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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熱河日記)
저자 연구
박지원(朴趾源: 1737.02.05 ~ 1805.10.20)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에 한양의 서부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할아버지인 박필균에게 글을 배웠다. 박지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지원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과거에도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내는 등 고위 관직에 있었으나 청렴했기에 집안은 가난했다. 가족은 십여 명이나 되었는데 마땅한 수입이
없었다. 관직에 있던 할아버지마저 물러나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이러한
대가족의 생계를 이끌어간 것은 형수 이씨였다. 가난이 계속되자, 박지원은
가족들과 상의하여 연암 골짜기로 이사했다. 박지원은 손수 잡목을 베어내고 돌부리를 캐내어 집을 짓고
지냈다. 이곳에서 형수 이씨와 함께 과일 나무를 키우고 연못에 고기를 키루는 등 살길을 모색했으나 “선비
집안의 부인네들에게는 가난이 바로 병이요, 병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병이 단단히 엉겨 붙어 벗어내고 떼어버릴 길이 없어, 집집마다 똑같은 증세요, 사람마다 매한가지다.” 형수가 죽었을 때 박지원이 묘갈명에 쓴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가난했고 형수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다.
박지원은 16세가 되었을 때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박지원은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이보천은 사위인
박지원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16세에 『맹자』를 가르쳤다는 것은 이미 박지원의 학문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박지원은 책을 빠르게 읽지도, 외우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책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따지고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히 책 읽는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실천한다는 뜻의 거경과 의미를 헤아리는 궁리를 합친 거경궁리의
방법으로 학문에 접근했다. 책을 느리게 읽는다며 타박하는 사람에게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책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하지 않는가? 문장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연구하고 깨달아
실천해야 한다.' 박지원은 이양천에게 학문을 배울 무렵인 스무살 즈음에 우울증을 앓아 밤에 잠이 오지 않고 세상 모든 일이 귀찮아졌다. 박지원의 우울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박지원은 영조 때의 인물이다. 숙종이나 경종 때처럼 당쟁으로 수많은 선비들을 한꺼번에 죽지는 않았으나 당쟁이 치열했다. 과거를 보고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가난으로
학문을 계속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환경이 우울증을 앓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지원이 29세가 되었을 때, 홍대용이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연경에 들어갔다.
박지원은 연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고 44세가 되었을 때 자신도 연경에
들어가 저 유명한 『열하일기』를 남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도 교훈을 남기기 위해 썼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연경에 도착한 박지원은 번화한 시가지와 문물을 살피고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열하일기>에 담았다. '청나라는 과연 대국이구나. 청나라의 문물이 이토록 번성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만 찾고 청나라를 배격하는가?' 열하일기는 기행문만은 아니다. 박지원은 “호질”에서 호랑이의 입을 빌려 이기적인 인간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대개
제것이 아닌 것을 취함을 도(盜)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
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 장수 되기 위해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호랑이는 북곽선생을 더러운 선비라고 질책하고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지원 스스로도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
평가했을 정도로 조선 후기의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 되었다.
박지원은 34세가 되었을 때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 박지원의 문명이 높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과에 급제하게 하여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회시에 응하지 않았고, 회시에 응하더라도 노송이나
괴석을 그려 제출했다. 특히 그가 활약할 무렵은 홍국영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홍국영이 노론을 심하게 미워했기 때문에 박지원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우리 고전
읽기의 즐거움 4 문학작품은 ~ 때로는 이야기로, 때로는
노래로, 혹은 다른 형식으로 갖가지 삶의 모습과 다양한 가치를 전해 주며, 읽는 이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것이 문학의 힘이다. 어렸을 때는 이런 걸 알지 못하며 책을 읽었어도 책을 통해 기쁨과 위안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알면서도 기쁨과 위안을 받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파우스트>, <열하일기> 등을 통해 기쁨과 위안, 영감까지 받았다. 읽기에 글쓰기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겠다. 4 고전 문학 작품은 ~ 낡은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가치와 의미는 결코 낡은 것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독자가 달라져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작품 속에는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근본적인 가치가 담겨 있다. ~ 시대와 민족의 벽을 넘어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것이다. 5 고전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그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기쁨을 얻게 된다.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아는 것이 아니라 잊었던 것을 되찾는 신선함이다. 처음
가는 장소에서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을 때의 그 어리둥절한 생소함, 바로 그 신선한 충동을 우리
고전 작품은 우리에게 안겨 준다. 거기에는 일상을 벗어났으되 나의 뿌리를 이탈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까지
함께 있다. 저자 서문 18 장자의 저서 중에 나타난 제왕과 성현, 임금과 정승, 처사와 변객에 대한 일도, 더러는 정사에서 빠뜨린 일을 보충해야만
할 것이다. 도끼를 잘 쓰던 장석(匠石)이나 수레바퀴를 만들던 공인 윤편(輪扁)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쉴 새 없이 변하여, 사람으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궤변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의 학설을 끝내 없애 버리지 못한 이유는
진리에 대한 논평을 잘 전개하였기 때문이니, 그를 책을 짓는 사람으로서 영웅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19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서 <장자>의 외전에는 참도 있고 거짓도 있지만,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은
있으나 거짓은 없음을 알았다. 도강록 들어가기 23 숭정 17년에 의종열황제가 나라를 지키다가 죽고 명나라가 망한 지 벌서
130여 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지금까지도 ‘숭정’이라는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나라가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와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지만, 우리 동쪽 나라 수천리는 두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루어 홀로 명나라 왕들의 제도를 지켰다. 이는 명나라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서 몰아내고 중원을 깨끗케 하여 선왕의 역사를 다시 비내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라도 높여서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년 계묘년(1783년)에 열상회사 쓰다. 박지원의 조선 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엿보이는 부분이라고 한다. 다른 학자들 뿐 아니라 본인에 대한 자아비판의식도 살짝 보이는 것 같다. 도강록 27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니 구름과 산이 아득해, 이제는 서글퍼지며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가는 것을 평생의 장유(壯遊)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 번 구경해야지.” 하며 펑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둘째가 되었다.
“오늘은 강을 건너야지.” 하며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청나라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향이 그리워진 건가? 아마도 별 볼 것 없는 국경 근처에서 어쩔 수 없이 묵느라 그랬던 것 같다.
청나라에 가서 새로운 문물, 신기한 것들 보다 보면 금방 생각이 달라질 거다. 28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과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권을 넣었다. 행장이
이같이 단출하니, 아무리 엄하게 짐을 뒤진다고 해도 걱정할 게 없었다.
참 간소하다. 그래도 몇 달 동안
여행할 건데… 라고 생각했는데, 짐꾼들이 따로 있지. 스스로 짐을 많이 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29 깃대 셋을 세워 문을 만들고 금지된 물품이 있는지 뒤졌는데, 황금, 진주, 인삼, 초피와
팔포(八包)를 넘는 은자(銀子)가 중요 물품이었다. ~ 말구종들에게는 웃옷을 풀어 헤치게도 하고, 바지 아래도 내리훓어 보며, 비장이나 역관의 짐 보따리도 풀어 본다. ~ 김 보따리를 뒤지지 않으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뒤지면
이같이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의주의
장사꾼들은 짐 보따리를 뒤지기 전에 남몰래 강을 건너가니,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으라. 그때나 지금이나 국경을 건너는 건 큰 일이었다. 사람뿐 아니라 물건도… 30 잠시 아찔하는 순간 하룻밤이 지난 듯 싶었다. 하룻밤 뿐이랴. 지금까지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명나라 장수 강세작이 조선에 귀화한 이야기 32 강홍립은 결국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청나라 병사들은 홍립의 군사를
두어 겹이나 에워싸고, 명나라 병사들 중 도망쳐 온 자들을 샅샅이 뒤져내어 바로 묶어 모조리 목을 베었다. 세작도 붙들려서 묵인 채 바위 아래에 앉았는데, 책임자가 어쩐 일인지
잊고 가 버렸다. 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풀어 달라고 눈짓을 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서로 기웃거리기만 할 뿐, 손 하나 까딱하는 이가 없었다. 세작은 할 수 없이 스스로 등을 돌 모서리에 비벼 줄을 끊고 일어서서, 죽은
조선 군사의 옷으로 바꿔 입고 조선 군사들 가운데 들어가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33 사신들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미리 가산에 알려서
이씨는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죽었다. 박지원은 탄식하며 이렇게 썼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돌아올 때까지 전 과정을 26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기록하여
조선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읽히기 시작했다.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패사(稗史 : 사관이
아닌 사람이 이야기 형식으로 쓴 문장)와 소품에 지나지 않으면서, 조선의
국시를 뒤흔드는 불순한 잡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학이 공허한 공맹의 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조선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체로 기록했다.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계에 나가면 굶주림은 면할 수 있다.'
박지원은 정치 판도가 바뀌면서 정치가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홍국영이 죽었으나 정조는
남인들을 발탁하고 있었고, 노론은 남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50세가 되어서야 유언호의 천거로 선공감역에 임명되었다. 노론 벽파인
심환지와 정일환 등이 찾아와 벽파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박지원은 사헌부감찰, 한성부판관, 안의현감을 지냈다.
박지원은 1797년 면천군수,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과 목민관을 지낸 경험에 기초하여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많은 저서
중에서 <열하일기>는 북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북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한 문명을 받아들이고 청나라를 통해 서구문명을 인식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신분제
혁파 등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 국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서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천문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을 지어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 실학적인 입장을 반영했다. 박지원은 1805년(순조 5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