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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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직장생활을 하던 중 돌연 찾아 온 질환 때문에 휴직을 하던 중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연년생을 출산하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8년을 지냈다. 이젠 아이들도 얼추 크고 남편이 하는 일도 자리가 잡혀서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대'라는 것은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인 낮 시간이다. ‘엄마’의 오후 4시는 마치 신데렐라의 12시처럼 아이들에게 즉시 소환되어야 하는 마법이 풀리는 시간이다.
아이들을 등교 시키고 책을 좀 읽을까 하고 카페에 들어선다. 신도시의 카페는 엄마들의 시공간이다. 엄마들의 개인적 시간이 허락되는 낮 시간, 그리고 카페라는 공간. 같은 행성에 사는 같은 종족이거늘 이 순간에 나는 그들과 섞이지 못하고 책이라는 행성으로의 진입이 어렵다. 다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시댁과 남편, 아이들 교육과 관련된 열띤 대화가 블랙홀처럼 내 정신을 빨아들인다. 책 행성 진입 실패. 가방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느낀다.
‘그래도 참 좋은 팔자야, 이 낮에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느끼며 자전거를 탈 수 있다니.’
투병과 임신과 출산으로 기동성이 꽉 묶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이야말로 나의 황금시대라 만족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는다. 과거의 정신과의 대화, 그 어떤 과학기술로도 아직 실현되고 있지 않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책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에 새삼 흥분하며 읽는다.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내 인생의 스승이었던 전성수 약사님은 평생을 약품개발에 당신의 시간과 힘을 쏟았고 그 비결은 친구와의 만남이 잦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 나이가 되면 친구가 살아 있는지만 가끔 확인하면 됩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친구가 살아 있는지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말도 할 줄 아는 지 확인할 필요도 있는 나이이다. 만나고 싶은 친구가 직장인인 경우,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퇴근 이후 저녁 시간이 되어야 하고, 저녁 그 시간에 나는 혼자만의 시간의 마법을 풀고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맞이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 하나가 양보를 해야 한다. 그 친구가 반차를 내어 시간을 내면, 다음 번에는 내가 아이들을 맡기고 만난다. 이 상황이 되면, 친구에게는 ‘휴가비’가, 내게는 ‘보육비’가 발생한다. 말 그대로 시간을 돈 주고 사는 것이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외계의 시간대’에 처해 있고 시간이라는 차원에서 서로에게 외계인인 우리가 만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양보가 이뤄진 후에야 만남이 가능해진다.
나의 현재가 황금시대라 자평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의 시공간에서 자유롭게 보낼 때였다. ‘낮 시간의 카페’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안다면 더욱이나 문제가 없을 터였다. 문제는 그 시공간에 있지 않은 사람들과 교신을 시도할 때이다. 갑자기 제한이 느껴진다. 아이들이 짐처럼 느껴진다. 남편은 일하는 시간대에 묶인 몸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녁 시간에 그는 친구를 만나러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부아가 난다. 문득 나는 그대로인데 자유롭고 만족하며 지내던 내가 왜 사슬에 얽매여 있는 신세처럼 느껴지는 걸까 자문해본다.
이럴수가! 내가 외계인이었기때문이다. 모 아이스크림 이름과 동일하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엄마는 외계인’이다. 엄마가 되기 전의 인간관계와 만남의 패턴을 가지고자 하면 이건 우주여행만큼의 장비가 필요하다. 산소공급, 통신장비 전력공급 등을 갖춘 우주복을 입고 뒤뚱뒤뚱 힘겹게 우주여행을 하는 인간을 보라. 무중력 상태에서 둔탁한 우주복을 입고 발 한걸음 띄기도 어려워 가쁜 숨과 함께 허둥대고 있는데 자유롭게 움직이며 웃는 얼굴들은 오히려 나를 생뚱맞게 쳐다본다. 그들의 시선과 함께 나의 행성과의 통신장비 전력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보면, 이 공간에서 나는 외계인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의 단절상태에서, 거꾸로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어렵게 우주여행을 한 사람들을 너무 가볍게 대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는 기회가 찾아온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인문계과 상업계로 갈렸을 때, 대학생과 재수생으로 갈렸을 때, 회사원과 취업준비생으로 갈렸을 때, 결혼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갈렸을 때, 부모가 된 사람과 아이가 없는 사람으로 갈렸을 때, 환자와 건강한 사람으로 갈렸을 때 등등 삶이 전개되면서 우리는 각각의 처한 입장이 갈리면서 서로에게 외계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외계인들간 교신과 만남이 가능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겠다는 마음과 소통에의 열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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