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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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식습관이 좋지 않다. 20대 때부터 인스턴트 식품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난 죽으면 방부제때문에 썩지도 않을거야’라며 떠들고 다녔다. 그렇게 몸에 좋지 않은 자극적인 음식은 죄다 먹어대다가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되면서부터야 먹거리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옛날처럼 집에서 닭이나 소를 키울 상황은 못되지만 최소한 채소는 집에서 키우자 싶어 고추, 상추, 깻잎, 쪽파, 파, 감자, 방울 토마토 등등을 텃밭에 심었다. 그런데 아이들 방학을 맞이해서 여기 저기 다니느라 여름 내내 텃밭에 신경을 쓸 상황이 못되었다. 게다가 비도 많이 와서 집에 돌아와보니 텃밭이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비를 맞고 잡초들이 쑥쑥 게다가 튼튼하게 큰 것이다. 쪽파가 필요해서 텃밭을 둘러다 보는데 마치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흰머리를 찾아 뽑듯이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쪽파를 찾아야 했다. 텃밭도 부지런하고 재주가 있어야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스스로 한심해 하며 억센 잡초들 사이에서 드디어 그 가느다란 쪽파를 찾아냈다. 쪽파는 가늘고 힘이 없어서 숨바꼭질의 난이도가 셌다.
문득, 잡초의 생명력이 이렇게 강하면 그만큼 약성도 강할 터인데 우리는 왜 잡초는 먹지 않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잡초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알아서 자라는 반면, 채소는 거름도 줘야 하고 물도 줘야 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같은 생명인데 왜 잡초는 무지막지하게 뿌리 채 뽑아내야 할까. 나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겠지만 잡초를 뽑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해서 잡초는 그냥 두고 필요한 채소만 뜯어서 먹었다. 그렇게 우리 집 텃밭에서 잡초는 학살 당하지 않고 살아 남아 다종자 텃밭의 당당한 구성원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채소를 뜯는 와중에 잡초가 딸려 오는 경우가 종종 생겼고 그렇게 우연히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온 잡초는 의외로…
먹을 만 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잡초였다. 채소도 아니고 약초도 아닌 이름 모를 잡초가 그렇게 우연히 딸려 왔다가 그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속 맛을 보인 것이다. 씁쓸한 가운데 야생의 거친 맛이 있어 내 입맛에 맞았다. 생명력은 이런 잡초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잔디조차 맛있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누군가도 이런 발견을 했을 거 같아 ‘잡초’, ‘먹거리’, ‘요리’ 등으로 검색하니 과연 이 분야의 덕후가 나온다. 심지어 ‘잡초 레시피’라는 책까지 있다. 이 책을 낸 분들은 시인 부부였는데 그 분들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마당에 무성한 잡초를 먹거리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잡초 중에서도 먹을 만한 것이 있고 아닌 것도 있을 것이며, 요리의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잡초 레시피’라는 책까지 내게 된 시인부부는 가끔 강원도에서 강남으로 가서 주부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기도 한단다. 강원도 산골 허름한 집에서 먹을 것이 없어 잡초를 음식으로 보게 된 가난한 시인부부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에서 ‘잡초 레시피’로 강의를 하는 장면을 생각해봐라. 뒷통수가 얼얼한 가운데 뭔가 마음이 통쾌해온다.
그 분들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보통의 농산물은 농약도 많이 치고 사람의 손을 타서 약해지지만 잡초는 스스로 힘을 키우는 강한 생명력이 있고 그것이 약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스스로를 지키려는 그러한 힘이 독성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텃밭을 하면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해결되는 말이었다. 그 약한 채소를 제초제를 뿌려 가면서까지 키우려고 하지만 제초제에도 불구하고 잡초는 그 생명력 넘치는 고개를 들이민다.
이제부터 잡초를 먹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일상에서 시야의 밖, 사고의 밖에 있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해온 대상을 눈 여겨 보자는 것이다. 그러한 시선이 어떤 영역의 개척자, 선구자, 전문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주위에 잡초 같은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면 뽑아대려 하지 말자.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모범생 타입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평균은 치는 행태를 취한다. 잡초 같은 인간은 텃밭이라는 조직에서 뽑혀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독초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약초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자의 말씀은 풀의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三草之生 必有藥草(삼초지생 필유약초, 세 종류의 풀이 자라면 그 가운데 반드시 약초가 있다).
식탁에 딸려 온 잡초로 인해 많은 잡생각이 이어지고 말았다. 시인부부는 강원도 원주에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잡초비빔밥을 하신다고 하니 조만간 한번 들러봐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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