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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10시 12분 등록
I.저자에 대해

이순신 :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李琚)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는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 그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그는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그는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 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 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때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때,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訊問)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그를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道·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정인보(鄭寅普)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서 “공(公)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여수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간행사

우리 고전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 예술과 사상을 두루 망라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포괄적이며 문제적이다.
- 고전이란 그 시대의 시대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고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전은 그 시대의 시대적 사상을 배워 내가 그 길을 통과해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고전을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 머리에

이순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그의 동상이 그러하듯 거푸집 안에서 딱딱하게 굳은 채 변치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저자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부정적이라는 것인지, 긍정적이라는 것인지.

어느 조선장수의 일과와 행적이 기록된 사료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는 내밀한 일기장이기도 하다.(중략)
단아하고 진중한 성격의 이순신은 언제나 자기일에 성실했고 매사를 철저히 대비했다.

이 책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가운데 일부를 가려 뽑아 번역한 책이다
- 전체였으면 좋았었을 텐데...

P.24
전별했다
-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는 것을 말함

P.24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 부모는 자식의 평안으로 '다행'을 얻고 아들은 부모의 평안으로 '다행'을 얻는다. 문득, 김초혜시인 어머니가 생각난다.
한몽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P.26
전쟁 대비에 여러 가지로 결함이 많아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 수습이 아니라 장군께서는 정보와 정황으로 전쟁을 대비하고 계셨구나

P.28
이순신의 승리는 철저한 대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꼭 그런거 같지만은 않다. 준비도 있었던게 사실이지만, 전략도 중요했다. 준비하나라고 그것이 전체를 포함된다고 하기에는 쫌 과장이라 생각한다.

P.35~36
홀로 수룩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편을 생각해 보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 같다.

P.37
임금님의 귀를 속이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럿구나. 나랏일이 이러하니 왜적이 평정될리 만무하다. 천장만 올려다 볼 따름이다.
- 속인다고 속고 보여주는 걸 믿어 버리고, 말하는대로 듣는다면 그가 어찌 임금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역사의 되풀이 였을까. 병신년의 통치자들은 답이 없는 사람들 이었나...

P.38
가소롭다. 조정의 계책이 이러하다니. 체찰사가 내놓은 대책이 이와 같으니 나라를 구할 수 있겠는가. 나랏일이 이 모양인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 솔직하게 쓰셨다. 욕도 나왔으면 더 시원했었을 텐데...일기는 솔직히 철저히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받은 교육에서는 검열의 글쓰기로 일기를 썼던 거 같다. 그래서 지겨웠고...

P.42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면 좋단 말인가

P.45
사내종 금이를 본영에 보냈는데, 바람이 몹시 사나워 걱정이 되었다.
- 장군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P.52
달아나 버렸습니다.(중략)
남은 것이 없습니다.(중략)
기가 막힐 뿐이었다
- 지금이라면? 남아서 싸운다고 할 수 있을까? 더 기막힌 일들이 일어날 수도

P.60
분통함에 쓸개가 찢어지는 듯 하였다.

P.61
바람과 물결이 모두 반대로 일어 다시 들어올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머물며 밤을 보내고 ...
- '돌아 올 수 없었던 그곳에서 장군은 무슨 생각에 잠기셨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래 구절을 보니 '들었다'라는 구절이 나왔다. 리더란 듣는 사람이다. 들음이 소리를 듣는게 아니라, 마음과 감정을 쏟아 듣는 사람이다.

P.67
항복한 왜인들을 전부 모아 화포쏘는 연습을 하게 하였다
- 우리 백성이 잡혀가 왜인의 군대가 된것 처럼, 항복한 왜인들이 우리군으로 편입되었을까? 국가간의 경계가 적이었던것이지, 백성은 힘에 의해 끌려다니는 존재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P.67
망기시로는 조금도 꺼리지 꺼리는 기색없이 죽으로 나왔다. 지독한 놈이라 할 것이다.
- 그들의 적개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P.67
항복한 왜인들이 와서 자기들 무리중에 산소라는 자가 흉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베어 죽여야 한다고 했다
- 같은 편조차 싫어했던, 그 흉악한 일들이란 무엇이었을까?

P.70
오늘 밤은 바다에 달빛이 차갑게 비치고 티끌 하나 일지 않는다. 다시 땀이 흐른다.
- 긴장감이 착착함으로, 아픔으로 땀이 흐르셨을 것 같다.

P.71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군 가운데 일부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또는 상관의 혹독한 매질을 견디다 못해 조선 진영으로 와서 항복을 하였다. 조선이 항복한 왜인들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항복한 왜인들은 모여 있으면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이유로 조선 땅 여러곳에 나누어 두었으며,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나 검술에 능숙한 자는 조선군에 편입시켜 그 기술을 전수하게 하였다. 1594년 가을 무렵부터 항복한 왜인들의 상당수는 이순신이 다스리던 한산도로 보내져 노 젓는 선원이 되었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도 얼마간 도움이 되었다.
- 적속에는 왜인만이 아니라 우리 백성들도 들어있었다. 마음에는 적뿐만이 아니라, 연민도 있었으리라

P.72
관원을 어떻게 접대할지 상의하였다.
- 나으리들의 행차는 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P.76
꿈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임진년 왜적을 크게 이겼을 때 꾸었던 꿈과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 장군은 예지몽을 믿으셨던거 같다. 어쩌면 그것이 지푸라기 였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77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 生則死 死則生

P.78
나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적선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곧바로 침범해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마음과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적을 쏘아라!"
- 힘겨울 수록 부드럽게... 부드러울 수 있었던 그 침착함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일종의 믿음내지는 확신이 아니었을까?

P.80
오늘 일은 참으로 하늘이 주신 큰 행운이다

P.87
수영 아전들을 잡아 와 나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왜적이 일으킨 변고를 재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때렸다

P.89
새벽 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벌써 이레째라 속을 태우고 마음을 졸였다. 게다가 조카 해가 잘 갔는지도 알지 못했다.
-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계셨다. 그 뿌리의 근원이신.

P.89
곤장 일흔 대를 쳤다.
- 그걸 맞고 살 수 있을까?

P.91
한갓 제 몸 살찌우는 일이나 하고 이처럼 맡은 일을 돌아보지 않으니 다른 일도 알 만하다.
- 지금의 시대와 별 다르지 않다.

P.92
여인들에게 떡과 같은 먹을 거리를 이고 가게 한 일이 있어 벌을 주었다.
- 빌미를 제공한건데 곤장을 쳐야지요

P.92
수영 아전들ㄹ이 백성의 것을 빼앗아 가지는 폐해가 있다고 이야기 했다.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어서
- 세금으로 만든 칼과 창으로 백성을 위협하는건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다

P.100
나를 해치려 힘을 쏟다니 우습고 우습다. 이일은 서울에 있던 첩까지 관아에 데리고 왔다 한다. 더욱 놀랄일이다.
- 최대한 같은 민족을 괴롭히고 이용해 먹고나서 앞잡이가 되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겠지

P.104
경상 우수사 배설은 자기 휘하의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 이런 아이러니. 배설은 죽어 마땅하지만 배설이 살아서 12척이라도 남았다.

P.112
원균이 남을 헐뜯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 시기심과 질투가 온몸을 감았구나

P.116
마음에 이는 생각들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P.118
죽임을 당한 장수와 군사들의 명단을 보내왔는데 보고 있자니 아프고 또 참담한 마음을 가눌길이 없었다

P.120
이순신은 왜적과의 전투가 끝나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릴 때면 언제나 사상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그 유가족에게 은혜를 배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P.124
곡식이 있다면 명나라 군사들에게 우선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배고픔에 지친 조선 백성 가운데 일부는 실제 사람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 얼마나 원통하고 참혹한 일이었을까.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P.126
밖에서 온 적도 섬멸하지 못했는데 나라 안의 적이 이와 같으니 너무나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 내부의 적이 더 얄밉다

P.127
왜적에게 붙었던 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해 주었다
- 죽여야지

P.129
이순신은 부하들은 물론 주변의 백성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썻다. 전쟁으로 인해 갖은 고생을 겪고 있는 백성을 위해 이 일기에서 처럼 부역을 줄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전리품으로 얻은 쌀과 옷감을 피란민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갈 곳 없는 백성들을 거두어 수영에 속한 둔전에서 농사를 짓게 해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P.133
오후 늦게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쟁에 대비할 일로 수영에 돌아왔다.
비가 그칠 줄 모른다
- 정보의 획득이 결국대비를 할 수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늘의 비는 마음에도 내렸을 것이다.

P.135
비온 뒤라 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 봄날 비온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광경이 생각난다. 그때의 생명력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도 없는데

P.139
오늘 새벽 억울하게 죽은 넋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 죽은 자를 위로함으로 산자를 위로한다

P.143
하루종일 텅빈 정자에 홀라 앉아 있노라니 수백가지 생각이 마음을 뒤흔든다. 괴롭고도 심란한 이 마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흐리멍텅하여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 같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람같기도 했다.

P.151
아침에 비로소 통증이 잠시 멎었다
- 총상만이 있었을까. 온몸이 성한데가 없으셨겠지. 몸의 일부처럼 가지고 사셨겠지. 마음이 무겁다

P.164
새벽꿈이 봅시 어수선했다
- 꿈에 의지하고 계셨는데, 어수선한 꿈을 꾸셨으면 얼마나 심란하셨을까...

P.172
봄 날씨가 사람을 괴롭혀 몸이 몹시 노곤하다
- 날씨와 근심이 뒤섞였구나

P.173
밤 열시쯤 땀이 몹시 흘렀다
- 총탄으로 인한 상처를 계속 달고 사신게지

P.184
술기운이 올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 억울함도 분노도 함께 였을 것이다. 임금은 민심이 두려웠을 것이고 사람들이 자신보다 이순신장군을 위하는 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통찰했던 장군께서 왜 모르셨겠는가. 술기운을 빌어 올리다보니 모든게 올라와 땀에 젖으셨던 게 아닐까

P.185
자려고 누웠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 질 수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까

P.186
마을 사람들 여럿이 술명을 들고 찾아와 먼길
- 마음으로 먼길, 어저면 다시 못올 수 있는 그길, 못 만날 수 있는 그길

P.188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하늘의 해조차 캄캄했다. 곧장 게바위로 달려가 보니 배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슬픔으로 찢어진 이 마음, 글로 다 적을 수 없다
- 밑줄을 긋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 마음이 내게도 들어오는 듯 했다. 캄캄했다

P.190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서럽게 울밖에. 오늘을 어찌 견딜지, 닭 울 때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퍼부었다.
- 슬픔을 견딜 시간도 없이, 역할로 쓰인다는게 얼마나 힘든 여정이셨을지...

P.191
새벽부터 해 저물 때까지 어머니가 그리워 슬피우니 눈물이 엉겨 핏방울이 되었다.

P.193
수사 원균이 왔다. 그의 사람됨은 음흉하고 간악해 형편없기 짝이 없다.(중략)
수사 윤균이 거짓 공문으 ㄹ보내 군사들을 동요 시켰다. 군대 안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다니, 그 사람됨이 음흉하고 분별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이름을 들어 정말 많이 고민한 대상이 원균이셨던 모양이다. 차라리 잘라 버리시지, 타이밍을 놓치셨던 이유일까, 명분을 못찾으신 것일까? 아니다. 둘다 일거란 생각이 든다. 적은 내부에 깊숙이 있었다

P.195
농민들의 기대에 크게 흡족할 만큼 비가 내림
- 날씨에서 조차 농민의 마음을 보셨던 게다

P.195
그 마음씀과 일처리가 대개 이런식이다
- 화를 넘어 이제는 어이가 없으셨던 모양이다

P.196
원균이 온갖 술수로 나를 모함하는 것, 이 또한 내 운명이다. 서울로 끝도 없이 짐을 실어 보내고 구실을 만들어 나를 헐뜯기가 날로 심해진다. 좋은 세상 만나지 못한 이 신세를 나 혼자서 한으로 여길 뿐이다.
- 형편없는 자가 어찌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부패의 고리일까?

P.198
대장의 잘못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요. 그 살점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라고들 하였다.

P.199
홀로 앉아서 집을 지키고 있자니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이 비통할 따름이었다

P.200
저녁에 구례현에 도착했는데 온 고을이 적막하였다.
- '버려진 섬들마다 꽃이 피었다' 그 구절이 생각난다. 아무일도 없는 적막함

P.202
기을 떠나 10리쯤가자 노인들이 길가에 줄이저서서 다투어 마실 것을 바쳤다. 받지 않으면 통곡하면서 억지로 권하였다.
- 이구절도 참 마음이 아픈 구절이다. 희망이 되어달라는, 살려달라는 말없는 외침이지 않았을까

P.203
조선이 믿는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모양이라면 다시 희망을 걸 곳이 없다.
- 철학과 자기 도덕성 자체가 다 무너진 그때

P.209
이순신은 왜 일기를 썻을까? '전쟁'이라는 너무도 비일상적인 상황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의지가 이순신을 일기 쓰기로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장을 돌아다니시면서 괴롭고 외로운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으셨기에 일기를 쓰시면서 정리하고 위안하셨으리라 생각한다.

P.211
한편 한 동네에 살면서 이순신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아 온 류성룡은 이순신을 1591년 전라 좌수사로 발탁한다
- 참 말이 안되는 대목이다. 류성룡이 뭘 지켜봐. 상황이 됬을 때 천거했던거지.

P.215
이순신이 늘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그가 언제나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는 데 있다.
- 이부분도 참 말이 안되는 대목이다. 질 수없는 싸움이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전략을 만들고 이기려는 게임을 한 것이지 나라를 생각한 마음으로 승리한건 아니다.

P.220
선조의 생각이었다.
- 과연 선조에게 생각이 있었을까.

P.223
「난중일기」의 완역본으로는 이은상 역 「이충무공전서」(성문각, 1989)ㅗ아 노승석 역, 「난중일기」(민음사,2010)등이 있다. 「난중일기」 전편을 만나고 싶은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란다
- 처음에 이책을 택했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III. 내가 저자라면

1.보완이 필요한 점
1)아쉬웠던 부분
  • 시대적 상황이나 정황을 설명하면서 각 앞장에 지도도 넣어주면서 순차적 흐름으로 책을 엮었으면 좋을 법했다.
  • 뒷편 해설은 주관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가 차라리 빼버리는게 나을 거 같다.
2)이해가 안된 부분
  • 왜 원균을 죽이지 않았던 것일까? 명분적 타이밍을 놓쳤던 것일까? 

2. 이 책의 장점
  • 친절한 주석과 해설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됬다. 

3.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묶음이었으면 어떠햇을까? 역사적 사실의 그곳이 지금은 어떠한 곳으로 변했는지, 책의 저자로써 어떠한 느낌이 들었는지 사진도 곁들이면서 다시 만들고 싶다.

IV. 기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나에게는 역사를 이해하는 지식내지는 지혜가 없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시험에 나올법한 숫자들과 내용들을 외웠고, 남들이 외우라고 하는 방식대로 외운게 전부였다. 내가 역사를 배운건 숫자와 외우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 ‘칼의 노래’는 전쟁의 참혹함과 배고픔, 아픔과 고통, 지켜내야 할 것들에 대한 고뇌와 두려움, 숭고한 희생이 곳곳에 배여 있는 내용들로 민족공동체로서의 안타까움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 내용들 이었다. 소설은 이순신 장군의 1인칭시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며 느끼셨을 법한 내용들로, 장군의 백의종군에서 전사하신 노량해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라고. 첫 구절이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 구슬픈 심정에 책을 내려 놓게 했고, 막막함이 가슴에 틀어 앉아 암담했던 그 시절의 힘겨움을 눈앞에 펼쳐지게 하는 듯 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몸서리가 쳐졌다. 장군의 힘겨운 전투에, 아들을 잃은 슬픔에, 감내하시며 싸워야 할 적들에 대해, 마치 지금의 내가 전장속에 있는 것처럼 느낌이 전해 졌다. 그만큼 김훈작가의 표현은 흡입력이 강했다.
책을 읽는 내내 장군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장군께서 충( )으로 바라보신, 어쩌면 지켜내고 싶으셨던 건, 측은지심(惻隱之心 )으로 바라보셨을, 백성에 있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다. 가여워 안타깝고, 보살피고 싶으셨던 백성을 향한 마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2권에서는 유독 ‘~을 먹였다’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띄었다. ‘보살핌과 함께살자’라는 외침이 곳곳에 스며 들어있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러책들 가운데 이 책을 선정한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숫자와 사실 외우기로 지나쳐버린 우리의 전쟁사 임진왜란을, 마음속 울분과 고통스런 인내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내신 숭고한 정신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조심스레 따라가 볼 수 있게 한 부분에 깊이 감사했다. 그리고 지금의 삶 안에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깊은 생각을 찬찬히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음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두번째로는 김훈작가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첫 문장부터가 마음을 깨고 들어왔었는데, 읽는 중간중간 실사와 같은 묘사로 내가 그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마음을 감고 있었다. 2권의 76페이의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봄에는 바다의 아침 안개가 일찍 삭았다. 물 위에 낮게 뜬 안개는 순하고 가벼웠다. 바람이 몰아가지 않아도, 멀리 비스듬히 다가오는 아침 햇살이 스미면 안개는 섬 사이를 띠처럼 흘러서 먼 바다로 몰려 갔다. 해가 수평선을 딛고 물 위로 올라서면, 해 뜨는 쪽으로 몰려간 안개의 띠들은 분홍빛 꼬리를 길게 끌면서 사라졌다. 걷히는 안개 너머로 먼 섬은 붉었고 가까운 섬은 푸르렀다.' 표현의 아름다움은 잔상이 되었고 마음을 오랫동안 붙잡았다. 가슴속에 오랫동안 해야 할 말들을 가득 담아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은 후, 왜 이 책의 제목을 ‘칼의 노래’라 했을까 생각했다. 어쩌면 ‘장군께서는 저편의 세상으로 가셨고, 남아있는 칼만이 그 때의 분노와 울분, 장군의 바램을 새기고 기억하고, 지금을 바라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청산되지 않은 역사앞에서 장군의 칼이 징징징 울어 대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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