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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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스민 문학]
휴가철에 만난 야생과 광기의 밤
- 마루야마 겐지 <파랑새의 밤>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휴가 없는 삶을 보냈습니다. 휴가를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삶을 살다가 정식으로 ‘조직’에서 ‘허가’를 받아 가는 휴가를 가는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여행 가방에는 지난 주 [일상에 스민 문학]에서 소개 해드린 '휴가에 읽을 만한 고전 문학'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넣었습니다. 또, 제가 사랑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새로운 책,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는 일착으로 챙겼습니다. 평소 잘 찾아있는 기사를 써주시는 박돈규 기자님의 책 <비행기에서 10시간>과,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파랑새의 밤>을 가지고 갔습니다.
부피만 보면 유럽 배낭여행을 가는 것 같지요? 그것에 비해서 장소는 아주 소박한 곳이라 말씀드리기도 민망합니다. 장소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히려 소박한 장소를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 싶은 마음에서 책이라도 마음껏 가지고 가고 싶었나 봅니다.
<등대로>는 이미 몇 번 읽어서 그런지, 내용보다는 전에 밑줄 그은 문장과 버지니아 울프 특유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라가다 보니 금방 읽었습니다. 저는 책을 그리 빨리 읽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 제가 빨리 읽는 정도면 '이젠 그 작품에 익숙해지지 않았나' 하는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책과 박돈규 기자님의 책은 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기도 하고요, 제가 주목한 책은 바로 마루야마 겐지의 <파랑새의 밤>이라는 책입니다. 참고로, 이해인 수녀님의 책은 꼭 여러분께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나중에 꼭 한번 말씀드리기로 약속드립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제가 참 좋아하는 일본 작가입니다. 그는 23세때 쓴 단편 <여름의 흐름>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 최연소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소설을 쓰기 위해 일본의 북알프스로 불리는 고향 오마치로 돌아가 집필에 전념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단과 인연을 끊고 주겠다는 문학상도 모두 거절한 채, 오로지 자신이 쓰고 싶은 글만 수도자처럼 작품 활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저는 <물의 가족>과 <천 년 동안에>라는 작품을 읽었지만, 보다 좋았던 것은 <소설가의 각오>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와 <나는 길들지 않는다>와 같은 산문집입니다.
이 책을 고른 것은 순전히 ‘2000년에 발표한 이후 14년에 걸쳐 퇴고해 내놓은 장편’이라는 출판사의 광고 때문이었습니다. 14년동안 고치고 또 고쳤으면 무언가 대작이겠지.. 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런 작품, 맞습니다!
작가의 대부분 작품처럼 이 책 역시 고향으로 돌아온 지친 사내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온 55세 남자입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가 도시에서의 노동에 거의 실명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내는 퇴직금을 현금으로 가방 밑에 깔고 '제대로 죽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는 버스에서 내리자 곧바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양복은 벗어던지고, 와이셔츠는 쫙쫙 찢어버리고, 넥타이와 구두는 분뇨 구덩이에 처박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사연이 있습니다. 누이는 누군가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그 일을 계기로 아우는 사람을 죽였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머니는 자살했으며, 아버지도 사망했습니다. 아내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떠나버렸습니다. 게다가 점차 눈이 어두워지기까지 합니다.
죽음을 연습하던 주인공은 살해당한 누이의 살인자와 우연히 맞닥뜨리고, 폐가로 변한 생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우를 찾아내 집과 함께 불태우게 됩니다. 작품 내내 어둡고 강렬한 서사가 산과 달, 강물 소리의 손에 잡힐듯한 묘사 속에 이어집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극단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숲속을 헤매는 짐승과도 같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광활한 자유와,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생명력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가족과 사회의 모든 인연에서 스스로 떨어져나와 죽을 자유를 누리면서 마음껏 산속을 헤매는 '짐승과도 같은' 기이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주인공의 독백과 광기를 따라 가다보면, 몽환적인 자학과 가학, 야생과 광기가 뒤엉킨 ‘파랑새의 밤’을 느끼실 수 있을 듯 합니다. 킬링 타임용 위로를 선사하는 잔잔한 소설을 기대한다면 외면하는 게 좋으실 듯 합니다.
내년 휴가 때는 정말 ‘말랑말랑’한 소설을 가지고 가야겠습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온다 리쿠’같은 일본 소설이나, 현재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책들로는 <언어의 온도>나 <82년생 김지영>,<잠>과 같은 책을 미리미리 챙겨야하겠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떤 책을 추천해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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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휴가다운 휴가를 가 본지 거의 5년이 되어서 그런지 들뜬 마음에 지난 주에 제 순서가 아닌데 마음편지를 보냈습니다. 일종의 ‘번외편’으로 생각해 주셔도 좋고, ‘서비스’로 생각해주셔도 좋을 듯합니다. 원래 순서인 수희향님께는 죄송하다는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