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17년 10월 9일 10시 32분 등록

버려진 책마다 곰팡이가 피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첫 문장은 버려진 대상이 서점인 경우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연세대의 오늘의 책이 경영난으로 폐점했고, 2001년에는 고려대 장백서원, 2002년에는 종로서적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10년 후 2012년에는 서울대 광장서적이 부도를 맞았다. 종로서적과 함께 소위 SKY대학이 2000년대 들어 줄줄이 문을 닫은 것이다. ‘오늘의 책이 폐점되었을 당시에는 대학원생이었을 때라 그 때의 씁쓸한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학가의 서점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그나마 운영되는 대형서점은 지하에 그 터를 잡고 있음이 나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상하이에서 잠시 생활하던 시절, 지하가 아닌 땅 위에 우뚝 선 7층 건물 상해서성(上海書城, 이하 상하이슈청)은 내게 감탄과 부러움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서점도 아니고 책방도 아니고 무려 서성(書城)’, 책의 성이라니! 주말이면 그 곳에 들러 여러 책들을 뒤적이며 책의 성에 갇혀보는 호사를 누리곤 했다.

 

주말의 그 호사를 10여 년 만에 다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연휴를 맞아 가족과 함께 상해를 갔는데, 저녁에 가족들이 숙소에서 쉬는 동안 나는 상하이슈청을 갔다. 나만의 작은 출장이었던 셈이다. 상하이슈청은 여전히 7층 건물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책을 내겠다는 마음을 품고 둘러보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지금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책은 어떤 류일까. 책의 제목들만 눈으로 스캔해도 대략의 키워드들을 마음의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겠다 싶어 찬찬히 둘러봤다.

 

아돌프 아들러의 讨厌(미움 받을 용기), 닉 부이치치의 人生不(한계 없는 삶), 情不(한계를 껴안는 결혼) 등의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의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국번역서적이 언어만 바뀐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언젠가 외국의 한 마트에서 느낀 것은 글로벌 브랜드로 인해 전 세계 식탁 위에 올라오는 제품들이 비슷해지고 있겠다는 것이었다. 외국이라도 도시라면 어디서든 스타벅스와 맥도널드를 만날 수 있게 된 지도 오래 되었다. 책 역시 마찬가지로 성공, 행복 등에 접근하는 방식이 통일되고 있다. 정신과 마음의 시장이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책은 없을까. 지금의 중국인들은 어떤 일로 근심하고 어떤 말로 위안 받을까. 한국이라면 베스트셀러가 놓일 만한 1층 중앙으로 가봤더니 베스트셀러는커녕 시진핑의 7세 모습이 표지에 실린 시진핑 전기가 놓여 있다. 시진핑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요새 잘 팔리는 책들이 무엇인지 보니 写给单身的(싱글인 그대에게 쓰다)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女人为什么不高兴(여자는 왜 기쁘지 않을까) 등의 책과 더불어 반려동물 특히 고양이와 관련된 책들 또한 많았다.

 

우리 나라의 골드미스에 상응하는 말로 중국에는 剩女(잉녀, 중국어 발음으로는 셩뉘남겨진 여자’라는 뜻)라는 신조어가 있다. 삼고녀(三高女)라고도 하는데 삼고는 고학력, 고수입, 고연령을 말한다. 7년 전 기준으로 베이징에만 50만여 명의 셩뉘가 있었다고 하니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싱글 문제는 스트레스와 건강, 인격과 편견 등의 키워드를 낳는다. 이들을 위한 좋은 주제가 없을까.

 

그리고 자리를 옮겼다. ‘문학과 군사라는 섹션이 있어 신선했다. 문학과 군사가 함께 묶일 수 있다니. 들어가보니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군사소설까지 다양한 장르의 군 관련 서적이 있는데 그 중 군사소설 장르는 참신했다. 한국이야말로 인구의 반이 군대를 가는데 그 많은 한국남성들의 경험이 술자리에서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로만 흘러간다는 것이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듣기 싫은 대표적인 이야기로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적 소양과 군대에서의 경험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면 독특한 문체와 함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의 제목과 부제는 말이 없다. 하지만 눈으로 책 제목을 스캔하는 것만으로도 책들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나 좀 봐요, 집어봐요, 첫 페이지만이라도 읽어보라고요!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제목만 보는 중에 눈길이 멈추고 그렇게 책을 뒤적이다 마음이 반응하면 책을 사게 되는 법이니 내용을 알리는 제목을 잘 짓고, 저자를 매력적으로 소개하고, 목차의 소제목을 정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그러던 중 云上(雲上, 구름 위)이라는 제목에 눈이 갔다. 부제는 与母亲的99件小事(엄마와의 99가지 에피소드)라 되어 있는데 책을 집어 페이지를 넘겨 보니 99개의 토막글이 있었다. 시와 에세이 식 글쓰기에 강한 주변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와 어울리는 호흡과 내용이었다. 중국어로 쓰게 된다면 나에게도 적합한 글쓰기의 좋은 예가 될 것 같아서 이 책을 샀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의 추억 99가지를 추억하는 내용으로 현대판 사모곡(思母曲)이라 하겠다. 진부한 듯 하면서 신선한 소재였다.

 

그렇게 상하이슈청에 갇혀 책들의 아우성을 듣는 중에 올레~!도 아니고현래(現來)!’하고 외치는 책이 있었다. 보는 순간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이야기한다 싶어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된 미래’, ‘미래의 기억과 같은 시재가 없는단어를 구상하고 있던 최근이었다. 반가워서 집었더니 원래 제목 發現未來(발현미래)에서 다른 책에 가려 現來만 보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책 제목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이디어는 이렇게 낯섦에서 뜬금없이, 그리고 느닷없이 온다. 낯선 외국어로 쓰여진 책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목을 짓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인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국인으로서 중국인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지 책의 성에 갇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책의 성에 내 책 한 권도 놓여 있을 눈 앞의 미래를 상상하며 상하이에서의 나만의 출장은 이렇게 마쳤다. 제목 하나 마음에 담고서. ()

 

구름위.jpg 싱글.jpg 문학군사.jpg 군사.jpg 

현래.jpg  

IP *.18.187.152

프로필 이미지
2017.10.09 15:03:53 *.124.22.184

역시 '발상' 테마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요. 구체적으로 책 주제에 접근하고 있는거죠?

금방 둘째 난임을 극복하겠는데요. ㅎ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7.10.10 08:57:08 *.18.218.234

'금방'은 안될 거 같아요. 관심과 역량은 또 별개의 문제더라구요 ㅡㅜ  관심 분야를 열심히 읽어 일단 역량을 키워야 할 듯요. 그래서 1-2월에 개인집필주제랑 관련된 책을 읽는 시간이 있는가봐요.

프로필 이미지
2017.10.10 05:38:17 *.106.204.231

전세계를 겨냥한 누나의 책 기대되네요. 그나저나 저런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는 거죠. 중국어 실력이 상당하네요.

문학적 소양과 군대. 제가 원하는 것이긴 한데 아직 소양이 앚 갖춰줘서. ㅋ

프로필 이미지
2017.10.10 09:02:36 *.18.218.234

에휴 제목이야 다들 짐작할 수 있는 건데요 뭘. 내용이 눈에 들어와야 실력인데 저는 멀었수 ㅡㅜ 그나저나 저 섹션에서는 기상씨 생각나더라구요. 새로운 장르 개척해봐요. 밥벌이로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직장 때려쳐라 어째라 하면서도 무대는 회사인 책들이 무수히 많쟎아요. 군대 역시 마찬가지의 접근이 가능할 듯. 징병제 국가에서 군대 경험한 인구가 그렇게 많은데, 군대에서의 이야기가 책이 아닌 술자리 안주감으로만 휘발되는 건 아깝더라구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32 개발자의 오만함(Hubris) [7] 불씨 2018.04.29 1027
4831 #30 사장님 나빠요~ (경영자의 독선) [2] 불씨 2018.12.09 1027
4830 모든 나뭇조각은 진짜 [3] 불씨 2020.06.14 1027
4829 [칼럼1] 마흔에 채운 책에 대한 허기(정승훈) [5] 오늘 후회없이 2017.04.16 1028
4828 [칼럼 #7] 거위의 꿈(정승훈) file [11] 오늘 후회없이 2017.06.04 1028
4827 칼럼 #17 처음 불려간 선도위원회 (정승훈) [7] 정승훈 2017.09.02 1028
4826 칼럼 #20 골뱅이무침과 칭찬의 기술_윤정욱 [3] 윤정욱 2017.10.02 1028
4825 6월 오프모임 후기(김기상) [2] ggumdream 2017.06.20 1029
4824 또 다시 칼럼 #24 소년법을 폐지하면...(첫 번째) file 정승훈 2018.11.04 1029
4823 싸움의 기술 박혜홍 2018.11.26 1029
4822 혼자 하는 녹화 강의 여러 버전들 정승훈 2020.09.05 1029
4821 1주1글챌린지_아이와함께하는삶_03 [6] 굿민 2020.06.07 1030
4820 1주1글챌린지_아이와함께하는삶_05 [8] 굿민 2020.06.21 1030
4819 <칼럼 #4> 대한민국을 희망한다 - 장성한 [6] 뚱냥이 2017.05.08 1031
4818 5월 오프모임 후기_이수정 [5] 알로하 2017.05.23 1031
4817 #1 자기소개 - 희동이 [6] 희동이 2020.05.24 1031
4816 [칼럼#6] 꿈에서 걷어 올린 물고기 한 마리 (윤정욱) [5] 윤정욱 2017.05.29 1032
4815 #24. 폭력에 관한 고찰 [2] ggumdream 2017.11.06 1032
4814 또 다시 칼럼 #1 화해조정위원에게 듣는 피가해자 관계회복(정승훈) [11] 정승훈 2018.04.10 1032
4813 어쩌다 남중생 수업풍경-야! 이 개새끼 씨빨 새끼야 [4] 지그미 오 2020.08.30 1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