 정과 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도 이와 같다. (176)

전과 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미묘한 줄다리기는 시 감상의 즐거움이다. 시인은 가장자리를 굳이 감추려 들고, 읽는 이는 경물 안에 감춘 시인의 정을 자꾸 들춘다. (177)

 

정수경생, 촉경생정

비경우는 아론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시는 정을 일으키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편편마다 정을 마구 늘어놓으면 마침내 제멋대로가 된다. 시는 경이 핍진함을 높이 친다. 다만 작품마다 경을 펼치면 조잡하고 천박해진다.” 정과 경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서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좋은 시다. (179)

핍진함진실에 이름, 사실대로 묘사함. 이란 뜻인데 처음 보는 표현이다.

시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라면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것도 마다할 것 없다고 스승은 제자를 부추겼다. ... 그깟 시가 무어라고 불법 월경도 마다 않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애를 썼더란 말인가. 시키는 스승이나 하란다고 하는 제자나 다 딱하다. (180)

 

이정입경, 경종정출

팔백 곡 후추를 쌓아두다니

어리석음 천 년 두고 비웃는도다.

어이하여 벽옥으로 됫박을 삼아

종일토록 명주 구슬 되고 또 되나. 최해 <빗속의 연잎> (186)

정을 먼저 경의 뒤에 둔 한시형태다. 연잎에 비가 계속 내려 구슬로 가득하다는 탐욕이 끝이 없다는 걸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1,2구의 원재의 탐욕을 뒤집는 반전이란다.

 

정경교융, 물아위일

드러낼 듯 감추는 데서 정의 맛이 깊어진다. 시시콜콜한 묘사를 버리자 경이 한층 살아난다. 사실 녹아든 정과 경의 경계를 갈라 구분해내기는 쉽지가 않다. (189)

봄 그늘 찌푸려도 새들은 조잘대고

늙은 나무 무정한데 바람만 서글프다. 박은 <복령사> (190)

시인의 정이 경에 녹아들어 가장자리를 찾을 수 없다. (190)

 

지수술경, 정의자출

시인은 그저 경상을 묘사하면서 정의가 절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왜 경만 보여주는가? 저도 모를 정서를 말로 표현하기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쉽지 않다. 효과도 신통치 않다. (195)

탱자나무 울타리에 낮은 사립 닫아걸고

참을 내간 아낙네는 돌아올 줄 모르네.

멍석에 나락 쬐는 추녀 밑은 조용한데

병아리는 짝을 지어 울 틈새로 나온다. 양 경우 <시골 풍경> (195)

시 곳에서는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고 만다. (197)

 

즉정견경, 정의핍진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198)

여덟 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누움이 외려 편하겠구나.

흰 눈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어밀 떠나 추위 모름 가슴 아프다. 이필운의 부인 남씨 죽은 손녀 애도시 (199)

슬픔이 지극하면 외물을 끌어들일 여유도 없다. 네 구 모두 정의 술회임에도 그 감정의 절절함이 비탄에 빠지지 않은 애이불비의 경계를 얻었다. (199)

 

여덟 번째 이야기 ; 일자사 이야기 시안론詩眼論

한 글자를 찾아서

서거정이 동인시화에서 말했다. “시는 묘함이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 (205)

온종일 찾아도 못 얻겠더니, 때로는 저절로 찾아오누나라고 노래한 이도 있다. (206)

한시의 함축적인 글과는 다르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소재도 중요하지만 표현도 중요하다. 적절한 단어를 쓰는 것이 쉽지 않다.

 

뼈대와 힘줄

정말이지 시에도 눈이 있다. 시의 빗장을 옳게 열려면 시의 눈, 즉 시안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209)

시안은 글자 그대로 시의 눈알이다. 시안은 시에서 가장 정채롭고 시인의 정신이 집약된 지점,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의 경락이다. (210)

시안이란 바로 한 편 시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자리다. 시의 힘줄과 뼈대가 바로 이곳에 모여 있다. 이로 인해 전체 시는 갑자기 생동하는 활기를 띤다. (211)

삼산은 하늘 밖에 반 너머 떨어지고

이수는 백로주서 가운데가 나뉘었네. 이백 <봉황대> (211)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5언시의 경우 세 번째 글자가, 7언시는 다섯 번째 글자가 안자가 되는 수가 많다. (213)

앞으로 한시를 보면 이걸 염두에 두고 읽어봐야겠다.

한 글자의 스승

천 길 벼랑 말 세우자 몸이 너무 피곤해

나무에 시 쓰려니 글자가 되질 않네. 이민구 금강산 놀러갔다 지은 시 (219)

원래는 지쳐서 글자가 써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고친 것은 반쯤 썼지만() 너무 지쳐 마저 쓸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219)

 

일자사의 미감 원리

일자사의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 시는 중복을 꺼린다. 한 글자도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221)

두 번째 미감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223)

세 번째 미감 원리는 시상의 온유돈후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직감적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어진다. 모난 말보다는 가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 (227)

 

시안과 티눈

시안에는 시집 전체의 눈도 있고, 한 편의 눈도 있다. 몇 구절로 눈도 있고, 한 구절의 눈도 있다. 몇 구절로 시안을 삼는 경우도 있고, 한 구절로 시안을 삼는 경우도 있으며, 한두 글자로 시안을 삼는 경우도 있다.” (230)

옛사람은 돌에 티눈이 박혀 있으면 벼루의 흠으로 여겼다. 나는 또한 말한다. 시구 가운데 눈이 있으면 시의 한 흠집이 될 뿐이다.” 호응린 시수(231)

시인은 시안을 연마할 때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시안은 시안을 감추는 장안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 없이 그저 남의 눈이나 놀라게 만드는 수사적 기교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231)

 

아홉 번째 이야기 ; 작시, 즐거운 괴로움 고음론

예술과 광기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광기가 있다. 그들 안에서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235)

그렇다. 그럼 과연 나는 글쓰기에 미쳐있는가? 안 쓰고는 못 베길 정도는 되는가?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글 쓸 필요없다고 까지 하는 작가도 있다. 그러면서 잘 쓰고 싶은 이 마음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이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237)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그는 타고난 시인 기질을 어쩌지 못해 불의를 좌시하지 못했다. 부딪치는 일마다 얼음에 숯 같았다. 시 지을 때만은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조차 까맣게 몰랐으니, 그는 삶의 의미를 시 속에서 찾았던 타고난 시인이었다. (240)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권필 (240)

주흥사가 하룻저녁 사이에 천자문을 만들어 올렸는데 수염과 머리칼이 다 세어버렸다. 돌아와서는 두 눈을 한꺼번에 실명하고, 죽을 때에는 마음이 단전을 떠난 것 같았다. 사령운은 반나절 만에 시 100편을 짓고 갑자기 이가 12개나 빠졌다. 맹호연은 눈썹이 모두 떨어졌다. 위상은 초사76권을 저술한 후 심혈이 다 닳아 죽고 말았다.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창작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24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실제 맹교는 한 편의 좋은 시를 지을 수만 있다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것 이상의 고통을 달게 여겼을 시인이다. (243)

얼 만큼 시를 좋아하면 이렇게까지 될까.

<가을날 거처에서 선달에게 부치다>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백년 인생 뜻 맞는 일 없어도 괜찮지만

하루라도 시 안 짓곤 견디기가 어렵다네. 한유 (244)

가도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으며 빌었다. “이것이 내가 한 해 동안 고심한 자취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249)

 

가슴속에 서리가 든 듯

두목은 시작의 괴로움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시 읊는 괴로움을 알고 싶은가

가슴속에 가을 서리 서린 듯하네.

시로 태운 가슴이 얼마나 뜨거울까마는, 그간의 고초를 생각하면 차라리 가슴속에 차디찬 가을 서리를 품은 듯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전혀 엄살이나 과장으로 비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냉혹하리만치 준엄했던 옛 시인의 시정신 때문이다. (250)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이를 고쳤다. 완성 후에 보면 처음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252)

이 정도면 퇴고라고 하기보다 다시 쓰기다. 질리지도 않을까?

아무 짝에 쓸모없는 줄 잘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253)

작가 중에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어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사람 만나고 먹고 놀고 즐거우면 글 쓰지 말고 그리 살라고 하더라.

 

개미와 이

김시습은 <능허사>를 이렇게 노래했다.

굽어보니 땅덩어리 너무도 아득한데

대붕은 잘 안 뵈고 하루살이만 우글대네. (256)

시인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이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헐고 뜯고 싸우는 인간의 작태를 비웃고, 때로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존재다. (256)

사실 실용으로 말하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 끙끙대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257)

사실 세상에는 쓸모만으로 따지면 맥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예술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지도 못한다. (258)

 

열 번째 이야기 ; 미워할 수 없는 손님 시마론詩魔論

즐거운 손님, 시마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시마가 한번 붙으면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된다. 더욱이 짓는 시마다 절창 아닌 것이 없다.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263)

시마는 시인에게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리는 재미난 귀신이다. 일단 시마가 붙으면 잠시도 시를 떠나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시마가 훌쩍 떠나가면 시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뿐 아니라, 제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없게 된다. (264)

이건 좀 말이 안 된다. 물론 신들린 것처럼 쓴다는 게 있기는 하겠지만, 쓰고 싶은 맘이 없어지는 것도 이해되지만, 그걸 귀신이 떠나버린 거라는 것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시마와의 논쟁과 시마 증후군

두 작품 모두 가난과 궁상이 시인에게 압승을 거둔다. 오죽 가난과 궁상을 달고 살았으면 몰아내고 쫓아낼 궁리까지 했을까 싶다가도, 그나마 축출에도 성공 못하고 일장훈계만 듣고 물러앉았으니 안쓰럽고 처량하다. (267)

한마디로 시마의 증세는 시 외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현상이다. (268)

뭐에 미쳤다는 것과 같은 것일 거다.

 

시마의 죄상

첫째,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다.

둘째, 천기를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다.

셋째, 삼라만상의 온갖 형상을 닥치는 대로 남김없이 옮겨내서 겸손할 줄 모르는 죄다. (270)

넷째, 제멋대로 상 주고 벌 주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여, 뽐내며 거들먹거리는 죄다.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고 머리 빗기를 게을리 하며, 공연히 끙끙대고 인상을 써서 갖은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다. (271)

이 정도는 완전 미친 모습이다.

이규보와 최연이 제시한 시마의 죄상을 뒤집어 읽어보면 바로 시인 예찬론에 지나지 않는다. (272)

 

시귀와 귀시

시마가 시인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라면, 시귀는 일회적으로 시인의 입을 빌려 대신 노래하게 하거나, 스스로 직접 나타나 시를 읊기도 하는 귀신이다. 이 시귀가 지은 시가 귀시다. (273)

귀시를 읽으면 귀신 들리는 건 아닌가?

평소 얼마나 시로 마음을 졸였으면 꿈속에서 시를 짓겠는가. 요즘 시인들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274)

나도 이런 적이 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꿈에 나타나고 그 생각을 적고 다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노래한 것일 따름이다. (279)

 

귀신의 조화와 시인의 궁달

조기종이란 서생이 남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구두도 뗄 줄 모르고 시 지을 줄도 몰랐다. ... 꿈에서 깬 뒤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옮겨 적어 벽에 붙여 놓았다. 그는 그 이튿날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이것이 귀신이 시로 사람을 죽인 이야기다. 소문쇄록에 실려 있다. (281)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시마는 한마디로 옛사람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시귀는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이다. (282)

배부르고 따뜻함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283)

결핍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모두 시인이 될 수 있다.

 

열한 번째 이야기 ; 시인과 궁핍 시궁이후공론

불평즉명, 불평이 있어야 운다

시는 왜 쓰는가? 말로는 풀리지 않을 시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름도 노래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287)

사물이 우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말미암은 불평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은 마음이 평정을 잃은 상태, 달리 말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다. (287)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답거든 열매의 내실을 기대할 수 없다. 날개를 단 채로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태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288)

요즘 베스트셀러 작가는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린다. 작가들 중 많은 비중은 아닐지라도.

 

나비를 놓친 소년, 발분서정의 정신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글 솜씨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 글을 지을 때 품었던 마음자리를 얻는 것이다. 연암은 그 참신한 붓을 들어 사마천의 마음을 나비를 잡으려다 놓친 소녀에 견주어 설명한다. ..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잡았으리라는 자책감, 혹시 누가 내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움, 바로 이런 모종의 안타까우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를 지을 때의 마음이라고 했다. (290)

다음 [사기열전]을 볼 때 염두에 두고 봐야겠다.

시인은 코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294)

 

시궁이후공과 시능궁인

시궁이후공’, 시가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논의와 시능궁인’,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관념으로 나뉜다. ... 시궁이후공은 궁핍한 환경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잘 쓰게 한다는 말이고, 시능궁인은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의 궁핍을 가속화한다는 말이다. (294)

이런 말 때문에 문인들이 더욱 부귀를 멀리한 것일까.

시능궁인과 시궁이후공은 역의 명제다. 하지만 실제 이 둘은 모순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불만족의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려는 모순적 충동지향이 바로 시능궁인의 사고를 잘 설명해준다. 시궁이후공이라 할 때 궁은 공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공은 궁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296)

이때 궁은 물질적 빈궁보다 실의와 좌절 같은 정신적 상태에 가깝다. 단순한 경제적 결핍은 시인의 발분 욕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 측면이 배제된 궁은 궁이 아니라 빈이다. (297)

궁과 빈을 다르게 보는 것이었군. 정신적 측면만이라면 피폐해져서 시를 쓸 수 없지 않나.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

한 편의 시가 뛰어난 작품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상성을 뛰어넘는 인식의 갱신이 필요하다. 이는 현실과 밀착되어 있을 때에는 알기 어렵다. (298)

예로부터 두루 살펴보니, 시에 능한 사람은 산림초택의 밑에서 많이 나왔다. 부귀하고 권세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시에 능하지 못했다. 이로 볼 때 시는 실로 작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또한 알 수 있다.” (300)

 

시와 궁달의 관계

궁의 상태는 예민한 감각을 길러준다. 가슴속의 불평이나 울분이 촉수가 되어 시를 더욱 우수하게 만들어준다. (301)

궁한 이의 시가 모두 좋은 것도 아니다. 현달하고도 시가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302)

그럼 당연하다. 앞에서 계속 궁한 게 좋다고 해서 의문스러웠다.

 

탄탈로스의 갈증

궁한 뒤에 시가 더 좋게 된다는 말은 예외를 인정치 않는 사실 명제도 아니고, 의당 그래야만 할 당위 명제도 아니다. (306)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308)

 

열두 번째 이야기 ; 시는 그 사람이다 기상론

이런 맛을 아는가?

대장부의 호방함이 이에 이른다면 까짓 세속의 잡사 따위야 거칠 것이 있겠는가? (311)

기상론은 대장부에 국한된 내용이겠다.

당리당략에 얽매여 동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벼슬길을 코 묻은 떡을 다투는 아이들에 비유했다. 그 호방함 속에 일말의 누추함도 찾아지지 않는다. (314)

 

시로 쓴 자기소개서

문여기인.’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무심히 내뱉는 말 속에 이미 그의 인생관이나 처세의 방식이 드러난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314)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물론 전혀 다른 사람도 있다. 하지만 꾸민 글인지 솔직한 글인지는 느낄 수 있다.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 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은 삶의 외형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318)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어딘가 위축되고 초라하고 곧 허물어지고 말 것 같은 허망감이 시 전체를 감싼다. 그는 결국 일생을 곤궁과 불우 속에 살다가 세상을 떴다. 사람의 기상이 이렇듯 언어에 그대로 떠오르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320)

 

강아지만 반기고

과거 급제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보니 시화 중에 이를 제재로 한 시가 제법 나온다. (323)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옛날엔 벼슬길에 나가는 과거에, 지금은 대학이라는 입시에 몰두하고 있다. 사회학자 중엔 우리의 입시문제는 과거시험에서 기인한다고 본 사람도 있다.

낭군께선 우뚝한 재주를 지니시곤

무슨 일로 해마다 낙제하고 오십니까?

이제는 그대 낯을 뵙기 부끄러우니

그대여 오시려면 밤중에나 오소서. (324)

과거에 낙방한 남편에게 창피하니 밤에 오란다. 대단한 부인이다.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더니, 막상 급제하고 보니 종전의 고향 생각은 간데없고 장안의 미희를 끼고 놀 생각부터 급하다. 지난해의 시와 견주어볼 때 시의 기상이 판연하여 마치 다른 사람의 시 같다. (325)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한 달 남짓 찌는 장마 퀴퀴한 기운 쌓여

사지도 나른하게 아침저녁 보냈는데,

초가을 푸른 하늘 툭 터져 해맑더니

끝까지 바라봐도 구름 한 점 없어라.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정약용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326)

요즘 같은 날씨에 딱 어울리는 시다. 어서 이런 날씨가 됐으면 싶다.

 

자족의 경계, 탈속의 경지

시는 곧 그 사람이다.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기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그 연원이 깊다. 무심히 뱉은 말이 씨가 되고,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시화에 자주 보이는 시참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길러야 한다.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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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5 09:11:00 *.106.204.231

앞부분을 조금밖에 안 읽었는데 뒤에는 더 주옥같은 말들이 많네요. 이 책 참 좋아요.

글을 써야 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핍진한 글을 쓰는 어려움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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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7 06:34:09 *.124.22.184

 중간엔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라 힘들더라구요. 한시보다 해설이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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