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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4일 06시 02분 등록

노동과 경영 19회 - 한국적 생산방식, 그 가능성을 찾아서(4) : SLIM system

1990년대 후반 삼성전자 반도체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의 시장 점유율이 확대되고 최신 제품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 끝나고, 만들면 팔리는 시장에서 만들어도 다 팔리지 않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생산량이 매출인 셀러스마켓(seller's market)에서 공급력이 확대되면서 바이어스마켓(buyer's market)으로 시장 상황이 바뀌고 있는 것이었다. 생산능력 자체가 생산성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하던 기흥의 생산라인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제조공기가 너무 길었던 것이 영업 상황을 매우 악화시키고 있음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제조공기가 길다는 것은 생산라인 내 흘러가는 재공의 양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월간 4만장을 생산하는 라인엔 15만 장 이상의 웨이퍼가 쌓여있었다. 그렇지만 목표 생산량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효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설비는 종류가 다른 수많은 제품과 공정의 작업을 진행하는데, 제품의 종류가 바뀌면 이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과 세팅 과정이 추가로 필요해진다. 따라서 동일한 제품의 동일한 공정을 연속하여 진행하는 것이 시간의 손실없이 작업을 할 수 있고 이는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즉, 제공을 많이 유지하는 것이 셀러스 마켓에서는 최고의 생산철학이었고 이는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반도체 양품생산의 기준인 수율이 떨어지거나 불량품이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높은 청정도를 유지하면서 작업해야 한다. 그러나 제조공기가 길어지게 되면 청정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작업과정 속에 노출되어 있으면 오염의 가능성을 높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양품이 생산되는 비율의 측정단위인 수율을 낮추게 된다. 그리고 한 공정에 이상이 생기면 이를 재작업하거나 또는 폐기해야 하는데 잘못을 발견하였을 당시 이미 해당 작업을 수행한 웨이퍼는 기본적으로 재공이 많기 때문에 불량품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산과정과 수반되는 제반의 라인 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고 전파하기 위한 태스크포스가 처음으로 한 일은 SLIM이라는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Shot cycle time and Low Inventory in Manufacturing의 줄임말로 제공을 줄이고 제조공기를 줄이자는 단어의 자체 의미와 부합되었다. 생산라인엔 15만 장 이상의 제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관념은 SLIM이라는 단어에 의해 일격에 무너졌다. 모든 작업자가 SLIM하지 못한 것을 바라보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개념과 철학이 바뀌면 일하는 관점이 바뀌는 법이다. SLIM이라는 개념과 철학은 복잡한 생산공정으로 많은 재공을 유지하던 반도체 최고의 전문가들의 일하는 관점을 바꾸게 되었고 단계적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한 많은 방법론이 생산라인 내에서 스스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120일 이상이던 제조공기는 현재 30일 이하로 줄었다. 이에 비례하여 제조라인의 재공량도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반도체 제조는 시장에 가장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계로 바뀌었다. 이를 지원하는 많은 종류의 정보 시스템이 개발되었고, 이제는 SLIM이 생산의 기본 철학이 되었다. 당시에 비해 현재 4만장 제조라인에 4만 장의 재공으로도 생산량은 오히려 늘어났다.

위 사례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났던 생산방식의 정형화 과정 중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아직 이 방식이 반도체 전체 생산공정의 기본 운영원리가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조직원 모두를 동일한 개념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개념의 명확한 전달로부터 시작되고 이는 개념을 함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명칭으로부터 시작된다. 포드 생산 시스템이 컨베이어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고, 도요터 생산 시스템은 간반 하나로 개념을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 SLIM이라는 개념이 반도체 공장 전체에 전달되면서 생산관리의 철학이 바뀌게 된 것이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만큼은 가장 단순한 이름의 생산철학이 된 것이다. 제조의 전체 흐름을 결정짓는 것은 수많은 정보시스템이 아니라 이를 총괄하는 생산철학과 생산방식이며, 이것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방법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은 한국이 단시간 내에 세계적 경쟁력을 얻은 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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