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瀞 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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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나, 우리들의 과거 속 빛나는 장면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Past is a history,
Future is a mystery,
Present is a gift.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매일매일이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 단 한 번 뿐인 하루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구절일 것이다. 그러한 현재들이 모여 과거를 이루고 미래를 이루는 것일 텐데, 우리는 간혹 ‘과거’라는 말을 떠올리면 그다지 좋지 않은 뉘앙스를 덮어 씌울 때가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누구누구는 과거가 어떻대’ 라든지 ‘그 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왔어’ 라든지, 아니면 ‘과거에 잘못 한 게 참 많아’ 등등. 나부터도 과거와 대면했던 이번 5월 한 달을 긴장 속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지나온 세월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가슴 벅차고 뿌듯했던 날들만 떠올리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서도 아파하고 눈물 흘렸던 날들도 함께 기억의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게 마련이라 그런 것일 게다. 그러나 눈물 없는 기쁨은 가슴을 울리지 못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면 내가 지나오면서 남긴 발자국 하나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작은 희망의 길이 되고 있단 생각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라는 녀석이 두렵지 않다. 약간의 과장을 더해, 태평양 바닷물만큼의 눈물을 흘려야 할지라도 이제는 그렇게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은 내가 씩씩해서도 아니고, 남들보다 강해서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읽는 책 한 권, 주워 들은 덕담 한 마디, 어쩌다 만난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듯이 나는 담양 대나무 숲을 거닐다 나의 아름답고 찬란했던 과거와 맞닥뜨린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앞서 산책로를 걸어내려 가시고, 동생은 뒤에서 작품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어, 나는 대나무와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혼자 걷고 있었다. 내가 닮고 싶은 대나무들 틈에 둘러 싸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미래를 향해 산책하다 문득, 나는 내가 지나온 길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천천히 뒤를 돌아 봤다. 그리고는 내 앞에 펼쳐진 숨막히는 아름다움에 다리가 마비 되어 한 동안 멀뚱멀뚱 그렇게 서 있었다. 그 어떤 풍경보다도 마음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창하지도 화사하지도 않지만, 그 속에는 보석보다 귀한 소박함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신기한 발명이라도 한 듯, 나는 그 깨달음의 순간을 뒤로 하고는 10 미터 간격으로 계속 뒤에 뭔가를 두고 온 양 뒤돌아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마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면 혼자 노는 것도 참 여러 가지라고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대나무에게서 한 수 배우고 우리 가족은 순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처음 가보는 곳, 그곳에는 아버지께서 30년 만에 만나는 하숙집 선배가 계신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아버지의 과거 속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살아 온 세월보다 더 많은 30년이라는 공백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분은 가슴 떨리는 재회와 그 당시의 추억들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나는 과연 앞으로 30년이 지나 어떤 사람을 다시 찾고 싶어하게 될까 궁금해졌다. 3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을 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서로를 생각해주는 마음이었다. 그래, 과거가 아름다울 수 이유는 바로 현재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빛나는 내가 있기 위해 거쳐 온 수없이 많은 과거이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빛나는 나를 만들어준 과거의 빛들은 무엇일까. 일단은 세상의 잣대로 비춰 볼 때, 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초등학교 때부터 이루어 놓은 것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소위 윤이의 업적 리스트 정도쯤으로 불러도 좋을 목록을 말이다.
6살 때 처음 아프리카에서 수영을 배운 것, 11살 때 프랑스에서 불어 한 마디 못 했던 애가 제일 좋은 학교 월반까지 해서 현지 애들보다 성적이 좋았던 것, 13살 때 한문의 ‘한’자도 모르는 애가 이틀 밤새 공부해 한자경시대회에서 입상했던 것, 15살 때 유럽 전체 수학 경시대회에 출전해 2등 한 것, 18살 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불어 논술 경시대회에서 입상했던 것, 21살 때부터 여러 회사에서 일해봤던 것, 25살 때 두바이 사막을 걸어봤다는 것 등등 이외에도 많을 테지만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분명 나를 빛나게 하는 간판들임에는 틀림없지만, 내 삶에 영감을 준 것들이라 칭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2%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나 가장 슬펐던 기억들이 내 삶에 영감을 줬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고민하다 나는 아주 마음에 쏙 드는 기준 하나를 찾아냈다. 내가 만약 내 자식에게 꼭 이야기해 주고 싶은 나의 과거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세 개는 반드시 해 줄 생각이다.
첫 번째. 80년대 초반의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생활여건이 열악했다. 오죽하면 부모님은 내 동생 갖는 것을 미뤘을까. 나는 학교 들어갈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마땅한 유치원이 없어 나이를 속여 학교를 다니게 됐다. 어느 날 풀밭에서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한국어로 ‘개구리’라고 외쳤고, 나와 함께 있던 캐나다 남자 아이는 ‘FROG, FROG’라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 개구리라고 알고 있는데 이상한 말을 해대는 그 아이에게 나는 한국말을 가르쳐줬다.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가르쳐준 한국어 한 마디가 두 마디가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었다. 그러다 결국, 학교 가서 배우라는 영어는 안 배우고 이상한 말만 배워온다는 이유로 그 아이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우리나라 외교는 내가 다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작은 불씨 하나가 때로는 큰 불을 만들 때도 있고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들이 되어 돌아오는 때도 있는 법인가보다.
두 번째. 벨기에라는 나라는 나에게 사춘기를 보낸 나라일 뿐만 아니라, 나를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하게 한 나라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는 학교 공부에 더 열중했고, 언제나 잘 웃는 사춘기 소녀였고, 교회에서는 노방전도 솔로를 하는 착실한 고등부 회장이었다. 그야말로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이 잘 어울리는 아이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던 나는 어느 날 관람하게 된 영화 한 편에 몇 시간이고 통곡하며 울었던 적이 있다. ‘제8요일’이라는 영화는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로 개봉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 영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내 방에 들어와 혼자 울기 시작했다. 내 자신이 너무 못됐다는 죄책감 때문에. 길을 걷다 장애인을 만나면 으레 피하곤 했던 내 자신이 모범생의 탈을 쓴 가식적인 인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어머니께서 꼭 안아주시며 위로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때의 정신적 충격 이후로 내 가슴의 포용력은 한층 더 넓어졌다.
세 번째. 나는 내가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산다. 내가 365개의 작은 인생들이라고 외치게 된 연유는 살아있음이 내 오른쪽에서 걷고 있다면, 죽음은 바로 내 왼쪽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약골인데다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나에게 남들 다 갖고 있는 건강만큼은 항상 욕심나는 것 중 하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회사 생활하면 남들은 살이 찐다는데 나는 바싹바싹 말라가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혼자 살았던 대학시절 5년 동안 건강했을 리 만무하다. 한 번은 너무 심하게 열이 나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상태가 심각해 의사는 급한 김에 한꺼번에 주사 두 대를 놔주었다. 그러나 이미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는 그 주사 두 방에 쇼크사의 문턱에서 마지막 한 가닥의 숨을 부여잡았었다. 약물이 투여되자마자 느꼈던 숨막힘과 앞이 안 보이는 깜깜함, 그리고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던 허무함은 아, 이런 게 죽는다는 것이구나 뼈 속 깊이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차마 아무한테도 얘기 못할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삶이 감사한 이유였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죽는 순간에 내 삶이 아깝거나 억울하지 않기 위해 말이다.
건강이 안 좋을 때마다 했던 생각 중에 하나는 내가 남자였으면 더 건강했을 텐데, 남자는 여자보다 체력이 좋으니까. 이거였다. 그러나 인류의 과거 역사 중 나에게 가장 경이로운 떨림으로 다가온 첫 번째는 바로 여자의 창조이다. 태초에 세상과 함께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기쁨이 어땠을지 상상하고 싶어도 상상할 수 없는 기분이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몇 개의 구절을 인용해본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장) 요즘 내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과연 누구의 갈비뼈일까?’
내가 선택한 5개의 인류 과거 역사 명 장면은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할 수 있다면’ 이란 전제하에 꼽은 것들이다. 꼭 현장에서 그 경이로움을 맛보고 싶은 시간, 장소, 사건. 그 두 번째가 바로 골고다 언덕 예수의 죽음이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나는 과연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분명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던 현실을 안타까워했을 것이지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핍박을 피하기 위해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을까, 아니면 그의 부활을 믿고 있었기에 침착했을까.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군중들 속에서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물에 손을 씻고 발뺌했던 본디오 빌라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 번째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최고 화가들의 작업하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는 장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에 ‘천지창조’를 작업하는 장면. 몇 백 년이 지나도록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후세에 길이길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단지 혼과 영을 다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그들 손 끝으로 조각한 역사인 것이다. 아마도 내가 예체능 중에 미술을 제일 못하기 때문에 굳이 그들의 창조적 순간을 훔쳐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네 번째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 으로 시작하는 그 연설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 황야개척의 최전선에 서서 땅과 씨름하랴, 주인 비위 맞추랴 일하는 기계 취급 받으며 살아야 했던 흑인 노예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그 가슴 떨리는 연설. 그 어떤 노랫소리보다도 달콤하고 힘있는 터짐으로 다가왔을 그 한복판에 내가 서 있었다면 아마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슴 속 정체성의 혁명을 느끼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제에서 해방되자마자 기대에 부풀었던 우리나라. 그리고 분단의 현실을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 한 맺힌 떨림의 순간들. 사실 이것이 가장 대면하기 힘든 역사 속 떨림일 것이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내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으면서도 뒤집어 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가슴 아픈 떨림. 경이로운 떨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처절한 그런. 과연 이 과거의 장면을 두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름다워지려면 우리는 통일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지만, ‘그때 그랬었지’라며 비로서 분단은 우리에게 약이 되는 경험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크 아탈리가 말했듯이, 한국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날이 꼭 도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왜냐하면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대한민국이기에 말이다.
IP *.6.5.149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Past is a history,
Future is a mystery,
Present is a gift.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매일매일이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 단 한 번 뿐인 하루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구절일 것이다. 그러한 현재들이 모여 과거를 이루고 미래를 이루는 것일 텐데, 우리는 간혹 ‘과거’라는 말을 떠올리면 그다지 좋지 않은 뉘앙스를 덮어 씌울 때가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누구누구는 과거가 어떻대’ 라든지 ‘그 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왔어’ 라든지, 아니면 ‘과거에 잘못 한 게 참 많아’ 등등. 나부터도 과거와 대면했던 이번 5월 한 달을 긴장 속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지나온 세월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가슴 벅차고 뿌듯했던 날들만 떠올리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서도 아파하고 눈물 흘렸던 날들도 함께 기억의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게 마련이라 그런 것일 게다. 그러나 눈물 없는 기쁨은 가슴을 울리지 못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면 내가 지나오면서 남긴 발자국 하나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작은 희망의 길이 되고 있단 생각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라는 녀석이 두렵지 않다. 약간의 과장을 더해, 태평양 바닷물만큼의 눈물을 흘려야 할지라도 이제는 그렇게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은 내가 씩씩해서도 아니고, 남들보다 강해서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읽는 책 한 권, 주워 들은 덕담 한 마디, 어쩌다 만난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듯이 나는 담양 대나무 숲을 거닐다 나의 아름답고 찬란했던 과거와 맞닥뜨린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앞서 산책로를 걸어내려 가시고, 동생은 뒤에서 작품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어, 나는 대나무와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혼자 걷고 있었다. 내가 닮고 싶은 대나무들 틈에 둘러 싸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미래를 향해 산책하다 문득, 나는 내가 지나온 길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천천히 뒤를 돌아 봤다. 그리고는 내 앞에 펼쳐진 숨막히는 아름다움에 다리가 마비 되어 한 동안 멀뚱멀뚱 그렇게 서 있었다. 그 어떤 풍경보다도 마음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창하지도 화사하지도 않지만, 그 속에는 보석보다 귀한 소박함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신기한 발명이라도 한 듯, 나는 그 깨달음의 순간을 뒤로 하고는 10 미터 간격으로 계속 뒤에 뭔가를 두고 온 양 뒤돌아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마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면 혼자 노는 것도 참 여러 가지라고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대나무에게서 한 수 배우고 우리 가족은 순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처음 가보는 곳, 그곳에는 아버지께서 30년 만에 만나는 하숙집 선배가 계신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아버지의 과거 속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살아 온 세월보다 더 많은 30년이라는 공백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분은 가슴 떨리는 재회와 그 당시의 추억들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나는 과연 앞으로 30년이 지나 어떤 사람을 다시 찾고 싶어하게 될까 궁금해졌다. 3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을 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서로를 생각해주는 마음이었다. 그래, 과거가 아름다울 수 이유는 바로 현재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빛나는 내가 있기 위해 거쳐 온 수없이 많은 과거이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빛나는 나를 만들어준 과거의 빛들은 무엇일까. 일단은 세상의 잣대로 비춰 볼 때, 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초등학교 때부터 이루어 놓은 것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소위 윤이의 업적 리스트 정도쯤으로 불러도 좋을 목록을 말이다.
6살 때 처음 아프리카에서 수영을 배운 것, 11살 때 프랑스에서 불어 한 마디 못 했던 애가 제일 좋은 학교 월반까지 해서 현지 애들보다 성적이 좋았던 것, 13살 때 한문의 ‘한’자도 모르는 애가 이틀 밤새 공부해 한자경시대회에서 입상했던 것, 15살 때 유럽 전체 수학 경시대회에 출전해 2등 한 것, 18살 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불어 논술 경시대회에서 입상했던 것, 21살 때부터 여러 회사에서 일해봤던 것, 25살 때 두바이 사막을 걸어봤다는 것 등등 이외에도 많을 테지만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분명 나를 빛나게 하는 간판들임에는 틀림없지만, 내 삶에 영감을 준 것들이라 칭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2%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나 가장 슬펐던 기억들이 내 삶에 영감을 줬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고민하다 나는 아주 마음에 쏙 드는 기준 하나를 찾아냈다. 내가 만약 내 자식에게 꼭 이야기해 주고 싶은 나의 과거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세 개는 반드시 해 줄 생각이다.
첫 번째. 80년대 초반의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생활여건이 열악했다. 오죽하면 부모님은 내 동생 갖는 것을 미뤘을까. 나는 학교 들어갈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마땅한 유치원이 없어 나이를 속여 학교를 다니게 됐다. 어느 날 풀밭에서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한국어로 ‘개구리’라고 외쳤고, 나와 함께 있던 캐나다 남자 아이는 ‘FROG, FROG’라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 개구리라고 알고 있는데 이상한 말을 해대는 그 아이에게 나는 한국말을 가르쳐줬다.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가르쳐준 한국어 한 마디가 두 마디가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었다. 그러다 결국, 학교 가서 배우라는 영어는 안 배우고 이상한 말만 배워온다는 이유로 그 아이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우리나라 외교는 내가 다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작은 불씨 하나가 때로는 큰 불을 만들 때도 있고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들이 되어 돌아오는 때도 있는 법인가보다.
두 번째. 벨기에라는 나라는 나에게 사춘기를 보낸 나라일 뿐만 아니라, 나를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하게 한 나라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는 학교 공부에 더 열중했고, 언제나 잘 웃는 사춘기 소녀였고, 교회에서는 노방전도 솔로를 하는 착실한 고등부 회장이었다. 그야말로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이 잘 어울리는 아이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던 나는 어느 날 관람하게 된 영화 한 편에 몇 시간이고 통곡하며 울었던 적이 있다. ‘제8요일’이라는 영화는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로 개봉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 영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내 방에 들어와 혼자 울기 시작했다. 내 자신이 너무 못됐다는 죄책감 때문에. 길을 걷다 장애인을 만나면 으레 피하곤 했던 내 자신이 모범생의 탈을 쓴 가식적인 인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어머니께서 꼭 안아주시며 위로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때의 정신적 충격 이후로 내 가슴의 포용력은 한층 더 넓어졌다.
세 번째. 나는 내가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산다. 내가 365개의 작은 인생들이라고 외치게 된 연유는 살아있음이 내 오른쪽에서 걷고 있다면, 죽음은 바로 내 왼쪽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약골인데다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나에게 남들 다 갖고 있는 건강만큼은 항상 욕심나는 것 중 하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회사 생활하면 남들은 살이 찐다는데 나는 바싹바싹 말라가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혼자 살았던 대학시절 5년 동안 건강했을 리 만무하다. 한 번은 너무 심하게 열이 나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상태가 심각해 의사는 급한 김에 한꺼번에 주사 두 대를 놔주었다. 그러나 이미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는 그 주사 두 방에 쇼크사의 문턱에서 마지막 한 가닥의 숨을 부여잡았었다. 약물이 투여되자마자 느꼈던 숨막힘과 앞이 안 보이는 깜깜함, 그리고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던 허무함은 아, 이런 게 죽는다는 것이구나 뼈 속 깊이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차마 아무한테도 얘기 못할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삶이 감사한 이유였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죽는 순간에 내 삶이 아깝거나 억울하지 않기 위해 말이다.
건강이 안 좋을 때마다 했던 생각 중에 하나는 내가 남자였으면 더 건강했을 텐데, 남자는 여자보다 체력이 좋으니까. 이거였다. 그러나 인류의 과거 역사 중 나에게 가장 경이로운 떨림으로 다가온 첫 번째는 바로 여자의 창조이다. 태초에 세상과 함께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기쁨이 어땠을지 상상하고 싶어도 상상할 수 없는 기분이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몇 개의 구절을 인용해본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장) 요즘 내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과연 누구의 갈비뼈일까?’
내가 선택한 5개의 인류 과거 역사 명 장면은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할 수 있다면’ 이란 전제하에 꼽은 것들이다. 꼭 현장에서 그 경이로움을 맛보고 싶은 시간, 장소, 사건. 그 두 번째가 바로 골고다 언덕 예수의 죽음이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나는 과연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분명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던 현실을 안타까워했을 것이지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핍박을 피하기 위해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을까, 아니면 그의 부활을 믿고 있었기에 침착했을까.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군중들 속에서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물에 손을 씻고 발뺌했던 본디오 빌라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 번째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최고 화가들의 작업하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는 장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에 ‘천지창조’를 작업하는 장면. 몇 백 년이 지나도록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후세에 길이길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단지 혼과 영을 다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그들 손 끝으로 조각한 역사인 것이다. 아마도 내가 예체능 중에 미술을 제일 못하기 때문에 굳이 그들의 창조적 순간을 훔쳐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네 번째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 으로 시작하는 그 연설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 황야개척의 최전선에 서서 땅과 씨름하랴, 주인 비위 맞추랴 일하는 기계 취급 받으며 살아야 했던 흑인 노예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그 가슴 떨리는 연설. 그 어떤 노랫소리보다도 달콤하고 힘있는 터짐으로 다가왔을 그 한복판에 내가 서 있었다면 아마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슴 속 정체성의 혁명을 느끼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제에서 해방되자마자 기대에 부풀었던 우리나라. 그리고 분단의 현실을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 한 맺힌 떨림의 순간들. 사실 이것이 가장 대면하기 힘든 역사 속 떨림일 것이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내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으면서도 뒤집어 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가슴 아픈 떨림. 경이로운 떨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처절한 그런. 과연 이 과거의 장면을 두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름다워지려면 우리는 통일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지만, ‘그때 그랬었지’라며 비로서 분단은 우리에게 약이 되는 경험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크 아탈리가 말했듯이, 한국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날이 꼭 도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왜냐하면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대한민국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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