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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4일 23시 42분 등록

마음을 나누는 편지 -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9월의 첫 주말, 오랜만에 친정에 다녀왔습니다. 오래전에 사 두었던 땅이 팔렸으니 잔금 처리하는 걸 도와달라는 엄마의 호출이 있어서였습니다. 평생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해 오신 엄마가 이제는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글쓰기>를 쓰면서 ‘엄마’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졌나 봅니다.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친정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엄마의 환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온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표정도 바뀌어 있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 내내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자식 농사에 있어 엄마는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40여 년 어치의 매를 한꺼번에 두들겨 맞은 것 같았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달라진 엄마가 낯설기만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확연히 다른 두 개의 민낯이 엄마 얼굴에 겹쳐 보이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엄마의 글쓰기>를 쓰면서 엄마와 화해하고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믿었는데, 도대체 누구와 어떻게 소통을 했던 건지 헷갈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했습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려 내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웠습니다. 온몸이 수면 깊숙이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봅니다. 엄마와 무슨 대화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차마 한마디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와 딸 사이는 곧 관계가 회복되겠지만, 사위에게 장모님은 손녀에게 외할머니는, 아내를 또한 엄마를 힘들게 하는 존재라면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일은 결코 제가 원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제 고향 부산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맘에 안부 전화를 돌리다가 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언니, 괜찮아?”

“......”

“침수 피해 입은 거야?”

“......”

“아니, 왜 말이 없어? 무슨 일 있어?”

말문을 연 언니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네가 돌아가고 나서, 꼬박 일주일동안 몸져누웠다’고. ‘네가 받았을 충격과 상처를 떠올리니, 내 몸과 맘이 다 아프더라’고. ‘넌 괜찮냐’고. ‘어떻게 엄마는 너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냐’고. ‘네가 착해서 엄마 말에 휘둘릴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다’라고. ‘엄마 말에 절대 영향 받지 말고 여태 살아온 대로 멋지게 살아가라’고.

 

“그래도 언니, 몸져누울 일은 아니잖아?”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동생을 생각하며 일주일이나 끙끙 앓았다니요? 오히려 저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언니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저를 위해 몸져누운 이가 있다는 것이, 제가 겪은 일로 제가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이가 있다는 것이, 저를 그 상처의 나락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축 늘어져 있던 몸에서 다시금 생기가 느껴졌습니다. 어느 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일흔이 넘도록 금욕하며 살아오신 엄마의 변화는 일시적이나마 한동안 지속될 테고, ‘자식 개조’를 하고픈 엄마의 욕심은 언제고 다시 활활 타올라 제게 불똥이 튈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달라진 엄마 모습 때문에 엄마의 일흔 일생을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며, 슬픈 일이지만 앞으로는 엄마의 불똥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엄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할 것입니다.

 

40여 년 제 인생을 지탱해온 힘은, 적당히 가난했기에 화목했던 저의 유년기 기억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부모님의 물질적인 지원은 부족했을지언정,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는 차고 넘치도록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누군가 마음 아파하는 이가 있다면 아예 내가 먼저 드러눕기로, 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며 한 일주일은 끙끙 앓아눕자고 마음먹습니다. 제 맘을 추스르는데 큰 도움이 된, 제 친언니가 보여준 공감의 한 가지 방법 ‘더 아파하기’를 저도 일상에서 실천해 보기로 말입니다.

 

* 10월 9일 남편 유형선의 편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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