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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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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8일 06시 26분 등록

지난 9 2일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날이다. 자그마치 6년 하고도 두 달 그리고 날 수로는 2,241일 이나 살았던 기숙사에서 모든 짐을 빼고 신혼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 날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틈틈이 짐을 정리해뒀던 터라 당일 날 크게 바쁘지는 않았다. 남자 혼자 사는 세간이 많을 리도 없었다. 그나마 처치 곤란이었던 것은 옷이었다. 평소에 옷을 잘 사는 편이 아니지만, 한 번 산 옷을 거의 버린 적이 없다 보니 쌓인 옷이 제법 많았다. 선물 받아 입지 않은 옷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물건을 잘 버리지 못했다. 새로운 물건에 욕심을 가지기 보다는 오래 써오던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편이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은 아마도 내가 그 물건에 투영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사연 없는 물건들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번엔 일단 고민이 된다 싶으면 그냥 버리기로 했다. 물건들은 대부분 버리고 깨끗한 옷들은 따로 박스에 담아 기증하기로 했다. 큰 박스 한 가득 겨울 옷과 외투 그리고 티셔츠 등을 차곡차곡 담았다. 몸이 커져 맞지 않아 두 해 넘게 입지 않던 정장들도 고이 접어 담았다. 꼭 새로운 주인을 만났으면 좋겠다. 다시 입기 어려운 오래 된 와이셔츠들은 모두 버렸다. 남은 옷들은 몸에 꼭 맞는 티셔츠 예닐곱 장, 와이셔츠 예닐곱 장, 출근 바지 다섯 장, 겨울 코트 두 벌, 패딩 두 개 그리고 니트와 가디건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런데 금번의 대대적인 정리해고의 칼 바람 속에서도 가장 오래 된 티셔츠 사 총사는 살아남았다. 제일 큰형님 격인 2004년생 회색 티셔츠는 갓 대학에 입학해 농촌 봉사활동을 가면서 입기 시작한 것이었다. 올해로 벌써 14살이다. 둘째 형님인 빨간 티셔츠는 첫째와는 연년생으로 2005년생이다. 마찬가지로 대학교 2학년 시절 농촌 봉사활동을 가면서 입게 되었으니, 첫째와 출생지가 같다. 셋째는 2008년에 태어난 녹색 긴 팔 셔츠다. 인도로 선재수련을 가면서 입게 된 유일한 긴 팔 티셔츠다. 막내는 2009년에 태어난 겨자색 티셔츠로 일본에서 살면서 룸메이트에게 선물 받은 티셔츠인데, 티셔츠 한 가운데를 예쁘게 다림질로 낸 선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예쁘다고 칭찬했을 뿐인데, 그 옷을 곱게 빨아 예쁘게 다림질까지 해서 선물해 준 그 마음이 아릿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생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지만 그 때마다 항상 나와 함께 했던 물건들이 있다. 8년 째 쓰고 있는 종이컵 크기의 도자기 컵, 작가 윤광준이 『생활명품』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고 나 역시 13년 넘게 쓰고 있는 구릿빛 쓰리세븐 손톱깎이 그리고 10년 가까이 쓰고 있는 일기장 같은 것들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다음 번 이사에도 이 녀석들은 항상 나와 함께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사를 하며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 한다는 것은 애착을 내려 놓는 과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더 큰 애착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과정인 듯도 하다. 내가 가진 물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내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실 아무것에도 큰 정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있어도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랍 구석 옷장 구석 어딘가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물건들에게 물어본다. 아니 사실은 나에게 물어본다. 이것은 나에게, 나는 이것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사를 하면서 많은 물건들을 비워냈다. 삶의 공간이 가벼워졌고, 매일 쓰고 사용하는 물건들이 단촐 해졌다. 사용하는 것들이 단촐 해지니 생활패턴은 더욱 단순해졌고 그 단순해진 일상은 다시 충만함으로 채워졌다. 이사를 통해 알았다. 물건을 비운 자리에 일상의 충만함이 다시 차오른다는 것을. 바로 일상 속의 역설적인 행복이다.

 

, 10년 동안 쓰던 드라이기를 기숙사 경비실 아저씨께 드리고 새 걸로 바꿨는데 자꾸 예전 것이 나아 보인다. 이건 욕심이다.

IP *.39.1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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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12:46:36 *.226.22.184

신혼때 물건을 많이 비우면 다시 사야되. 일상의 역설!

곧 결혼일텐데 과제하느라 고생이 많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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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08:47:01 *.124.22.184

신혼집으로 들어가는군.  좋겠다. 일생의 몇 안되는 좋은 시절 중 하나인 신혼.

까마득하네. ㅎㅎㅎ

 

정욱씨 알뜰해서 잘 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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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23:25:45 *.222.255.24

나도 외국에서 살면서 자주 이사다닐 때는 수트 케이스 두 개랑 

박스 몇 개 정도의 짐만으로도 잘 살았었는데...


여기서도 첨 이사 나올 때는 1톤 트럭도 다 안 차는 짐으로 왔었는데,

작년에 2년만에 이사하는데 4배 정도로 짐이 늘었더라구요.

지금은 아마도 그 때의 2배 정도는 또 늘어난 듯...

줄여야 하는데...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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