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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子, 배에서 삶을 마감하다
충과 효의 균형감각, 나의 아들 이순신(1545.3.8~1597.4.11 탄생에서 모친상까지)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의 독백)
나의 셋째 아들 이순신. 1545년 3월 8일 자정 한양 건천동에서 그 아이를 낳았다. 순신이가 태어나던 해 ‘을사사화’가 있었다. 당시의 조선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등 잔혹한 사화가 정치무대를 휩쓸었다. 개혁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는 평행선을 달리며 같은 하늘 아래 함께 할 수 없었다. 시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은 급진개혁 성향의 조광조(趙光祖)와 뜻을 같이 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하셨다. 그렇게 나의 남편 이정(李貞)은 정치적 끈을 잃었다. 그리하여 순신이가 태어날 즈음 집안의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아이들의 5대조인 ‘이변(李邊)’은 대제학과 영중추부사를, 증조부 ‘이거(李据)’는 병조참의를 지냈더랬다. 그러했던 집안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 이변-이거-이백록-이정-이순신)
그러나 나는 집안의 중흥을 꿈꿨다. ‘역적’ 집안으로 몰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민으로 살았던 남편은 아들 이름을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였다. 큰 아들을 희신(羲臣), 둘째 아들을 요신(堯臣), 셋째 아들을 순신(舜臣), 넷째 아들을 우신(禹臣)으로 한 것이다. 태평천하의 요순시대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신하가 되어 집안과 나라를 일으키라는 꿈과 기대를 이름에 담았다. (※ 큰 형 희신의 아들이 뇌, 분, 번, 완이고, 둘째 형 요신의 아이들이 번, 완으로 두 형이 죽은 후 이순신은 6명의 조카를 거두어 키운다. 큰 형의 둘째 아들 이분(李芬)은 후에 행록(行錄)을 쓴다.)
순신이는 얼굴도 잘 생겼고 성품도 인자하였으며 시재(詩才)에도 뛰어난 아이였다. 둘째 손자 이분(李芬)은 행록(行錄)에서 ‘(이순신은) 처음에 큰 형님과 둘째 형님 두 분을 좇아 유학을 수업했다. 재기(才氣)가 있어서 가히 성공할 듯 했다. 그러나 항상 붓을 던질 뜻을 품고 있었다.’라고 쓴 바 있다. 이렇듯 순신이는 원래 문과를 준비했으나 후에 뜻한 바가 있어 무과로 전향하여 1576년 2월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렇게 그 아이는 무인으로서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청장년기를 보낸다.
그렇게 종 6품에 머물던 순신이는 류성룡의 천거로 1591년 47세가 되어서야 정 3품 전라좌수사(수사는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역 사령관)가 된다. 무려 7단계나 올려진 파격인사였던 셈이다. 류성룡은 나의 둘째 아들 이요신의 친구이기도 했고 순신이와는 같은 동네에서 유년시절을 함께 하였기에 순신이의 인물됨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순신이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바로 다음 해인 1592년 4월에 왜선 700척이 부산 앞바다를 덮으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던 신립 장군이 패하고 서울 방위의 책임자 도원수 김원명은 대량의 무기와 화약을 버리고 도망친다. 4월 30일 선조도 백성을 팽개치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줄행랑을 떠난다. 그 아이는 충청도 아산에 있던 나를 자신의 근무지인 여수 삼도수군통제소 근처로 오게 하였다. 나는 그 아이의 안위를 챙겼고 그 아이는 전쟁 중에도 틈 나는 대로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1593년 8월에 군영을 한산도로 옮긴 뒤에는 나를 보기 위해 300리 길 여수로 왕래하는 게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순신이는 정찰선을 보내며 꾸준히 나의 안부를 묻고 때로는 전복, 어란 등을 보내왔다.
순신이는 그렇게 나라를 챙기고 나를 챙기며 충과 효를 다하였다. 해전에서는 승전을 거듭하며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조선이 반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이어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왜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시작된다. 그들에게 순신이는 두려운 존재였으므로 간첩을 보내 이순신을 모함하는데, 무능한 선조와 원균 일당 덕에 그들의 모함은 성공한다. ‘군공을 날조하여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순신이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의금부에 한달 여 간을 옥고를 치뤘으나 선조는 순신이의 혐의를 밝히지 못하자 석방하며 백의종군을 명한다(1597년 4월1일). 그 아이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순천 고음에서 배를 탔다. 이미 늙고 병들어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나 나는 그 아이를 꼭 봐야 했기에 먼 길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이 상했던 지라 1597년 4월 11일 아들을 만나러 가는 배 안에서 나의 삶을 마감했다.
내 나이 83세, 나는 그렇게 배 안에서 눈을 감았다.
전쟁을 끝내며 전쟁 같은 삶도 끝나다(1597.4.1~1598.11.19 백의종군에서 노량해전까지)
(이순신의 독백)
1597년 4월 1일, 석방되어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다. 4월 13일 해조차 깜깜하다. 나를 보기 위해 멀리 고음천에서 배를 타고 오시던 어머니께서 끝내 배 안에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기진맥진 했다. 4월 17일 의금부 서리 이수영이 남쪽으로 떠날 것을 재촉한다. 백의종군의 시작이다. 어머니 장례도 못치르고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하늘은 어찌 이리 무심한가. 나는 어째서 빨리 죽지도 못하고 있단 말인가. 죄인의 몸으로, 상복을 입고, 백의종군을 해야 하는 나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대패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함 300척 이상이 깨어졌고 삼도수군은 궤멸되었다. 도제사였던 원균은 사망하였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도 나는 여러 해전을 치뤘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가 남겼다는 유언시는 가소로웠다. 더 이상 그런 노래가 이 세상에 남아서는 안될 일이다. 1597년 9월 명량해전은 울돌목 지세를 이용한 전투로 13척 배로 133척 왜선과 싸워 31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조선은 전사자 2명, 부상자 2명 뿐이었다. 기쁨도 잠시, 1597년 10월 14일, 가장 아끼던 막내 아들 이면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은 부인 방씨와의 사이에서 삼형제 회, 열, 면과 딸 둘을 두고, 서자 훈, 신과 서녀 1명을 두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핍박, 조선 군사를 무시하는 명나라 군사들,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나의 삶은 고단하다. 명나라 장군 ‘진린’과 함께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 맞아 싸웠다. 500척 왜선과 싸워 200여 척 격침, 100여 척을 나포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과 함께 정유재란의 막이 내렸다. 적의 총탄을 맞고 전쟁 같은 나의 삶도 끝났다.
내 나이 54세, 나는 그렇게 배 안에서 눈을 감았다.
내 마음 속 책갈피
조선을 지키리라
1592/2/27 아침에 점검을 모두 마치고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조망해 보았다. 고립되어 위태로운 외딴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데, 성을 쌓고 못을 파는 일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첨사가 마음을 다해 애썼지만 아직 설비가 갖춰지지 못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무인, 군인이라 하면 단순하고 무식할 거 같다는 편견이 있는데 리더의 경우는 지력과 직관이 뛰어나야 제대로 된 전략을 짤 수 있을 것이다. 형세를 조망하며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했을 이순신. 성을 쌓고 못을 파는 일까지 지휘하며 숲도 보고 디테일도 봐야 했으니 신경 쓰이는 일이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겠다.
1592/3/4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 우두머리 중에서 곤장을 때렸다. 아산으로 문안 갔던 나장이 들어와,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승려들이 곤장 맞았다고 하니 뭔가 웃기다. 살생에 대한 저항감이 있는 승려들이 조선이나 일본이나 어떤 마음에서 전쟁에 임했을까. <칼의 노래>에 보면 ‘나무묘법연화경’이라 쓰인 깃발이 걸린 왜적의 배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적선을 깨뜨리고 그 깃발을 찢어 헐벗은 장졸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혔다고.
★1591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를 두고 조선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조선조정은 만에 하나 일본이 침범해 올 것을 대비해 전국 각지의 성곽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고, 무기를 점검하며, 능력이 뛰어난 장수를 서열에 상관없이 발탁한다는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때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새로운 임지에서 누구보다 성실히 군사 시설을 살펴보고 군사들을 점검하였다.
1593/6/22 방답은 처음에 15명만 보냈기 때문에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너무도 나를 기만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래 사람들이 일을 못하는 것도 답답하지만, 기만하기까지 하면 정말 답이 없었을 것이다.
주) 이순신의 승리는 철저한 대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92년 2월에는 몸소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무기와 전선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였고, 1593년부터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 협상을 벌이며 실제 전투가 뜸하던 시기에도 이순신은 무기와전선을 새로 만들며 다시 있을지 모를 전쟁을 대비했다.
<열하일기>의 박지원과 달리 <난중일기>의 이순신은 나와 성향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각각의 기질과 재능을 살려 각자의 방식대로 나라를 위해 힘썼다. 이순신은 신중하여 머뭇거리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겠으나 신중한 모색 끝에 실천이 결정되면 그 실천은 매우 디테일하게 진행된다. 놀이터와 같은 공간에서는 모험이, 전쟁터와 같은 공간에서는 철저한 준비가 중요하다. 나의 무대는 놀이터인가 전쟁터인가.
1592/4/12 관아로 올라가면서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는 돌을 보았다.
경주 이모댁에 이러한 돌이 있다. 집 앞과 집 안 마당에 있는데 말을 타고 내릴 때 디딜 수 있도록 무릎 높이의 말뚝 같은 돌기둥 위에 홈이 패어져 있다. 조선시대 주차장이라고 할까. 그 돌을 보면서 ‘아 이 공간에서 옛 조상들은 말을 타고 어디로 갔을까’ 상상을 해보았다. 관아로 가는 길에 이순신도 그 돌을 보았구나. 일상이었을 터인데 굳이 왜 일기에 쓴 이유는 무얼까.
1594/2/15 식사 후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에게 늦게 온 죄를 추궁했다. 흥양 배에 부정한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는데 엉성하게 처리한 일이 많았다.
거북선은 이순신과 그 부하들이 판옥선을 개량해 새로이 만든 돌격용 전선이었다. 이순신은 임금님께 올린 보고서에서 거북선에 대해,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해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뾰족한 쇠를 꽂았으며 배 안에서는 밖을 엿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배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어 수백 척의 적선 가운데라도 뛰어들어 대포를 쏠 수 있는 배라고 설명하였다.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이 다섯 번 등장할 뿐이지만, 1592년에 있었던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 등에 투입되어 활약을 펼쳤다. 거북선은 전투가 시작되면 곧장 적의 진영으로 돌격해 대포를 쏘고, 왜적의 배에 가서 부딪혀 적선을 넘어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거북선, 얼마나 창의적이냐? 창의적인 사람이 군에 있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나대용은 각종 무기와 병선을 스스로 고안해내는 일에 뛰어난 창의력을 보였다고 한다(출처: 김훈, 칼의 노래, 인물지). 이순신은 선조와 원균 때문에 힘들었겠지만 한 편으로는 나대용 같은 부하가 있어서 행복했을 거 같다.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며 흥분했을 두 인물을 상상 하자니 나까지 뿌듯해진다.
1594/2/16 임금님의 귀를 속이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나랏일이 이러하니 왜적이 평정될 리 만무하다. 천장만 올려다볼 따름이다. 또 수군의 일가족에 관한 일과 장정 넷 중 두 사람이전쟁에 나가는 일에 대해 논하며 몹시 잘못된 처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에 있던 이순신과 서울의 조정이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언제나 뜻을 합쳐 왜적에 맞서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군사를 보충하는 문제를 두고 이순신과 조정은 생각을 달리했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은 군사가 부족했고, 군사가 사망하거나 도망쳤을 경우 그 군사의 가족이나 이웃을 뽑아 빈자리를 채웠다.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을 대신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수군에 내렸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병력을 유지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이순신은 이러한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몇 번이나 조정에 요청했다. 어려운 문제다. 민심을 생각하면 엄격한 징발은 가혹하게 생각되었겠지만, 말 그대로 그 때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민생을 위한 것이었으니. 이순신은 사안의 우선순위와 결단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전과 탈영자 세 명을 붙잡았다. 군관을 시켜서 목 베개 했다. 그들은 불탄 향교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목을 벨 때, 그 식솔들은 울부짖다가 실신했다. 잘린 머리 네 개를 마을 정자나무에 걸었다(김훈, 칼의 노래, P 34)’
1594/2/13 곧바로 나대용을 수사 원균에게 보내 작은 이득을 보고 공격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일단 머물고 있다가 기회를 타서 무찔러 전멸시키자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원균은 결국 칠천량 해전에서 자기가 먼저 도망가서 대패할 거였으면서 뭘 그렇게 서둘렀던 건지. 3년 후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순신의 신중함을 나는 배워야겠다.
이순신은 언제나 철저하게 준비하는 장수였으며, 조선 수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이는 지휘관이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작전을 세우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운주당’을 짓고 밤낮으로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군사적인 의논을 했다고 한다. 또한 하급 병졸이라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직접 이순신에게 가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전투에 나갈 때는 부하 장수들과 더불어 전략을 정한 뒤에 출전했기 때문에 패하는 법이 없었다고 류성룡은 술회했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둘째 형 이요신의 친구였다고 한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자라 커서는 나라를 위해 함께 한 인연.
1592/3/5 그 편에 죄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책을 보니 바다 전투와 육지 전투 및 불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방법 등이 하나하나 논의되어 있는데, 진실로 이 세상에 비길 데 없이 신통한 이론이었다.
이렇게 책도 전해주고. 둘의 우정이 멋지다.
1596/1/12 전에 영의정이 천식을 심하게 앓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병이 나아 평안해졌는지 알지 못하여 척자점을 쳤다. 그러자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을 들을지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참말로 길하고 길한 괘였다.
류성룡의 건강이 걱정되어 점을 치는 그 마음. 괘를 얻고 그 괘를 해석하는 그 마음.
류성룡(1542-1607)은 1593년부터 6년간 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영의정을 맡아 조선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을 서울의 건천동(지금의 서울시 중구 인현동일대)에서 보냈다. 이때부터 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지냈던 듯 하며, 이후 정치적으로도 운명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1591년, 평소 이순신의 자질을 눈여겨보았던 류성룡이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였고,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난을 함께 헤쳐 나갔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나가는 사이. 멋있다. 류성룡이 전라 좌수사로 추천했구나. 이순신의 ‘백락’이었던 셈이다.
왜적의 배를 침몰시켜라
1592/4/20 대규모 왜적의 기세가 너무도 사나워 그 선봉을 대적할 장수가 없는 까닭에 왜적이 승승장구하며 몰아치는데,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와 있는 자들 같다고 하였다.
영화 <명량>을 보니 왜적들이 너무 무섭더라. 나는 체육시간에 피구 할 때 그 동그란 공도 무섭던데, 빗발치는 칼과 화살을 마주 대했을 때의 공포를 상상도 못하겠다. 무인지경에 들어와 있는 자들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의 광기.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의 군대가 부산을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왜적은 동래성으로 들이닥쳤고, 동래 부사 송상현의 지휘 아래 군사와 백성들이 힘을 합쳐 저항했으나 성은 곧 함락되고 말았다. 왜적의 기세에 겁을 먹어 싸우지 않고 달아난 지방 수령이나 장수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납게 진격한 왜적은 5월 초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1592/5/29 우수사는 오지 않았다. /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고, 나 또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총알이 등을 뚫고 들어갔지만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요새 직원 구하는 중인데 잘 안된다. 면접 보기로 해놓고 안 오고, 출근하기로 한 날, 출근을 안하기도 하더라. 그럴 때도 황당한 데 전쟁 중에 오지 않으면 얼마나 참담할까.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도 총을 맞았구나. 누구는 오지 않고 누구는 같이 총 맞고.
사천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일대에 접한 바다를, 노량은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과 남해군 사이의 바다를 가리킨다. 왜적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5월 29일사천 앞바다로 출격하였다. 이날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어 돌격적을 펼쳤고, 모두의 선전 끝에 왜적의 배 13척을 침몰시켰다. 한편 이순신은 사천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만다. 후에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깨뼈가 깊이 상한 데다 갑옷을 입고 있다 보니 상처가 헐어 진물이 계속 흐른다”고 했는데, 이때 생긴 상처 때문에 오랜 기간 고통을 겪은 듯 하다.
1593/2/22 성실하지 못한 자들을 골라/ 왜적이 그 배에 올라타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분통함에 쓸개가 찢어지는 듯 하였다. /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 하며 끝끝내 배를 돌려 도와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형편없음은 말할 거리도 못된다. 원통하고 분하다. 오늘의 분함을 어떻게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 경상 수사(원균)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성실하지 못한 자들을 골라..라는 말이 너무 웃김.
63 주) 곽재우 및 김덕령: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 때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차례 왜적을 물리친 의병장이다. 붉은 옷을 입고 출전하여 홍의장군이라 일컬어졌다. 김덕령(1567-159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권율 휘하에서 곽재우와 함께 경상도 방어에 공을 세웠지만,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누명을쓰고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다.
1595/4/24 아침 일찍 아들 울, 조카 뇌, 조카 완이를 어머니 생신에 음식을 올려 드리라고 내보냈다. / 망기시로는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죽으러 나왔다. 지독한 놈이라 할 것이다.
P 71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군 가운데 일부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또는 상관의 혹독한매질을 견디다 못해 조선 진영으로 와서 항복을 하였다. 조선이 항복한 왜인들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항복한 왜인들은 모여 있으면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이유로 조선 땅 여러 곳에 나누어 두었으며,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나 검술에 능숙한 자는 조선군에 편입시켜 그 기술을 전수하게 하였다. 1594년 가을 무렵부터 항복한 왜인들의 상당수는 이순신이 다스리던 한산도로 보내져 노 젓는 선원이 되었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도 얼마간 도움이 되었다.
노를 젓는다는 것이 참 고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수군은 그래서 일본군이건 조선군이건 힘들었을 터. 힘들어서 조선 진영으로 와서 항복했는데 어쩌면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였을 수도. 둘째 이름이 노아인데 그렇지않아도 오늘 남편이랑 한자를 어찌 해야 할까 고민했었다. 노아의 방주도 있고 해서 ‘세상을 여행하며 노 젓는 아이’라는 뜻에서 노아라 했는데 인생이 고단할 거 같다. 한자 바꿔야지.
1593/5/24 오후 두 시쯤 명나라 관원 양보가 우리 진영 문에 이르렀다. 우별도장 이설더러 나아가 맞이하게 하여 우리 배로 인도했더니 퍽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배에 오르도록 청한 뒤 명나라 황제의 은혜에 두 번 세 번 감사를 표했다.
명나라 구원병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어서 명나라 군대로 인해 힘들었던 부분도 많았던 거 같다.
1593/6/13 명나라 사람 왕경과 이요가 우리 수군이 강성한지를 보러 왔다. 이들로부터 이여송 제독이 나아가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나라 조정에서 문책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많았다.
욱하는 감정이 들었을 거 같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라는 생각과 그래도 명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니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황 속에서.
1594/7/17 나는 장 파총과 함께 앉아 만 리나 되는 바닷길을 고생스레 와 주시어 감사한 마음 끝이 없다고 먼저 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작년 7월 절강에서 출항하여 요동에 이르렀을 때 요동 사람들이 앞으로 지나갈 바닷길엔 돌섬과 숨어 있는 곶이 많다 하고 또 앞으로 일본 강화를 맺는다 하니 가서는 안된다며 간곡히 힘써 만류하기에 그대로 요동에 머물다가, 시랑 손광과 총병 양문에게 긴급 보고를 올리고 올해 3월 초 배를 띄워 왔으니 어찌 수고와 어려움이 없었겠느냐고 답했다. 나는 차를 드린 다음 작은 술잔에 술을 대접했는데, 사뭇 비분강개한 심정이 되었다. 또 왜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1592년 5월 27일, 일본군이 임진강을 넘어오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명나라 조정은 장수 조승훈과 군사 3천 명을 조선에 파병했지만 명나라 군대는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했다. 같은 해 12월, 이번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1549-1598)이 4만 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나라의 지원으로 평양과 개성을 되찾고, 서울을 점령하고있던 왜적까지 물리칠 수 있었지만 명나라 군사들이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과 소, 말 등을 바쳐야 했고, 식량을 빼앗긴 백성들은 더욱 굶주려 갔다. 더욱이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부족한 군사까지 보충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의 젊은 남성은 대부분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에휴, 쳐들어오는 놈이나 도와주겠다고 온 놈이다 힘들게 하기는 매 한가지. 몽고군이 쳐들어 왔던 고려의 백성도 그러하고, 왜적이 쳐들어 왔던 조선 중기의 백성들도 그러하고, 일제가 침략했던 구한말도 그러하고, 북한이 쳐들어왔던 6.25 때도 그러하고. 백성들의 삶은 어찌 이리 평온할 때가 없을까. 지금은 전쟁은 없지만 이 시대는 어떤 것으로 피폐한가.
1597/9/15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길목 앞의 한 사람’에서 밀물과 썰물이 하루 4번 번갈아 도는 것을 이용해 13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물리칠 힌트를 얻은 걸까? 평소에 병법도 많이 읽으며 여러 전략 시나리오를 짰던 모양이다.
“오늘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주었다.
얼마나 전투에 골몰하면 이런 꿈까지 꿀까.
1597/9/16 그러나 왜적이 우리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까닭에 전세를 예측할 수 없어 한배에 탄 사람들끼리도 서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렇게 무서워 새파랗게 질린 사람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기 위해 이순신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위야, 군법에 따라 죽고 싶으냐? 안위 네가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두려워 하는 이들을 어찌 되었건 격려해서 싸우게 해야 했으니.
또 김응함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몸을 피해 대장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그 죄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느냐! 처형하고 싶지만 왜적의 형세 또한 급박하니 일단 공을 세우게 해 주마.”
곧바로 시체를 토막 내라고 명령했더니 왜적의 기세는 푹 꺾이고 말았다.
81 1597년 일본은 조선을 또 한 번 침략했으며,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정유년에 치른 해전 가운데 이순신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전투는 명량해전이 아니었을까 한다. 명량은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울돌목’이라고도 부른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으며, 복귀한 지 한 달여 만에 명량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는 사이,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참패하여 수많은 군사와 전선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전선 12척뿐이었지만 통제사 이순신은 장수와 군사들을 모아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소규모 군대로 많은 적을 막아 내기 위해 이순신은 명량이라는 좁은 길목을 택했고, 이곳으로 왜적을 끌어들인 뒤 전투를 치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영화 <명량>이 명량해전을 다룬 거였지. 그런데 12척이 아니라 13척이라 하던데. 7월 원균의 대패가 8월 이순신 복귀의 계기를 만들어 9월의 성공을 이끄는 흐름이구나. 13척으로 133척을 막아낸 이 전투는 앞서 이순신이 병법에서 언급한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싶다.
84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1543-1607)은 1598년 7월에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진린은 이순신과 연합 함대를 구축해, 육지에서 후퇴하여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려는왜적을 바다 위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펼쳤다.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처음부터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진린을 극진히 대접하고, 진린이 이순신의 인간됨을 알게 되면서 점차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갔다. 더욱이 진린은 이순신과 노량 해전에 출전함으로써 이순신의 마지막을 함께한 명나라 장수가 되었다.
진린이 명나라로 가자고 했다던데. 조정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순신은 끝내 나라를 지켰다. 모함 받고 고문 당하고 모친상도 못치르고 백의종군하고 아들도 잃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끝까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다.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1595년 4월 29일 해남 현감이 공사 간의 예를 행한 뒤, 두 번이나 기한 안에 오지 않은 하동 현감에게 곤장을 아흔 대 쳤다.
아홉 대도 아니고 아흔 대.
1596/6/20 그런 다음 평산포 만호에게 뒤쫒아 진영에 이르지 않은 책임을 추궁했더니, 기한을 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해괴하기 짝이 없어 곤장을 서른 대 때렸다.
어느 시대나 뺀질이는 있다. 데드라인을 알려주지 않아서라는 변명이라니.
90 이순신은 군대의 안정을 위해 언제나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왜적이 침입해 온 실전 상황에서 군율로 철저히 다스리지 않고는 군사들을 통솔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자신이 수군의 수장으로서 호령을 내려도 각 고을 수령들이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핑계를 대며 명령을 따르지 않아 수령들을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곤장을 때렸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는 글이 종종 나온다. 가혹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평화 시의 일상이 아닌 실전상황에서는 그런 엄격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수령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1592/1/16 한갓 제 몸 살찌우는 일이나 하고 이처럼 맡은 일을 돌아보지 않으니 다른 일도 알 만 하다.
1593/6/8 매번 거짓말로 둘러대며 일을 넘겼으므로 오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다.
93 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는 아전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이순신은 이러한 아전들을 무겁게 처벌했다. 아전들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군사들을 징발해 보내지 않는 것과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등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수군은 여러 이유로 결원이 많이 생긴 탓에 각 고을에서 군사들을 새로 뽑아 보충해야만 했는데, 이때 실무를 담당하던 아전들은 징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결탁해 산 사람을 죽었다고까지 하면서 군사를 징발해 보내라는 명령을어기곤 하였다.
그런 부정이 말 그대로 부정인 경우도 있었겠지만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도 있었을 것이다. 처벌하는 사람도 처벌받는 사람도 모두가 불쌍한 시절이었을 터. 아래는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발췌했다. 이 부분 읽고 참 슬펐다.
보리쌀 다섯 말을 받고 일가족 호적을 부재자로 기재한 아전을 함평 산골에서 붙잡았다. 형틀에 묶고 곤장 마흔 대를 치게 했다. 늙고 병든 아전이었다. 그 아전은 아마 스무 대쯤에서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진 것을 모른 형리가 나머지 스무 대를 계속 쳤다. 그의 몸은 으스러져서 죽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밤 나는 동헌 객사에 묵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아전의 몸을 으깨던 매와, 보리쌀로 죽을 끓여 먹었을 그의 식솔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김훈, 칼의 노래, P 34)
1593년 7월 13일 순천 거북선에서 노를 젓는 경상도 출신 노비 태수가 도망치다 붙잡혀 와 처형하였다.
불쌍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헐벗은 상태에서 노를 젓는 작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잡히면 최소 죽음임을 알면서도 달아나고자 했던 노비 태수의 명복을 빕니다.
저물녘 홍양 현감이 들어와 두치에 퍼진 헛소문을 전했다. 장흥 부사 유희선이 겁을 먹어 얼토당토 않은 일을 벌인 것이라고 하였다. 또 흥양 산성의 창고에 있던 곡식은 남김없이 나눠 주었다고 했다. 행주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친 일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1593년 2월 12일에 권율이 서울 북쪽의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 일을 말한다.)
97 이순신의 휘하에서도 수많은 군사들이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도망치다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알면서도 수군들이 계속 탈출하려 했던 까닭은, 전쟁이 두렵고 수군으로 복무하는 일이 너무나 고되고 위험했기 때문일 터다. 수군은 한 번 편입되면 대대손손 수군으로 복무해야 했기 때문에 천한 역으로 여겨진 데다, 육군에 비해 복무기간이 두배나 길고 배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등 복무 여건도 상당히 열악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군대의 안정을 위해 도망친 군사는 처형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전쟁 기간 내내 이 원칙을 엄격히 지켰다.
1593/5/30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한 때에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그 심사가 형편 없고도 형편 없다. 그런데 기효근의 대장인 수사 원균 또한 똑 같은 짓을 하니 어쩌겠는가.
99 기효근(1542-1597)은 1590년부터 남해 현령으로 재직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의 부하로서 여러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그 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왜적을 만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왜란이 끝난 뒤 전쟁을 다스린 공이 있는 신하로 표창을 받았다. 그런데 1592년 5월 2일 일기를 보면 “남해 현령은 왜적이 침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을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하였고, 전쟁 중에 어린 여자를 배에 태우고 다녀 이순신의 비난을 샀다. 전투에서 세운 공과는 별개로,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나라가 위급한 때에 어떻게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순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일기다.
101 이일(1538-1601)은 왜적이 침입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마자 순변사로 임명되었을 만큼 조정의 신임을 받는 백전노장이었다. 그러나 이순신과는 다소 껄끄러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587년에 이일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이순신은 함경북도 조산보 만호를 맡고 있었다. 당시 여진족이 이순신의 관할 지역을 기습해 조선군이 패배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부하인 이순신에게 떠넘기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이순신은 이일의 처사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104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또 한 번의 해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무리한 출전을 감행했던 조선 수군은 상대의 계략에 휘말려 처음으로 일본 수군에 참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통제사 원균은 물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이 전사했다. 그렇지만 경상 우수사 배설(1551-1599)은 자기 휘하의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배설이 지금의 전력으로는 일본 수군에게 반드시 질 것이며 칠천량은 바다가 얕고 좁아 배를 움직이기에 좋지 않으니 진영을 옮겨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원균이 이를 묵살했다”고 씌어 있다. 아무리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달아났다고 한들 배설이 장수로서 전투를 피해 도망친 죄를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자신을 문책할 것이 두려워 병을 핑계 대고 또 한번 달아났던 배설은 결국 1599년 권율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도망을 잘 치는구나. 그래도 배 13척을 이끌고 도망을 쳤기에 이순신의 밑천을 만들어 주었다. 향후 행보는 안타깝고 없어 보인다.
107 김억추는 임진왜란 중에 여러 번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왜적과 맞서 보지도 않고 미리 달아나 버린 장수이자, 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 지방수령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이좌의정의 비호 아래 전라우도 수군을 이끄는 수사로 임명되었으니, 이순신의 분개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모두에게 참혹한 전쟁
1594/2/12 유지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10만 명과 은 300만 냥이 올 것이다”라 적혀 있었고
113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침공한 왜적은 25일에는 경상도 상주를, 28일에는 충청도 충주를 점령하여 무서운 기세로 북진했다. 이에 왕실 종친과 신하들은 선조에게 평양으로 피란할 것을 간청했다. 4월 30일 밤 선조는 궁궐을 떠났고, 사흘 뒤 서울은 왜적에게 함락되었다. 임진강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선조는 평양에도 머물 수 없어 의주에 임시 행궁을 설치했다. 그리고 다음 해 10월에야 조선의 임금은 서울로 돌아왔다.
<칼의 노래>에서는 ‘가토의 부대는 한나절 만에 부산성을 깨트리고, 꽃놀이 가는 봄나들이 차림으로 가마 대열을 꾸며 북으로 올라갔다. 붙잡힌 조선 백성들이 그 가마를 메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사실인지 허구인지 모른다. 다만 그러한 북진 역시 참으로 무섭다. 선조는 그래서 ‘가토’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다.
이순신은 임금께서 피란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통곡했다고 하는데, 1592년 5월 10일 이순신이 임금께 올린 보고서에 그 정황이 보인다. “어가가 관서 지방으로 옮겨 갔다는 소식을 처음 알고, 놀라고 원통한 마음 끝이 없어 종일토록 서로 붙들고 오장이 다 타고 찢어진 듯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왔습니다.”
1594/1/19 소비포 권관에게 들으니 영남에 속한 여러 배의 활 쏘는 군사와 노 젓는 선원들이 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마음이 아파 차마 듣고 있기 어려웠다. 수사 원균과 공연수, 그리고 이극함은 눈길을 주었던 여자들과 전부 사통하였다고 한다.
115 주3) 유정(1544-1610).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려로, 호는 사명당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승군을모집해 참전했으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4년 가토 기요마사(1562-1611)의 진영을 찾아가 몇 차례 강화 협상을 벌인 바 있다.
117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형도(1567-1637)는 1595년 5월경 비변사 낭청으로서 영남 수군의 상황을 살피고, 수군이 처한 상황이 열악하다는 뜻에서 ‘수군은 군사 한 사람에게 매일 식량 다섯홉과 물 일곱 홉을 준다’는 보고를 올렸다. 조형도의 보고가 있은 뒤, 비변사에서 임금께 수군을 구휼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사들의 굶주림과 헐벗음의 실상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였다. 이순신은 군사들이 전염병으로 수도 없이 사망하고, 남은 군졸들도 하루에 고작 두세 홉의 양식을 먹을 뿐이라 배고픔과 고달픔이 극에 달해 노를 저을 수도 활을 당길 수도 없는 지경이며, 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는 추위도 더욱 혹심하여 군사들이 모두 귀신 모양으로 변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게다가 명나라 구원병이 도착한 후 조선의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조선군의 굶주림은 더욱 심해졌다.
119 주3) 촉석루: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남강 가에 있는 누각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는 진주성 방어의 지휘 본부로 쓰였다. 1593년 6월 29일 왜적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진주 백성 6만여 명을 학살한 일이 있다.
120 이순신은 왜적과의 전투가 끝나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릴 때면 언제나 사상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그 유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사망자의 시체를 고향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하고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애썼다. 그는 부하들의 죽음을 가슴으로 애통해하는 상관이었다. 일기에 언급된 어영담은 돌림병에 걸려 진영 안에서 사망했는데, 이순신이 유달리 신뢰하여 모든 일을 의논하는 부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순신의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이순신은 참 세심한 사람이구나. 어영담은 바닷가에서 자라나 배에 익숙하고 영호남의 여러 물길을 파악하여,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의 물길을 안내했다고 한다(출처: 김훈, 칼의 노래, 인물지). 물길과 섬들의 형세를 파악하여 이순신이 전략을 짜는데 도움을 많이 줬을 터인데 그를 전염병으로잃었으니…
1593/5/16 어째서 요즈음 세상일은 이다지도 참혹한가. 장례는 누가 주관할는지. 대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12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조선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일본군이 엄청난 수의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순신의 숙모처럼 피란길에 사망한 사람이나 왜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 돌림병에 걸려 죽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전쟁이 일상이었던 시대.
122 159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이순신 진영에는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4개월 동안 진영 안에서 돌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무려 1800여 명에 이르렀다. 군사든 백성이든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린 상태였기 때문에 돌림병에 감염되면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이순신은 약을 마련하여 이들을 구호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조정에 치료할 의원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믿고 부리던 금산이와 그 처자가 돌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니 그 충격이 더욱 컸을듯하다.
1594/1/14 의능을 천민신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공문도 함께 봉해 올렸다.
의능이라는 사람과는 어떤 관계였을까. 어떤 사연으로 천민신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공문을 올렸을까. 처벌도 엄격했지만 사람 됨됨이와 능력을 보고 그에 맞는 보상도 잘 해줬던 거 같다. 이순신은 정말 깔 게 없는 균형감각을 갖춘 리더이다.
124 왜적이 침입해 온 뒤 조선 백성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데다, 곡식이 있다면 명나라 군사들에게 우선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배고픔에 지친 조선 백성 가운데 일부는 실제 사람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형제나 자식을 죽여 그 고기를 먹은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명나라 군사가 술을 마신 뒤 토한 찌꺼기를 핥아 먹기 위해 굶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었다는 기록까지 전한다. 몇몇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결국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 전쟁의 참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생략하련다. 이러한 시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를 지키려고 했던 이순신이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위인, 영웅은 그렇게 또 다른 인종이라 하겠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1594/1/1 어머니를 모시고 한 살을 더 먹었다. 이는 난리 가운데 다행한 일이다.
짧은 표현이지만 뭉클하다. 해가 바뀌면 한 살이야 더 먹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먹었으니 난리 중에 다행이라.
1595/1/1 촛불을 환히 켜고 홀로 앉아 있다가 생각이 나랏일에 미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렀다.또 여든의 병드신 어머니가 떠올라 애를 태우며 밤을 지새웠다.
무인이 눈물이 흐를 정도였으니. 어머님 생각에 애도 태우고. 읽으면 읽을수록 충효의 화신 이순신에게 감동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인물을 갖고 있었구나. 왜적으로부터 이렇게 지켜낸 나라인데 구한말에 그게 어인 일이래.
134 주)사과: 조선시대의 정 6품 무관직이다. 직무는 없으며 봉록을 주기 위해 임명하던 관직이다.꽃보직이구나.
1592/2/1 그러고는 전선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우후와 함께 새봄의 경치를 감상하였다.
1592/2/12 군관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은 시를 읊었다. 저녁이 되어 돌아왔다.
시를 읊는다니. 멋지다.
1592/2/19 흥양 현감은 내일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먼저 나섰다.
1593/3/3 오늘은 바로 봄놀이를 하는 날인데, 모질고 고약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명나라 군대가 서울에 들어왔는지 소식을 못 듣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을 말로 다할 수 없다.
1595/8/15 오늘 밤 달빛이 희미하게 수루를 비춘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들지 못하고 긴긴 밤 시를 읊조렸다.
잠들지 못해 양을 세는 게 아니라 시를 읊조린다. 나도 읊조릴 시를 외워야겠다. 필사에 이어 암송의 중요성, 필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최근이다.
1596/5/5 밤늦도록 군사들을 뛰놀게 한 것은 내가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애쓰고 있는 군사들의 노고를 풀어 주려는 생각에서 그리한 것이다.
참 대단한 분이다. 존경이 절로 든다. 다만 이순신은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낙이 틈 탈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서도 인생에서 즐거움보다는 진지함으로만 가득 찼던 거 같아서 안타깝다. 그래서인지 첩이 있었다는 게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여 좋더라(역시 의견은 분분하긴 하지만).
1597/9/9 오늘은 바로 9월 9일이니 1년 중의 좋은 명절이다. 나는 비록 어머니 상을 당해 상복을입었지만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먹이지 않을 수 없는 터라, 제주에서 내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 만호와 안골포 만호에게 주어 먹이도록 하였다.
140 음력 3월 3일은 삼짇날 또는 답청절이라고 하는데, 들에 나가 봄풀을 밟고 꽃놀이를 즐기는 날이다. 음력 9월 9일은 중양절이라고 하며, 이날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있다. 단오든 추석이든 동지든 이순시는 명절을 즐기기보다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을 먹이고 그들의 노고를 풀어 주며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먼저인 지휘관이자 어른이었다.
1596/7/13 저녁에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가 된 사람으로서 가만이 앉아 보고 있을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한 왜인들이 간절히 마당놀이를 하고 싶다 하기에 금하지 않았다.
으아 진짜 대단하다. 심지어 항복한 왜인들까지. 이순신이 지금 시대에 태어나 어떤 기업을 운영했다면 어땠을까. 난 당장 입사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그 상황에서 ‘마당놀이가 간절하므니다’라고 했을 왜인들도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1593/5/13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는데, 바다 달빛이 배를 가득 채웠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두드려 홀로 앉아 뒤척대다 닭이 울고서야 잠깐 잠이 들었다.
1593/7/15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심사 어수선하네
홀로 뜸 아래 앉으니/ 마음 너무나 답답하구나
달빛 뱃전에 드니/ 정신 맑아지누나
누워도 잠 못 이루니/ 닭이 벌써 울었네
1595/7/9 오늘은 말복이다. 가을이 되어 날씨가 서늘해지니 마음속에 생각이 많아진다.
갑자기 기상씨 생각나네. 여러모로 이순신과 기상씨가 비슷한 것도 같다. 문무를 겸한 원칙주의자.
145 이순신은 자주 불면에 시달렸다. 나라를 구할 책임을 짊어진 장수로서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밤 번민에 휩싸여 뒤척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순신은 잠 못 이루는 밤에 종종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일실되고 한산도가 한 편이 현재 전한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閑山島月明夜 上戍樓撫大刀 한산도월명야 상수루무대도
深愁時何處 一聲美笛更漆愁 심수시하처 일성미적경칠수
1593/7/29 새벽에 남자아이를 얻는 꿈을 꾸었다. 포로로 잡혀간 아이를 되찾을 징조다.
1594/9/20 홀로 앉아 밤에 꾸었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있던 외딴섬이 달려와 내 눈앞에 멈춰 서는데, 그 소리가 천둥이 치는 듯하여 사방이 놀라 달아나는 꿈이었다. 그러나 나만은그 자리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매우 기뻐했으니, 이는 왜놈들이 조선에 화친을 빌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에 올라 천천히 가는 꿈도 꾸었는데, 임금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명을 받고 올라갈 조짐이다.
꿈보다 해몽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순신에게 있어 꿈과 괘는 불확실한 앞날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 거 같다.
체찰사가 공문을 보내 ‘수군은 군량을 받아 계속 군사들을 먹이라’하고, ‘가둬 두었던 친족과 이웃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1595/2/9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용은 벽 틈으로 들어가 그대로 그림 속의 용이 되었다. 한참을 어루만지며 감상했는데, 용의 빛깔이 변하고 형상이 움직였으니 기이하다고 할만했다. 유달리 상서로운 점이 많아 적어 둔다.
150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밤이 많아서였을까. 이순신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꿈속에서도 나라 걱정을 하고, 더욱이 꿈에 보인 일들을 나라의앞날과 연관 지어 좋은 징조로 해석하려고 한다. 나라에 닥친 어려움이 어서 해결되기를 바라는 그 간절함이 여기서도 보인다.
1594/3/7 하인더러 패문에 대한 답서를 쓰게 하였는데, 모양새가 격에 맞지 않았다. 수사 원균이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게 했지만, 그 또한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아픈 와중에도 일어나 앉아서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글을 쓰게 하여 보냈다.
1596/4/19 습열이 나서 침을 스무 군데 남짓 맞았더니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올랐다. / 오늘 아침 남녀문에게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뻐 마지 않은 일이나 곧이 믿을 수는 없었다. 이 소문이 진작 퍼졌지만 아직 확실한 기별이 오지 않은 때문이다.
한방용어가 일상으로 쓰이던 때였구나.
1597/8/21 찬 기운을 쐬어서 그런가 하여 소주를 마시고 몸조리를 했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죽을 뻔하였다.
감기 걸리면 소주 마시라는 게 이 때도 그랬어? 어느 정도 잡수셨길래 인사불성이 되었습니까.
154 주5)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6?-1598. 일본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여러 세력이 다툼을 벌이던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인물이다. 명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야심으로 무수한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졌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인물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선과 악을 대표하는 인물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반복하며 등장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더러 뭘 배우라는 신의 뜻일까.
155 난중일기에는 몸이 좋지 않았다는 일기가 여러 편 실려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순신은육체적으로도 상당한 고통을 겪었던 듯하다. 50세 즈음의 나이에 7년 동안 배 위에서 생활하며 수도 없이 해전을 치러야 했으니, 그 얼마나 고된 날들이었을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점괘에 위안을 얻고
1594/7/13 비가 주룩주룩 내림/ 비가 계속 올지 날씨가 갤지 점을 쳐 보았는데, ‘뱀이 독을 토해 내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텐데 농사일이 걱정이다. 밤에도 비가 퍼붓듯 쏟아졌다.
1594/9/28 흐림/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서 적을 잘 물리칠 수 있을지를 점쳐 보았다. 첫 번째 점에서는 ‘활이 화살을 얻는 것 같다’는 괘를, 두 번째 점에서는 ‘산이 꼼짝 않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157 이순신이 쳤던 척자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나와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치는 점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척자점이 어떻게 치는 점인가보다는, 이순신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점을 치고 또 그 점의 결과에 기대어 잠시나마 위안을 얻으려 했다는데에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순신도 우리처럼 앞날에 대한 불안이 있었음을 헤아려 보자는 생각에서다.
척자점은 윳점이라고 하던데, 아닌가? 워낙 점괘에 대해서는 미신적인 거라 여겨 관심이 없었다가 최근에 주역, 괘 등의 어휘에 끌리면서 마음을 열고 알아보고 있다. 괘를 얻는 ‘득괘’의 과정은 정말 과학적이지 않다. 윳을 던진다거나 쌀을 고른다거나 등. 하지만 그렇게 얻은 괘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상징’의 힘이 발휘될 여지가 있더라.
멀리서 그리는 가족
1594/11/15 봄날처럼 따듯하니 음과 양이 질서를 잃었다.
11월에 따듯하다고 하니 음과 양이 질서를 잃은 거 맞네. 그 때도 이상기온이.
162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1583년 11월 15일 별세하였다. 당시 함경도 건원보 군관으로 나가 있던 이순신은 다음해 1월에야 부친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곧장 아산으로 달려가 삼년상을 치렀지만, 이순신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기일이나 생신이 되면 더욱 애통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1593/6/12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여남은 올 뽑았다. 머리 세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그리하였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 흰머리 보면 걱정할까봐 그런건가? 정말 세심한 사람이다.
1595/5/4 아들이 보낸 편지를 보니 요동 사람 왕작덕이 왕씨의 후예로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고한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1595/5/16 그렇지만 아내는 집에 불이 난 뒤로 마음과 몸이 상해서 가래가 끓고 숨이 차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하니 염려가 된다.
이순신 아내의 삶이 불쌍하더라. 당시에는 다 그러려니 살았다고는 하나. 시어머니 모셔, 조카들 거둬, 남편은 멀리 배 위에 있지. 아들 잃어.
1595/5/21 그렇지만 잠시라도 어머니 안부를 알지 못하면 걱정이 그치지 않아 종 옥이와 무재를 본영으로 보내고, 전복, 밴댕이젓, 어란을 어머니께 보냈다.
1595년이면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고 어머니는 여수에 계실 때인가? 5월에 전복 보낼라믄 상하지 않게 잘 하셨나? 아들이 보내온 전복, 밴댕이젓, 어란을 보며 행여 입맛이 없어도 잘 드시려고 했을 거 같다.
1595/6/12 그래도 아흔의 연세에 이렇게 위중한 병을 얻으셨다니 염려가 되고 눈물이 난다.
165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는 현감을 지낸 변수림의 따님으로 아들 넷을 낳아 길렀다. 이순신은 휘하의 군사나 집안의 노비, 아들과 조카를 통해 수시로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하였다. 아버지께서먼저 돌아가시고 형님들마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늘 어머니를 걱정하고또 그리워하였던 것 같다.
1594/1/11 어머니 앞에서 아들이 왔다고 인사를 올리자 어머니께선 숨이 곧 끊어질 듯 하셨지만 말씀에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물리치는 일이 다급하므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594/1/12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잘 가라고 하시며 나라의치욕을 크게 씻어 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당부하실 뿐, 이별의 슬픔 때문에 한숨지으시는 모습은 조금도 없으셨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몸조심해라, 그런 당부의 말이 아니라 치욕을 씻으라는 당부라니. 이런 어머니가 계시니 효자임에도 이순신이 적진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사실 저자연구를 변씨와 조마리아 여사의 인터뷰로 진행하고픈 구상도 했더랬다.
1596/윤8/12 하루 종일 노 젓기를 재촉해 밤 열 시쯤 어머니 앞에 도착하였다. 백발에 갸냘프신 어머니께서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셨다. 어머니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부둥켰다. 밤새 어머니 마음을 달래 드렸다.
악셀 열심히 밟아서 갔구나. 300리를 간 것인가? 백발의 노모와 중년의 아들이 부둥켜 안은 장면을 상상해보자.
1596/10/3 종일토록 어머니를 모셨으니 다행하고 다행한 일이다.
167 본가가 있는 아산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 좌수영에 머무는 날이 길어지자, 이순신은 1593년 어머니를 수영 부근의 고음천(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 일대)으로 모셔 온다. 그러나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 뒤에는 가까이 계신 어머니도 1년에 고작 한두 번 찾아뵐 수 없었던 듯 하다. 그런데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는 아들과 헤어질 때 이별의 서운함은 감추고 나라의 치욕을 씻으라는 당부만을 거듭하였다고 하니, 훌륭한 아들 뒤에는 그보다 훌륭한 어머니가 계심을 실감하게 된다.
1594/8/30 오늘 아침 정찰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위중하다고 한다. 생사가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한 지경이라 다른 일은 미처 생각할 수 없지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른지. 마음이 아프고 아프다.
1594/6/15 그리고 한글 편지에 아들 면이가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는다는 소식이 있었다. 애가 탄다.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아들이 면이라고 하던데.
1596/7/21 오늘 회가 방자 수에게 곤장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회를 뜰아래 데려다놓고 타일렀다.
174 이순신과 부인 방씨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회, 둘째는 울(나중에 열로 이름을 바꿈), 셋째는 면이다. 또한 이순신은 형님들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조카 여섯을 거두어 길렀다.이순신의 아들과 조카들은 이순신이 머무는 한산도 진영과 여수의 수영 및 아산 본가 등을 오가며 이순신을 도와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고 집안일을 돌보기도 하였다.
흔히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면서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심정이라고 이야기한다. 늘상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아들과 조카를 보며 이순신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선연한 일기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 분석)
개인의 일기는 날짜별로, 역사는 시대순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 사마천의 ‘사기’였다. 사기는 편년체가 아닌 기전체로 되어 있다. 돌베개의 난중일기 역시 쓰여진 순서가 아닌 주제별로 일기를 묶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일관된 주제가 이순신의 내면에서 시간을 두고 일관되게 새겨지는 것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페이스북의 ‘일년 전 오늘’과 같은 기능이 구현된 느낌이었다.
2 보완이 필요한 점(독자의 눈으로 – 이런 내용은 아쉬웠다. 이런 부분은 이해가 안됐다)
조선수군의 관직체계와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 이순신 연보 등이 소개된 것은 좋았으나 조선중기의 정치적 배경도 설명되었으면 하는 좋았겠다. 조선중기를 휩쓴 4대사화의 배경이 실렸으면 좋았을 듯 하다.
3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위대한 사람의 일상과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의 일상과 역사적 장면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일연도 그러했고 이순신도 그러했듯이 충과 효의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내면이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1) 조선중기의 정치적 배경을 정리하겠다.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의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소개하겠다.
3) 류성룡의 ‘징비록’, 조카 이분의 ‘행록’ 등에 보여진 이순신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당시 이순신을 직접 겪은 이들의 기록과 함께 그의 일기를 본다면 한 인물을 이해하는데 보완이 될 것이다
4) 난중일기 등장인물을 소개하겠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보면 난중일기에 실린 인물들을 따로 모아 정리한 ‘인물지(人物誌)’가 있다. 그러한 등장인물 소개가 실린다면 충무공의 일기를 읽을 때 더욱 생동감이 살아날 것 같다. 일부를 소개한다.
- 강막지: 강막지는 수영에서 일하던 종으로 소금을 구워서 수군에 바치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슬픔이 북받쳐서 울고 싶을 때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막지의 집으로 가서 울었다.
- 김개, 금이, 금수, 경, 애수, 한경, 해돌: 이들은 모두 이순신의 아산 집에 딸린 종들이다. 이순신의 수영을 심부름으로 오가며 집안 소식을 전했다.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에게 하루 쉬어 갈 거처를 마련해주기도 했고, 이순신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기도 했다.
- 부안 사람, 최귀지, 여진: 이순신의 여자들이다. 부안 사람은 이순신의 첩이다. 고향이 부안일 뿐, 그 외에는 알 수 없다. 최귀지는 광주 목사 최철견의 서출인 딸이다. 여진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순신에게 와서 자고 갔다. <난중일기>는 이 여인들이 와서 자고 간 일까지 기록해놓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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