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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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기 연구원 장성한
열하일기
박지원 글 / 허경진 엮음
이현식 사진 / 현암사
1. 저자에 대하여
▶ 박지원 (1737~1805)
정치적 불운 속에서 찾은 은둔의 여유, 연암에 정착하다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은 그리 유쾌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서울 반송방 야동(지금의 중구 순화동과 의주로 2가 일대)에서 태어나 삼청동 백련봉 아래 이장오라는 인물의 별장에서 세들어 살았고 얼마 뒤에는 백탑 인근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백탑 서쪽 전의감동으로 옮기며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가 20~30대에 [양반전]이나 [예덕선생전]과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을 집필하게 된 것도 이런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당시 탑골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서구나 이덕무, 유득공등을 만나 교류한 것이 기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박지원이었지만, 그 당대에는 별로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때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하며 촉망받던 재원이었던 박지원은 끝내 과거를 포기하고 1771년(영조 47)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을 찾고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다. 박지원의 호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같은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의 삶은 선조들의 청렴한 삶과 유람을 즐기는 그의 생활관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그밖에도 당시 실력자 홍국영과의 불화도 한 몫을 하였다.
박지원이 연암골에 정착하기 직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유언호는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렸나. 자네에게 심히 독을 품고 있으니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르겠네. 그 자가 자네를 해치려 틈을 엿본지 오래지만 자네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라고 늦추어 온 것 뿐이라네. 이제 복수의 대상이 다 제거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자네일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심히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하기는 어려울 걸세.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에서 재인용)라고 권하였다는 것이다. 유언호 이외에도 정조의 역작인 [무예도보통지] 편찬 실무를 주관하였던 친구 백동수도 이처럼 권하였다. 사실 당시까지도 이렇다할 정치적 활동이 없었던 박지원이었기에 홍국영과 직접적인 마찰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을 중심으로 정조의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776년(정조 즉위년) 11월 기장현에 유배된 심종질인 박종악의 활동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때 박종악이 유배된 것은 정조와 홍국영에 의해 1차 제거 대상이었던 홍인한․정후겸과 밀착되었다는 이유였다. 이를 통해서 유추해본다면 박지원 가문이 이들과 밀착된 것이 아마도 홍국영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했던 요인이 아닐까 한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열하일기의 집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두 차례를 경험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하였다. 후금, 후일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대표하던 국왕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조선의 사림들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감함과 동시에 이른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북벌은 한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서서히 북벌의 이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그 자리에 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청나라가 멸망은커녕 오히려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은 뒤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가는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이제 청나라는 정벌해야 할 대상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다
[열하일기]를 발표하면서 주가를 올리던 박지원은 이어 친구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평시서 주부와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한성부 판관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 경상도 안의현감에 제수되었다. 안의현감에 재직하던 1792년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다름 아닌 규장각직각 남공철의 서신이었다. 이때 남공철이 편지를 보낸 것은 국왕 정조의 명에 따른 것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문체가 바르지 못하니 이를 반성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중앙의 조정에서 국왕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문체반정이란 당대 과거시험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문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바로 문체반정의 주 표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후일 김택영(1850∼1927)이 찬술한 [박연암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열하일기]가 발표되자 이를 얻어 본 국왕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근래 신기한 것만을 따르는 문체의 주범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서 남공철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도록 해서, 속히 문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정하게 수정한다면 관직 제수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장에서 실현된 북학 정신
한때 정조의 문체반정 대상이기도 하였던 박지원은 그가 평소 저술에서 강조하였던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고을 내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 효의식을 고양시키고,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각종의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행길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중국의 실용적인 문명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군직(軍職)을 받고 상경한 박지원은 이후 계산동(오늘날의 종로구 계동 일대)에서 생활하던 중 역시 벽돌로 총계서숙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제용감 주부와 의금부 도사, 의령 령 등을 거쳐 1797년 면천군수에 제수되었다. 면천군수에 재직하던 1799년에는 농서를 구하는 교지에 응하여 농서인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과농소초]는 그가 금천의 연암골에서 생활하던 당시 경험에 바탕한 농서로써, 여기에 그가 후일에 찬술한 [한민명전의]를 첨부하여 올린 농서였다. [과농소초]에서 박지원은 중국 농법의 도입 및 재래 농사 기술의 개량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제안해, 심각한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박지원은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면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고 하겠다.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중략)…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 박지원, [연암집] ‘북학의서’에서
[네이버] 박지원 - 조선후기 비판적 신지식인, 북학의 선두 주자 발췌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저자 서문
P17. 그러나 시초를 뽑아서 괘를 벌이면, 그 참된 상이 곧 나타나고 길함과 흉함, 희인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은 왜 그럴까. 미묘한 곳으로부터 드러나는 경지로 지향하기 때문이니, 우언을 쓰는 사람이 이러한 방법을 쓴 것이다.
P19.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장자]의 외전에는 참도 있고 거짓도 있지만, 연암 씨의 외전에는 참은 있으나 거짓은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실제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이야기하게 되었으니, 패자에 비한다면, 진문공은 허황하고 제환공은 올바르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어찌 그럴듯하게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기만 했겠는가.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에 관계되고, 성곽이나 건물, 농경과 목축, 그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 일체의 이용후생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뜻에 맞을 것이다.
→ 치란 :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세상 / 혼란에 빠진 세상을 다스림
■ 도강록
▶ 들어가기
▶ 도강록
P25. 그 뒤에 쾌청한 날이 벌써 나흘이나 되었지만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고 흙탕물이 하늘에 닿았다.
→ 강물이 몹시 불어난 장면의 묘사다. 물이 갑작스럽게 불어난 만큼 물살은 거셀것이다. 흙탕물이 하늘에 닿았다.라는 표현이 허경진 교수의 표현인지 연암선생의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묘사 자체가 마음에 강하게 들어온다.
P26.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짙은 구름이 쫙 덮이고 비기운이 산에 가득했다. 머리 빗고 세수한 뒤에 짐 보따리를 싸고, 집에 보내는 편지와 여러곳에 보내는 답장을 손수 봉하여 파발마 편에 부쳤다.
→ 집에 보내는 편지의 수신은 아내? 부모님? 아마 맞을 것이다. 요새 느끼는 거지만 효도가 정말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아버지가 궁금해 하기 전에 전화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전화한통 만으로 참 좋아하신다. 효도란 나의 안위를 부모님께 알려드리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통화한다고 마마보이가 아니다. 공자께서도 효란 부모가 걱정하시지 않게 하는 것이 했다.
P27. 중국 가는 것을 평생의 장유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 번 구경해야지.” 하며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둘째가 되었다. “오늘은 강을 건너야지.”하며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P28. 동쪽으로 의주와 철산의 여러산을 바라보니 만 겹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 기가 막히는구나!! 만 겹 구름 속이라…
P30. 잠시 아찔하는 순간 하룻밤이 지난 듯 싶었다. 통군정의 기둥과 난간과 마루가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배웅하는 이들이 아직도 모래밭에 섰는데 팥알같이 까마득히 보였다.
→ 이것이 역자의 표현이 아니라면 정말 엄청난 표현인 것 같다. 아찔한 순간이 하룻밤이 지난 것 같고, 배웅하는 이가 팥알 같다라…
▶ 명나라 장수 강세작이 조선에 귀화한 이야기
▶ 청나라 첫 고을 책문의 모습
P34. 앞서 가던 두 사람은 바로 내려서 한쪽으로 비켜 가는데, 뒤에 가던 세 사람은 내리기를 싫어했다. 마두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꾸짖자, 그들이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당신네 상전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지?”
→ 맞는 말 아닌가? 엄연히 청나라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연암선생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꾸짖고 소리친다고 될 일인가? 조선에서나 선비고 높은 계급이지 청나라에서는 먼 타국에서 온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볼 수 있는 나라의 사람 아닌가. 근데 계급사회가 사라진 지금도 계급사회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계급체계가 없는 계급체계… 글쎄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P35. “너희가 중국에 들어갈 때마다 여러 가지로 말썽을 일으킨다더니, 이제 내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그렇구나. 아까 한 일은 부질없는 짓이니, 앞으로는 괜한 장난으로 말썽이나 일으키지 마라.”
그러자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먼 길에 날마다 무엇으로 심심풀이를 합니까?”
→ 사람 가지고 심심풀이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더냐? 되놈 되놈 하면서 아마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에 나가서 인종차별 받는다고 욕하지 마라. 우리 조상들도 옛부터 이렇게 인종차별을 했으니 말이다. 피부색은 달라도 피은 모두 붉다.
P36. 그 전에는 남한산성의 남문에 앚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마치 물 위의 꽃과도 같고 거울 속의 달과도 같았다.
P39. 그는 민망한 듯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쇤네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두곳을 구경할 때는 제 두손으로 눈알을 꽉 잡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느 놈이 빼어 갈 수 있겠습니까?”
→ 유해진이 나오는 영화의 대사 같다^^
P39.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즐비하며, 벌여 놓은 그릇은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어디를 보아도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지난번에 내 친구 홍덕보가 “규모가 크면서도, 그 심법은 세밀하다.”고 충고하더니 과연 그러했다. 중국의 동쪽 변두리인 책문도 이러한데 북경으로 갈수록 더욱 발전 될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였다.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 하는 순간 온몸이 화끈거렸고 나는 깊이 반성하였다.
P40.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래 성미가 맑아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한 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직 만 분의 일도 못 보고 벌써 이런 나쁜 마음이 생기니 어찌 된 까닭일까. 아마도 보고 들은 것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밝은 눈으로 세계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 하나 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면, 시기와 부러움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 일단 놀라운 점 하나! 자신의 성미가 맑다고 자화자찬하는 것. 두 번째 위에 한풀 꺾인 마음과 감정을 직시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말한다. 이 후에 평등함을 논한다. 그리고 평안을 찾는 법을 찾는다. 역시 이런 점을 위대한 학자에게 배워야 하나보다. 자화자찬 빼고
P40. 때마침 한 소경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고 손으로 월금을 연주하며 지나갔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 사람이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는냐?’ 하고 생각하였다.
▶ 벽돌과 기와
P42. 청나라 사람들은 대개 집을 지을 때에 벽돌만 쓴다. (중략) 그러므로 같은 틀에서 찍어 냈건만 그래도 어긋난 놈이 있을까 봐 걱정되어, 반드시 자로 재고 자귀로 깎고 돌로 갈아서 가지런히 한다. 그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한 금으로 그은 것 같다.
그 쌓는 법은 이렇다.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으면, 저절로 감괘와 이괘 모양이 된다. 그 틈서리에는 석회를 종잇장처럼 엷게 이겨서 붙인다. 둘 사이가 겨우 붙을 정도여서, 흔적이 실밥처럼 보인다.
P43. 기와를 이는 법은 본 받을 만한 점이 많다.
→ 참 실학자답다. 벽돌 하나하나, 기와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서 우리나라에 적용할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당시) 오랑캐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P43. 집이 벽을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다. 기둥은 벽 속에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다.(중략)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되어 집 안의 모든 물건을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많은 흙이나 나무도 들이지 않고, 못질이나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다.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어느새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다.
▶ 안시성과 요동 땅의 평양성
P47.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을 모두 압록강 이쪽에 몰아넣어서, 사실을 억지로 이끌어다 제멋대로 분배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았는데, 어떤 사람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전쟁도 없이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정해 놓고, 패수의 위가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것은 그때그때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P50. 고려는 안으로 삼국을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그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다.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은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역사책만 믿고 흥미롭게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자취를 이야기한다. “이곳이 패수요, 이곳이 평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어긋한다. 그러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봉황성인지 어떻게 분간 하겠는가?
→ 조선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워진 나라라서 고려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고려의 선비들만을 꼬집어 비난하는 것 같지도 않은 것 같다. 그저 어리석은 선비 모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의 강성함이 줄어든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선의 선비들을 왜 욕하지 않는 것인가? 지나친 사대주의로 나라의 존망이 흔들린 것을 왜 꼬집지 않는 것인가? 시대를 앞서가는 실학자라면 현재의 문제점도 들춰내야 하는 것 아닌가? 과거를 비난해서 무엇하리? 지금이라도 힘을 모아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너무 안타까운 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지금도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 중국의 구들과 조선의 온돌
P52.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 겨울이 되면 수백 명의 형제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방법을 배워 가서 삼동의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P52. “이 곳의 벽돌 장판이 우리나라의 종이 장판보다 못하다는 말은 그럴듯하네. 그러나 이 구들 놓는 방법을 배워 가서 우리나라 온돌에 쓰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깐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 그래 맞아! 우리나라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무조건 배워야 하는 거야. 백성의 생활을 이롭게하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자세고 마인드지! 그러니 정부가 회동하자고 하면 좀 가라!
▶ 꿈 속에 고향집을 찾아
P55. 분수령, 고가령, 유가령을 넘어 연산관에서 머물렀다. 이 날에는 60리를 걸었다. 밤에 취해서 잠깐 조는데, 몸이 홀연 심양 성중에 있었다. 궁궐과 마을과 시정이 몹시 번화하고 화려했다. “여기가 이처럼 장관일 줄 몰랐네그려. 집에 돌아가면 자랑해야지.” 하고 훌훌 날아가는데, 산이며 물이 모두 내 발꿈치 밑에 있어 마치 날아가는 솔개처럼 날쌨다.”
▶ 말꼬리를 붙들고 강물을 건너
▶ 한바탕 울어 볼 만한 요동 벌판
P60. “천고의 영웅이 잘 울었으며, 미인도 눈물이 많다 하오. 그러나 그들은 소리 없는 눈물이 몇 줄 흘렸을 뿐이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이나 돌에서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듣지 못했소. 사람이 다만 칠정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며,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된다오.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릴 때에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으니,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라오. 정에 이르러 우러나오면 저절로 이치에 맞으니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겠소. 인생의 보통 감정은 오히려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고,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되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했으니, 이로 인해 상을 당했을 때 억지로 ‘에고’,’어이’ 따위의 소리를 부르짖는 거라오.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는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오.”
→ 더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그저 읽으며 느끼면 되는 것을…
P61.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보시오. 그가 처음 날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일까. 그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에는 부모와 친척들이 앞에 가득한 것을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소.
▶ 구요동
▶ 관제묘
▶ 요동백탑
■ 성경잡지
■ 일신수필
▶ 들어가기
P83. 남이 말한 것을 들은 것만으로 말하는 자들과는 서로 학문을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평생 동안 생각지 못한 것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만일 어떤 이가 “성인이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를 보살핀다고 하면, 그는 곧 황당한 일이라며 배격할 것이다. 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을 돌아다녔다고 하면, 그는 괴상하고도 허황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함께 크나큰 세상 구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 앞서 나가는 것도 참 외로운 일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으랴. 그래도 지금이야 기술이 발달하면서 흥미롭게나 봐주지. 그 당시에는 미친놈 취급이나, 미개한 종속을 따른다고 삿대질을 당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P83. 아아! 슬프다. 글을 빨리 쓰다가 생각해 보니, 먹 한 점을 찍는 사이는 하나의 순과 식에 지나지 않건만, 눈 한 번 감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도 벌써 짧은 옛날과 짧은 지금이 이룩된다. 그러면 하나의 ‘옛’이나 ‘지금’도 대순과 대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 사이에 온갖 명예와 사업을 세우고자 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P84. 그들은 “성인 공자와 부처의 관점도 결국은 땅에서 떠나지 못했다.” 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 지구를 어루만지고 공중을 달리며 별을 따서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이들이 스스로 “우리가 보는 것이 유교나 불교보다 낫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이 모두 다른 나라에 와서 말을 배우며, 머리 끝이 희도록 남의 글을 익혀 썩지 않을 사업을 꾀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근데 참 연암 박지원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 역사교과에서 실학자다, 북학파다 이용후생이다 등등 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 신문물? 혹은 새로운 기술을 배척하지 않는 자세에만 국한되었던 것 같다. 부처님과 공자님을 낮게 평가하는 것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참 깨어있는 분 아닌가? 사상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인정하고 들어가는 그를 보면 어쩌면 내가 배웠던 연암 선생은 일부분일 뿐이었겠다 생각이 든다.
▶ 중국의 큰 볼거리
P89. 그러다가 마침내 마지막 황제가 자살하고 명나라가 망하자, 백성이 머리를 깎아서 모두 되놈이 되었다. 비록 우리나라만은 이런 치욕을 면했지만, 중국을 위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야 어찌 하룬들 잊을 수 있었으랴. 우리나라 사대부 가운데 천자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춘추]의 이론을 주장하는 이가 여기저기 우뚝 서서 백 년을 하루같이 줄기차게 이어졌으니, 정말 장한 일이라 하겠다.
P90. 밭 갈기, 누에치기, 그릇 굽기, 풀무질 등으로부터 공업이나 상업에 이르기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이 열을 하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백성에게 이롭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 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볼만한 게 하나도 없더라.”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미천한 선비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고 하겠다.
→ 이런 정치인은 없는 것인가? 나 잘 할 수 있는데…
▶ 수레 제도
P97. 그들의 연구가 정미하고 행하기도 간편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랴. 이는 참으로 민생의 살림에 이익이 되고, 나라의 큰 그릇이 되지 않겠는가. 이제 날마다 내 눈에 놀랍고 반가운 것이 나타나는데, 수레의 제도로 미루어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겠다. 어렴풋하게나마 몇 천 년 동안 모든 성인이 고심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겠다.
→ 오직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뿐이구나…
P100. 방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발을 놀리면서 책도 읽고 글씨도 쓰고 손님과 수작도 한다. 못하는 일이 없다. 다만 등 뒤에 조금 소리가 들릴 뿐, 누가 그러는지도 모른다. 발을 움직이는 힘은 아주 적게 들면서, 일은 많이 된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가루 몇 말을 한 번에 치려면 머리도 눈썹도 순식간에 하얗게 되고 팔도 나른해 진다. 어느 쪽이 덜 힘들고 편리하겠는가. 이와 비교해 보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나에게도 도입을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현재 내 일 혹은 부서일에 체계를 잡아야 한다. 매뉴얼이 필요하다. 사람이 바뀌어도 아무일 없이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와도 일을 잘 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가지치기를 하고 나면 이것을 시도해 봐야겠다. 그래야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더라도 수다도 떨 수 있고, 덜 힘들고 편리하지 않겠는가. 나는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내 회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 사업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고 미래가 있다. 나의 일은 내 사업이다.
▶ 관내정사
▶ 호질
P111. 고을 동쪽에 아름다운 청춘과부가 살았는데, 동리자라고 하였다. 천자가 그의 절개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들도 그의 어진 마음을 흠모하였다. 고을 사방 몇 리의 땅을 봉하여, ‘동리과부지려’라고 하였다.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 잘하는 과부였지만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저마다 다른 성을 지녔다.
P113. 대개 천하의 이치가 한 가지이니, 범의 성품이 악하다면 사람의 성품도 악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선하다면 범의 성품도 선할 것이다. 너희의 천만 가지 말이 모두 오상을 떠나지 않고, 경계하여 권면하는 것이 언제나 사강에 있기는 하지만, 서울이나 고을에서 코베이고 발 잘리며, 얼굴에 죄인이라는 글자를 먹으로 새긴 채 돌아다니는 자는 모두 오륜에 순종치 않은 사람이란 말이야.
▶ 호질 뒤에 쓴다
P119. 사람이 보면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 뚜렷하겠지만, 하늘이 본다면 은나라의 우관이나 주나라의 면류관도 제각기 때를 따라 변했으니, 어찌 반드시 청나라 사람들의 홍모만을 의심하랴.
■ 혹정필담
▶ 들어가기
▶ 달에서 이 지구를 바라보면
P131. “모든 물건 자체에는 빛이 없음을 보아서, 그 본질은 어둡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어두운 밤중에 거울을 보더라도 목석과 다름없으니, 비록 빛을 받아들일 성격은 있지만 그 자체가 밝을 수 있는 바탕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햇빛을 빌린 뒤에야 빛을 낼 수 있으므로 만사하는 곳에 도리어 밝은 그림자가 생기니, 물이 밝아짐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구의 밖에 바다가 둘러져 있는 것은, 비유하건대 한 개의 큰 유리 거울과 같습니다. 만일 달 세계에서 이 땅의 빛을 본다면 역시 상현달, 하현달, 보름달, 그믐달, 초하루 등이 있겠지요. 해를 맞댄 이쪽저쪽에는 큰물과 큰 땅덩이가 서로 잠기며 비춰져서, 그 빛을 받아 반사되어 바꾸어 가며 밝은 그림자를 토하는 거지요. 마치 저 달빛이 이 땅덩이에 고루 펴졌으나 햇빛을 받지 못한 곳이 저절로 어두워져서 상현달이나 하현달이 되기 전 초승달처럼 빈 둘레만 걸려 있고, 그 흙의 깊은 곳이 마치 달 속의 검은 그림자처럼 엉성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 지전설
P137. “저는 하늘이 만든 것 중 모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같은 것까지 둥글지 않은 게 없지요. 산과 강, 큰 땅덩이, 해와 달, 별들도 모두 하늘이 창조한 것이었으나 아직 모난 별을 본 적이 없으니,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할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 야소교
▶ 제왕과 신하
P144. “옛날부터 제왕은 신하들을 스스로 가르치기만 좋아하였지,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왕 밑에 있는 사람 모두 영화를 탐내고 녹봉에만 눈이 어두워 임금을 따라가지 못함이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다면 반드시 이러지 않을 것이니, 밝은 사람을 내세우고 미천한 사람을 뽑아내어 어진 사람을 쓸 때에 지위를 가리지 않는다면 은나라 고종이 부열을 얻었던 것같이 꿈속에서 담 쌓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주나라 문왕이 강태공을 만났던 것같이 점을쳐서 낚시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함께 사업하는 것도 서로 마음이 맞았기 때문에 성공하였습니다. 만약 저들이 구하지 않았다면 어찌 하늘이 내려주는 인재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 문묘의 십일철
▶ 지전설을 받아들인 혹정
■ 환희기
▶ 들어가기
▶ 스무 가지 요술 이야기
P169. 본래 세상의 몽환이 이와 같고, 거울 속의 염량 변천도 현저히 다른다. 인간 세상의 가지가지 일이 아침에 무성하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 부자가 오늘은 가난하다. 잠깐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것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슬쩍 죽었다가 바야흐로 산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으며,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를 일이다.
P169.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사내와 보살 형제들에게 말하노니, 사람은 헛된 세상에 꿈 같은 몸과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큰 인연을 맺어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물 뿐이다. 바라건대 이 거울을 표준 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춥다고 물러서지 말며, 있는 돈을 흩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지어다.
■ 산장잡기
▶ 밤에 고북구를 나서면서
▶ 「밤에 고북구를 나서면서」에 붙여 쓰다
▶ 하룻밤에 한 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
P174.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나와, 돌에 부딪쳐 싸우며 흘렀다. 놀란 물너울과 성난 물결, 그리고 애원하는 듯한 여울들이 내달아 들이치고 휘말려 곤두박질쳤다. 울며 으르렁거리며, 부르짖으며 고함치며, 언제라도 만리장성을 쳐부술 기세였다.
P177. 소리와 빛은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한다.
▶ 코끼리
■ 구외이문
▶ 조선진주
P186. “아니오. 이건 조개껍데기를 둥글게 간 것이지, 진주가 아니라오. 우리가 그대 나라의 진주를 보배롭게 여기는 까닭은 조개 기운이 없이 천연적으로 보배로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지요.”
매우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의 진주가 어디에서 나며, 또 누가 캐어서 이처럼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조조의 물속 무덤
▶ 양귀비의 사당
▶ 입정한 스님
▶ 고리내와 뚱이
P190. 냄새가 몹시 나쁜 것을 고린내라고 한다.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으므로 발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쁘기 때문이다.
▶ 젊다고 늙은이를 업신여기다니
P191. 사람이 젊을 때에는 앞길이 매우 멀어서, 마치 자기에게는 늙을 날이 없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늙은이를 업신여기는 실수를 쉽게 저지른다.
▶ 신라호
■ 옥갑야화
▶ 옥갑 여관방에서 돌아가며 이야기하다
P197. 사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게 걱정이지. 은이 없다고 걱정할 게 무어요?
▶ 허생
P210. “알기 쉬운 일일세. 우리 조선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나라안에서 두루 다니지 못하거든. 그래서 온갖 물건이 이 안에서 생겼다가 이 안에서 사라지지. 대체로 1000냥은 적은 재물이어서 물건을 마음껏 다 살수는 없지만, 이를 열로 쪼갠다면 100냥이 열이 될 테니 열 가지 물건을 넉넉하게 살 수 있지. 물건이 가벼우면 돌려 빼기가 쉬우니 한 가지 물건이 비록 맡겼다 하더라라도 아홉 가지 물건은 이문이 남는 법이야. 그런데 이건 보통 이문을 남기는 방법이고, 작은 장사치들이나 쓰는 방법이지.”
P211. “요즘 사대부들이 지난번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으려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슬기로운 선비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지혜를 펼칠 때이지요. 그런데 그대 같은 재주를 지니고도 어찌 괴롭게 어둠 속에 잠긴 채로 이 세상을 마치려고 하시오?”
P215. 옛날 번오기는 자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머리를 자르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무령왕은 자기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랑캐 옷을 입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당신들은 명나라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면서,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낀단 말인가? 앞으로 말 달리기, 칼 치기, 창 찌르기, 활당기기, 돌팔매질 등을 익혀야 하는데도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 않고 제 딴에는 이게 ‘예법’이라고 한단 말인가? 내가 평생 처음으로 세 가지 계책을 가르쳤지만 당신은 그 중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자칭 ‘신임받는 신하’라고 하니, 소위 ‘신임받는 신하’가 겨우 이렇단 말인가? 이런 놈은 베어 버려야겠다.”
▶ 「허생 뒤에 붙여 쓰다1
▶ 「허생 뒤에 붙여 쓰다2
■ 황도기략
▶ 서관
▶ 천주당
▶ 서양화
▶ 유리창
■ 알성퇴술
▶ 순천부학
▶ 학사
P234. 이제 청나라도 세워진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 안이 태평하고 문물의 교화가 혁혁하여 제 스스로 ‘한나라나 당나라보다야 낫겠지.’ 생각하면서 자랑하지만, 오늘 내가 여러 학사를 돌아보니 십중팔구는 텅텅 빈 방뿐이었다. 더구나 며칠 전에 간신히 석전을 지내는데, 대성문 왼편 극문의 왼쪽 벽에 써 붙여 둔 참례자들의 명단을 보니 겨우 400명도 넘지 못했다. 그것도 모두 만주인과 몽골인뿐이니, 한인이 하나도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한인은 비록 벼슬하여 공경에 이르더라도 성안에는 집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다름다운 서울에 유학하는 선비도 감히 거처할 수가 없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중화족 스스로 되놈의 종자와 한 책상에서 공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인가?
▶ 문승상의 사당
▶ 문승상의 사당을 참배하고서
P244. “천고에 흥하고 망할 때에는 하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늘의 뜻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상서로운 경사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좇기도 하고, 알뜰하게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이나 의사들은 자기 한 몸으로 하늘에 버티는 셈이니, 어찌 억지 놀음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P245. 후세에 와서 천하를 차지한 사람은 모두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확실한 자신이 없었기에 하늘을 믿지 않았고, 하늘을 믿지 않았기에 사람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의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자는 모두 자기의 강적이므로, 언제나 그들이 정의로운 군대를 규합하여 옛날의 질서를 회복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천하를 차지한 자들은 차라리 그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어찌보면 다 약자인 것 같다. 겁이 많다. 그렇기에 주변을 잘라내는 것이 아닐까?
▶ 관상대
▶ 시원
P250. 비록 낙제한 시험지라도 채점이 친절하고 상세하여, 응시자가 낙제한 이유를 똑똑히 알도록 해주었다. 정성스럽고 간곡한 태도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 일깨우고 가르치는 태도 그대로이다. 이 답안지를 통해서 큰 나라 시험의 깊은 점을 보았으며,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유감 없도록 충분히 갖춰 놓았음을 보았다.
→ 만약 우리나라도 이렇게 한다면? 응시자와 고용자 혹은 대학관계 등 상호가 이해할 수 있을까?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내가 어느 회사에 면접을 봤다고 치자. 내가 떨어진 얘기를 들었다. 인상이 안좋고 밝지 못했다. 등등 이것은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반대!
▶ 조선관
■ 앙엽기
▶ 들어가기
▶ 흥인사
P258. 아아! 슬프다. 충신과 의사는 나라가 망해 엎어진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간절한 충군애국의 마음을 늦추지 않는다. 정성이 곧 천하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이는 오로지 뜻을 정성스럽게 해서 마음을 바로잡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루라도 이 같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있따면 이런 과업은 그날그날의 급선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대의에 밝지 못하므로, 비록 만 리의 강토를 지니고 있더라도 오히려 천하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이러한 대의를 앞세울 줄 안다면, 비록 조각배 속일망정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가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백운관
▶ 법장사
▶ 융복사
P264.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비록 심부름하는 하인 하나 없더라도,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는 장사치를 상대하여 물건 값이나 흥정하는 것을 아직 좀스럽고 더러운 짓으로 친다. (중략)
그들은 친구를 찾아 고향 소식을 묻기도 하고, 그릇 등속과 의복을 사기도 한다. 그들이 찾는 물건들은 대개 골동품이나 새로 발간된 서적이며, 법서, 명화, 관복, 염주, 향랑, 안경 등이다. 남을 대신 시켜 군색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손으로 유쾌하게 골라내는 것보다 못하기에 직접 장터에 나가서 흥정하는 것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래서 중국 사람은 저마다 물건을 감상할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관제묘
▶ 숭복사
▶ 이마두의 무덤
■ 작품 해설 –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한 여행기
P273. 조선과 명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개국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국경의 장벽을 높이 쌓았다. 사신 외에는 국경을 넘어갈 수 없어, 유학생이나 무역상이 끊어졌다.
P273. 박지원은 처음부터 청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며, 그래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나라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오히려 앞서 간 문물을 배워 와야 할 나라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P274. [북학의]
학문을 하려고 하면, 중국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오랑캐이니, 그들을 배우기가 부끄럽다.’고 하면서 중국의 옛 제도까지 아울러 더럽게 여긴다. 그러나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 어찌 오랑캐, 타국만을 말하겠느냐. 스승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어린아이도 나무도 물도 동물도 물건도 모두 스승이 될 수 있다. 만물이 스승이다.
P275. 과거 시험에 박지원의 문체를 흉내 낸 답안지가 제출 될 정도로 젊은 지식인들은 [열하일기]에 환호했지만, 정조가 문체반정책을 내세우며 박지원의 문장이 순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것은 문체 자체보다도 [열하일기]의 파괴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열하일기]가 출판되지 못한 사실만 보더라도, 기득권층이 얼마나 [열하일기]를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 김규리/김미화 등등 연예계 블랙리스트가 떠오르는 건 나뿐일까? 국민이 말 할 수 있는 것을 박탈하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니다! 철저히 조사했으면 좋겠다
P280. 서양문물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도 도덕적으로는 훌륭하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유일신 천주를 내세운 신앙만은 용납하지 않았으니, 주자학을 신봉하던 조선 지식인의 한계라고나 할까.
3. 내가 저자라면
★ 목차/구성에 대하여
기행문의 특성상 시간순, 장소순으로 기록되었기에 목차 및 구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단, 개인적으로 마지막 작품해설을 책의 앞부분으로 옮겼다면 좋았을 것 같다. 다른 고전보다 읽기는 상당히 쉽다. 보고 듣고 느낀바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용후생, 실학파 등 18세기 조선시대의 상황과 박지원, 그리고 열하일기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첫 부분인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가장 뒤에 배치하여 마무리를 했다면 읽는 독자가 ‘아! 또 다른 고전을 읽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 이 책의 장점
1. 상세한 작품해설
지금까지 개인적 성향으로 봤을 때, 작품해설이 있는 책에 대해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책의 내용, 시대, 인물을 이해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용 자체를 보고, 감상하고 느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리. 해설을 통해 사전지식(?)을 얻고 본격적인 내용으로의 여행이 더 즐거웠다.
2. 박지원 생애에 대한 정리
박지원의 생애를 정리해 줘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지원에 대해 알고 싶을 때, 간단히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3. 각 장 시작 전 대략의 개략적 내용 정리
성향이 또 나타난 것 같다. 논어, 사기열전과 같이 장의 시작 전 개략적인 내용을 가이드 해준 점이 너무 좋았다. 까마득한 미지의 세계보다는 알고 들어가는 안정감을 더 중요시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주 큰 모험을 즐기지는 못하나보다.
4. 사진/디자인/지도
독자에 대한 배려가 좋았다. 사진을 통해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으며, 책 속에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연암 선생의 동선을 표시해 준 점 역시 함께 동행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디자인에 대해서 누군가는 별로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고풍스러움에 더 끌렸다.
★ 보완점 / 저자의 눈으로
각 페이지가 숫자가 아닌, 한글로 되어 있어서, 약 1초의 시간동안 페이지를 적는데 생각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중에 숫자를 사용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 특별한 보완점은 없다. 한글로 쓴 숫자가 너무 힘들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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