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瀞 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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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역사다
때는 1994년, 선릉역 근처 진선 여자 중학교 쉬는 시간.
학교 뒤뜰에서는 우리들의 고무줄 놀이가 한창이다. 점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2교시가 끝나자마자 도시락을 후다닥 까먹은 우리는 봄 햇살을 맞으며 “개나리 노란 꽃 그늘 아래~”를 흥얼 거리며 고무줄을 늘였다 줄였다 한다.
그리고 때는 다시 2007년 5월 7일 잠실, 어느덧 14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중간 중간 내가 외국 다녀오고 그녀가 외국 다녀오면서 간간이 얼굴은 봐 온 소위 ‘중학교 때 친구’ 사이였지만, 신기하게도 우리의 인연은 잊혀질 것 같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그런 관계였다. 최근 1-2년 동안에는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으면서 얼굴 한 번 못 보고 지내왔다. 그러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그녀가 궁금했다. 잘 살고는 있는지 일종의 생사확인 차 방문한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대문짝만한 웨딩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오마이갓. 돌아오는 주말에 결혼을 한단다.
순간, 그녀에게 왜 연락하지 않았냐는 원망도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는 인사도 다 생략한 채 일단 만나자고 했다. 그녀가 유부녀가 되기 전에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사실 나는 그녀가 이제껏 살아왔을, 그녀 삶의 역사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의 몇 안 되는 오랜 친구이다. 오랜 친구들의 특징은 언제 봐도 그대로라는 것, 언제 만나도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는 익숙함 내지는 편안함일 게다. 쌓인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대로였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러나 한 10분 정도 얘기를 시작하고 나니 그녀는 참 많이 커 있었다. 그렇다. 언제나 앞장 서서 챙겨주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녀에게 한 수 배우고 있었다.
사실 난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말이다.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한 지 꽤 되어 이제는 익숙해질 즈음에 그녀도 혼자 살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는 길 하나를 두고 비슷한 지역에 살고 있던 터라, 나는 나름대로 그녀를 달래준답시고 이것저것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통과하자마자 그녀는 주저 앉아 울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녀가 울면서 내 뱉은 말들과 그 때 나의 심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내 가슴 속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
“난 혼자 못 살아”
그 때 우리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그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위로해주며 나도 함께 울었다. 그녀보다는 조용히, 그리고 그녀가 아닌 나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 가여워서. 그렇게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워서. 무너질까 두려워 한 번도 그렇게 울어보지 못한 내가 안타까워서. 이제는 그런 힘겨움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내가 불쌍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내가 안쓰러워서.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서러움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를 안아주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집에 보내고 나서 한참 동안 먼 산만 바라봤던 내 삶의 역사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지금 그녀는 나를 보고 이렇게 활짝 웃고 있다. 그것도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웃음으로 말이다. 그녀의 옆자리를 지켜주는 예비신랑의 미소가 참 많이 고마웠다. 한 때 주저 앉아 통곡했던 약한 그녀가 이제는 내 앞에서 나보다 강한 모습으로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의 필터를 잘 갈고 닦았던 게 아닐까. 라고. 우리들 삶의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그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이냐, 그리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에 달린 것일 테니 말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솔직했다. 그래서 그렇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힘든 것을 숨기고, 꾹 참고, 항상 모범을 보여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힘들 때에 힘든 줄 몰랐고, 나 자신을 외면했던 듯싶다. 그러다 그게 곪아 터진 게 아니었을까. 나는 항상 잘 해야 한다고 잘난 척만 했던 나.
나도 이제 내 마음의 필터를 보듬어주어야겠다. 그 첫 단계로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려 한다. 그 누구보다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 본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아직도 나는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하나 하나 내려 놓는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그녀가 내 친구여서 많이 고맙다. 그리고 그녀의 삶에게 많이 고맙다. 나로 하여금 내 나이 스물일곱에 삶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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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94년, 선릉역 근처 진선 여자 중학교 쉬는 시간.
학교 뒤뜰에서는 우리들의 고무줄 놀이가 한창이다. 점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2교시가 끝나자마자 도시락을 후다닥 까먹은 우리는 봄 햇살을 맞으며 “개나리 노란 꽃 그늘 아래~”를 흥얼 거리며 고무줄을 늘였다 줄였다 한다.
그리고 때는 다시 2007년 5월 7일 잠실, 어느덧 14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중간 중간 내가 외국 다녀오고 그녀가 외국 다녀오면서 간간이 얼굴은 봐 온 소위 ‘중학교 때 친구’ 사이였지만, 신기하게도 우리의 인연은 잊혀질 것 같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그런 관계였다. 최근 1-2년 동안에는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으면서 얼굴 한 번 못 보고 지내왔다. 그러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그녀가 궁금했다. 잘 살고는 있는지 일종의 생사확인 차 방문한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대문짝만한 웨딩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오마이갓. 돌아오는 주말에 결혼을 한단다.
순간, 그녀에게 왜 연락하지 않았냐는 원망도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는 인사도 다 생략한 채 일단 만나자고 했다. 그녀가 유부녀가 되기 전에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사실 나는 그녀가 이제껏 살아왔을, 그녀 삶의 역사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의 몇 안 되는 오랜 친구이다. 오랜 친구들의 특징은 언제 봐도 그대로라는 것, 언제 만나도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는 익숙함 내지는 편안함일 게다. 쌓인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대로였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러나 한 10분 정도 얘기를 시작하고 나니 그녀는 참 많이 커 있었다. 그렇다. 언제나 앞장 서서 챙겨주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녀에게 한 수 배우고 있었다.
사실 난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말이다.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한 지 꽤 되어 이제는 익숙해질 즈음에 그녀도 혼자 살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는 길 하나를 두고 비슷한 지역에 살고 있던 터라, 나는 나름대로 그녀를 달래준답시고 이것저것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통과하자마자 그녀는 주저 앉아 울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녀가 울면서 내 뱉은 말들과 그 때 나의 심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내 가슴 속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
“난 혼자 못 살아”
그 때 우리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그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위로해주며 나도 함께 울었다. 그녀보다는 조용히, 그리고 그녀가 아닌 나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 가여워서. 그렇게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워서. 무너질까 두려워 한 번도 그렇게 울어보지 못한 내가 안타까워서. 이제는 그런 힘겨움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내가 불쌍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내가 안쓰러워서.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서러움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를 안아주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집에 보내고 나서 한참 동안 먼 산만 바라봤던 내 삶의 역사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지금 그녀는 나를 보고 이렇게 활짝 웃고 있다. 그것도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웃음으로 말이다. 그녀의 옆자리를 지켜주는 예비신랑의 미소가 참 많이 고마웠다. 한 때 주저 앉아 통곡했던 약한 그녀가 이제는 내 앞에서 나보다 강한 모습으로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의 필터를 잘 갈고 닦았던 게 아닐까. 라고. 우리들 삶의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그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이냐, 그리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에 달린 것일 테니 말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솔직했다. 그래서 그렇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힘든 것을 숨기고, 꾹 참고, 항상 모범을 보여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힘들 때에 힘든 줄 몰랐고, 나 자신을 외면했던 듯싶다. 그러다 그게 곪아 터진 게 아니었을까. 나는 항상 잘 해야 한다고 잘난 척만 했던 나.
나도 이제 내 마음의 필터를 보듬어주어야겠다. 그 첫 단계로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려 한다. 그 누구보다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 본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아직도 나는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하나 하나 내려 놓는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그녀가 내 친구여서 많이 고맙다. 그리고 그녀의 삶에게 많이 고맙다. 나로 하여금 내 나이 스물일곱에 삶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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