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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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사랑한 영혼의 안내자 융
융은 리하르트 빌헬름이 번역한 주역의 독일어판 서문을 썼다. 무려 19페이지이다. 감히 번역을 해볼까 하다가 포기하고 맹난자의 <주역에게 길을 묻다>의 내용을 요약발췌하기로 한다.
융은 무의식 안의 내용을 의식화 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주역>을 주목했다. 그는 주역이 ‘무의식을 의식화 시키는 도구요, 수천 년 동안 사용되어진 유일무이한 지혜의 서’라고 평가했다. 빌헬름의 주역 번역을 평가하면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역의 세계는 우리들 서양의 과학적(=인과율적) 세계관과 완전히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과학적 원리와는 전혀 다른 역의 ‘과학성’을 인식해야 된다.”고 하며 인과적인 것과는 다른 비인과적인 공시성의 개념을 제기한다.
주역은 의식이 막다른 한계에 부딪혔을 때, 즉 무엇을 결정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소용된다. 그는 주역이 과연 영어권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해 직접 점을 쳐서 그 길흉을 묻기로 했다. 동전 척전법을 사용하여 점을 친 바, 그가 얻은 괘는 “화풍정(火風鼎)” 괘였다. 융이 얻어낸 화풍정괘는 정신적인 중재자로서 혹은 정제된 문화의 도구로서의 솥이다. 솥(주역)은 신에 대한 제물로 쓰인다. 그들(주역)을 통하여 계시된 신의 뜻은 겸손하게 환영받아져야 마땅하다는 결론을 융은 도출한다.
그는 1913년부터 1919년까지 6년동안 사회적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세계를 관조하는데 몰두한 시기가 있었다. 주요 관심사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의 현상(이미지로 드러남)이었다. 그 뒤 원시종족을 방문하여 무의식에 있어서 근원적 심성이 어떻게 원시인들 속에 현존하며 반영되고 있는가를 찾아보았고, 볼링겐에 집을 손수 지으면서 이 작업을 그의 심리학적 명상과 결부시켜 이를 테면 무의식의 내용을 형상화하는 심리적 실습으로까지 삼았다.
어릴 때 그는 밀려드는 무의식이 의식을 둑을 넘어 버릴 것 같은 때가 자주 있었는데 만약 신중한 자기분석, 창조적인 놀이, 요가 등을 통해서 영혼의 균형을 찾고 이를 유지하지 못했다면 미쳐 버리고 말았으리라고 했다. 86세가 된 융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는 노자의 말을 꺼내면서 이것이 바로 자신이 늙은 나이에 느끼게 되는 바라고 말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고독했던 사람,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보배를 훔쳐 본 사람, 어느 새 그는 수척한 동양의 현자가 되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속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또 하나의 노인, 노자에 이어 이번에는 융을 바라보게 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요, 인류의 원초적 상징의 해석자이며, 무의식의 언어를 해독하고 개체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지도한 영혼의 의사. 인간 심리의 전체성, 심리의 양극성과 그것의 통일의 경향을 재발견한 사람. 눈부신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서 인간이 겪는 위기 현상을 진단한 사람.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그는 무의식의 탐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미 그의 직관력과 타고난 영매 능력도 이런 일에 적합했다. 가히 그는 인류의 영혼에 등불을 밝힌 사람이라 하겠다.
내 마음 속 책갈피
316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무엇이 나의 신화이고 나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화두로 삼자. 헤르메스, 보따리아.
320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 놀랍게도 이런 기억들이 일종의 감격과 함께 떠올랐다. /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성인이 된 남자와 열한 살 소년을 서로 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삶을 한번 더 살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달할 곳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다는 것, 그 타임머신=놀이라는 것. 놀이를 통한 창조적인 삶. 나도 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요새 소설쓰기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322 내 신화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은 느끼고 있었다.
나도 내 신화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있다. 확신은 아니지만 자꾸만 그렇게 길이 열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325 그러나 내 안에 마력 같은 힘이 있어, 내가 환상에서 겪은 것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되도록 처음부터 나를 붙들어주었다. 내가 노도와 같은 무의식의 엄습을 견뎌냈을 때, 보다 높은 어떤 의지에 순종하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고, 그러한 느낌은 나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자마자 나는 감정제어를 풀고 환상의 이미지와 내부의 소리가 새롭게 말하도록 했다. 인도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다양한 정신 내용과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요가를 사용하고 있다.
명상을 통해 잡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소리가 ‘말하도록’ 하게 했다는 것에 주목.
326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일전에 조창인 작가가 ‘심상적 글쓰기’를 언급했다.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쓰라’는 것이다. 그 만남 후 머리 속에서 생각해서 쓰지 말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융도 계속 마음 속 이미지를 이야기 한다.
받아쓰는 수밖에 없었다. / 의식의 문턱 아래서는 모든 것이 펄펄 살아 있었다.
받아 써라! 나도 이런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해왔는데, 그러려면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마냥 그 분이 오기를 기다리면 안되는 것이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통하는 수도꼭지가 잠겨 있다. 그 꼭지를 틀자. 무의식의 펄펄 살아 있는 그 모든 것이 역류하여 받아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341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송스가 소개한 김새해 작가의 소원 100일 쓰기의 근거라 할 수 있겠네. 분신사바의 매개가 연필이나 볼펜인 걸 생각하면, ‘쓴다’는 것은 내면의 무의식을 끄집어 내는 행위가 될 수도. 나에게는 ‘필사접신’이 있다.
346 나는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가족과 직업은 내가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기반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은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했다. /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융은 내면 깊은 곳을 탐험하는 유목민이었다. 현실이라는 의식 위로 무사귀환 할 수 있는 ‘평형추’가 가족과 직업이었던 것이다. 아바타.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의 SF 스토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조창인 작가도 항상 ‘정처 없이 다니면 안된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한다’를 강조했다. 영웅여정의 종점은 결국은 일상에의 ‘귀환’이다. 바다 깊은 곳에서 전복을 채취했으면 물 위로 떠올라야 한다.
347 1916년 나는 이 변화를 형상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易. 변화는 괘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나도 요새 만물과 상황을 괘상으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물론 여기에 꽂히면 안되겠지만 처음에는 몰입의 과정이 필요하다.
350 오늘날 내가 과거를 돌이켜보고 환상에 관해 작업하던 시절의 체험을 생각해보면, 그 작업이 소명과도 같이 나를 압도하며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환상의 이미지 속에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과도 관계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내가 나 자신에게만 속해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내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 내가 맺은 인연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면탐구도 중요하지만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의 역사를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열전’이라는 말머리로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이 왜 내게 왔을까. 그들과 만남으로써 생긴 ‘이야기’는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일까. 그 인연과 이야기는 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까. 내 인생에서 ‘개성’만이 아닌 ‘보편성’을 주는 것은 결국은 사람들과 맺으면서 발생한 이야기다.
351 나의 저작, 즉 내가 정신적으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다 초기의 명상과 꿈에서 나온 것이다.
조셉 캠벨의 책을 읽을 때 ‘책=영혼을 나르는 것’이라고 북리뷰에 썼던 것 같다. 내 혼이 담긴 책을 쓰고 싶다. 아니 남기고 싶다.
352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유발 하라리의 명상. 나 내년에는 명상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354 두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되어 어두운 대기가 밝아졌다.
이런 표현 좀 남다르다. 융은 유발 하라리보다 더 심한 외계인이다. 둘이 만나서 이야기 하면 어떤 대화가 오갈지 궁금하네. 앞서는 유령으로 대기가 탁했다고 표현한 걸 읽은 거 같은데, 이번에는 어두운 대기가 밝아졌대.
355 거기에 있는동안 나는 아침마다 노트에 작은 그림, 즉 만다라를 그렸는데 그것은 당시 나의 내면적 상황과 연관된 듯이 보였다. 그 그림으로 내 정신의 변화를 매일 관찰할 수 있었다.
나도 어릴 때처럼 다시 그림일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머리에서 나오기 쉽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마음 속에서 끄집어 내기 쉽다. 이번 북리뷰는 이미지도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357 만다라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모든 것, 내가 걸어온 모든 길, 나의 모든 발걸음이 하나의 점, 즉 중심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다라가 중심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모든 길의 표현이다. 그것은 중심을 향한 길, 즉 개성화의 길이다.
몽골의 ‘게르(Ger)’나 중국의 ‘토루’가 떠오른다. 그리고 얼마 전 방문한 청운동의 <뿌리의 집>은 가운데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 2층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그런 원형 구조에서는 사람들이 모이기 쉽다. 인생길을 걸어가며 맺은 모든 인연들이 결국은 중심에서 다시 만난다.
대략 1819-1920년에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너를 알고 너가 되어라. 단 무의미한 순환이 아니라 영웅여정과 같은 귀환으로서의 순환이다.
360 하지만 나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아름다움의 환상을 보았고, 그로 인해 비로소 살 수 있게 되었다. 리버풀은 ‘생명의 못’이다. 간(리버는 독일어에서 간에 해당하는 Leber와 발음이 비슷하다)은 옛날식으로 생각하면 생명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융의 외할아버지가 바젤대학의 언어학 교수였다고 한다. 언어와 사고 간의 어떤 연결을 융은 갖고 있다.
그 꿈에서 나는 ‘자기’가 방향성과 의미의 원리이며 그것들의 원형임을 이해했다. 그 안에 치유의 기능이 들어 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나는 내 신화에 대한 예감을 처음으로 가졌다.
나도 꿈을 통해 내 신화의 예감을 가질 수 있을까? 융을 읽고 있는 최근에는 신경 써서 내 꿈을 살펴보려고 해서인지 요새는 깨어나서도 꿈을 잘 기억하고 있다. 어제 밤에는 반야심경이 나왔다.
361 내가 그 무렵 체험하여 기록한 것을 과학적 작업의 그릇 속에서 추출해내기까지 따지고 보면 45년이나 걸렸다. / 그러나 나는 나중에 그 용암의 흐름을 만났고, 그 불길의 열정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나의 작업은 그 뜨거운 물질을 우리 시대의 세계관에 접목시키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시도였다.
내가 만날 용암은 무엇이고 그걸 나는 지금 나의 시대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으면서도 모호하다. ‘시대’라는 화두를 나는 분명 갖고 있기는 하다. 나는 책을 매개로 하는 ‘동시대인과의 소통’을 통해 어떤 미래를 개척하려는 걸까.
365 우선 나는 내적 체험에 관해 역사에서 예시의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 왜냐하면 그것은 그때까지 부족했던 역사적 기반을 나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직업과 가족이 ‘돌아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했는데 이제 ‘역사적 기반’을 찾는다. 나도 나 같은 기질과 DNA가 과거에 성공했던 케이스를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데 자극이 되었다. 할아버지와 박지원.
369 이제 우리는 17세기에 갇혔습니다.
한 사람의 자서전에 당대가 아닌 여러 세기가 이렇게 많이 언급되기는 융의 자서전이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꿈의 시간적 스케일이 대단하다. 융은 소설을 썼어도 대작 하나 나왔을 거 같다.
370 리하르트 빌헬름이 1928년에 내게 보내준, 중국 연금술에 속하는 ‘황금꽃의 비밀’을 통해 나는 연금술의 본질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때 내 마음 속에 연금술을 배워 알고자 하는 열망이 일었다.
그럼 융은 1928년 이후에 주역을 접한 건가.
372 이것으로 내 무의식의 심리학은 역사에서 대응물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제 나의 심리학은 역사적 토대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역사적 토대와 현실적 토대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373 괴테의 비밀은 그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원형적 변환과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 그러네. 파우스트 박사 자체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며 구현 되었지. 왜 괴테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지 않고 계속 재탕 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했는데. 같은 작품을 읽어도 나와 융은 이렇게 다르구나. 원형의 변환관정. ‘변환’, ‘변용’에 주목하자. 일단 마음 속 사전에 담아두기.
375 그 책이 나온 데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유형에 관한 책은 한 인간의 모든 판단은 그의 유형에 의해 제약되며 모든 관점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다양성을 보상하는 단일성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나를 직접 중국의 도 개념으로 이끌었다.
유발 하라리의 저작들도 그의 거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어떤 질문을 갖고 있는가.
376 그것들은 나의 독자나 환자들이 내게 던진 질문들에 대한 회답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의 독자나 환자들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네. 남편은 ‘나의 독자나 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
379 그렇긴 하지만 그것이 시대정신의 세기적 변화에 부응하려면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시대와 동떨어지게 되고 인간이 전체성을 가지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389 일반대중과 환자들이 제기한 많은 질문이 나로 하여금 현대인의 종교적 문제에 관해 나 자신의 견해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나는 망설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일으키게 될 물의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을 안다’고 한 것일까.
나는 그 문제가 나에게 달려든 방식대로, 즉 감정을 억제하지 않은 채 체험한 그대로 써내려갔다.
397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그 글들은 내가 살아온 동시대 세계에 대한 보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는 되어야 책을 남긴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요새 저자는 많고 작가라 할 만한 사람은 적은 거 같다. 나도 내 영혼이 말을 하도록 허용하고 싶은데 얘는 왜 날 충동질을 안하지?
398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말해야만 하는 것은 무얼까? 이러한 ‘꼴’로 태어나 지금까지의 배움과 경험으로 채워진 지금의 ‘나’라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글이 되었을 때 의미 있는 책이 될 것이다.
401 그러나 단어나 종이만으로는 그리 충분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나는 가장 깊은 생각과 나 자신의 인식들을 이를 테면 돌에 표현하거나 돌로써 고백해야 했다. 내가 손수 볼링겐에 지은 탑이 그 일의 시작이었다. 허무맹랑한 착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나는 실행에 옮겼고, 그것은 나에게 깊은 만족을 주었을 뿐 아니라 큰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종이가 현생이라면 돌은 영원인가. 종이로는 부족해 영원을 품은 무시간성의 돌에 새겨야 직성이 풀렸던 것일까. 돌에 새기고 돌탑을 쌓고. 이런 4차원 외계인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 신기하다.
405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생각들, 그에 따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여기서는 창조의 고통이 완화되며 창조성과 유희성이 거의 하나로 어울린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미래가 나타난다. 나선형 계단을 상상해보자. 융은 어릴 때 자신이 했던 ‘놀이’를 통해 ‘노는 아이’를 만나고 그것이 미래의 창조의 동력이 된다. 유희성과 창조성.
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시적인 표현인 거 같으면서도 이게 뭔 소리야 싶은 이 느낌은 239 페이지에 등장하는 환자 바베트의 말을 읽을 때의 느낌과 유사하다. “나는 로렐라이다”
호수로 향한 세 번째 면에서는, 말하자면 돌이 스스로 라틴어로 말하도록 했다.
‘돌에 라틴어를 새겼다’가 아니다. 융은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는 표현도 했지(P. 397).
415 그는 열렬한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그 스위스 지부의 총책임자였다. / 내가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조부가 나의 사고 그리고 인생과 역사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부와 이름이 같기도 했지. 그런데 저자 중 조부랑 이름 같은 사람이 또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417 내가 석판에 족보를 새길 때 조상과 이어져 있는 숙명적인 연대성이 뚜렷이 인식되었다. 나는 부모나 조부모,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놓은 일들과 문제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인 카르마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조상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으나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물음에 내가 대답해야 하며, 지나간 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하거나 계승해야만 할 것 같이 늘 여겨진다.
내 조상들의 恨은 무엇이었을까.
419 또한 나는 미래가 장기적인 전망으로 미리 무의식적으로 준비되며, 그리하여 투시력을 가진 사람은 훨씬 이전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맞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미래의 씨앗이 나의 무의식 속에 심어져 있다. 어떻게 피어날 씨앗인지 꿈을 통해 알 수 있을까.
그때 이미 바그너의 원형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것과 함께 니체의 디오스니소스적인 체험이 나타났다. 니체의 체험은 환희의 신, 보탄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빌헬름시대의 오만은 유럽을 전혀 딴판으로 만들어버렸고, 1914년의 재앙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배경지식이 좀 있어야겠다. 추후 검색해볼 것. 키워드: 야코프 부르크하르크/ 베르사유 대관식
420 시대정신/ 대극문제/ 생명의 혼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충격을 받고 이것이 나의 운명임을 인식했으므로 드라마의 모든 극적인 전환이 나 자신과 관련이 있었다. 이 장면에서는 내가 정열적으로 몰두하고 저 장면에서는 대결해야만 했다.
감정이입을 넘어선 감정몰입. 드라마도 아니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이렇게 몰입할 수 있나? 나 파우스트 다시 읽어봐야겠다. 내게 파우스트가 오게 된 건 우연이 아닌 건가.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신체의 유전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마음의 유전은 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421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바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奔流)로 휘말려 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파우스트의 직진본능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이야기한다.
422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정신)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忙(바쁠 망)은 마음(心)이 망(亡)한다는 것이다.
424 나는 그러한 대답을 벽에다 그림의 형태로 그려놓기까지 한다. 마치 수세기에 걸친 조용한 대가족이 그 집에 모여살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 나는 ‘제 2의 인격’ 안에 살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영화 <The others>가 생각난다. 융은 대가족 영혼들과 함께 산 셈이다. 한 편으로는 으스스하지만 영혼을 대하는 융에게는 죽은 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거 같다. 그러니 집 터에서 해골을 발견해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정식 장례식을 치러주기까지 하지.
427 나는 유럽인들을 한번 외부에서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느 모로 보나 생소한 환경 속에서 유럽을 보고 싶었다.
Verfremdung이 또 나와. 낯설게 하기. 그러려면 여행.
429 개중에는 서로 꼭 껴안고 다니는 정다운 쌍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동성애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손 잡고 다니는 남자 많이 보긴 했는데(20여 년 전이지만) 동성애 필은 아니었는데.
나는 말할 수 없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라오스에서 한국의 과거를 느끼는 것처럼, 공간의 이동은 시간의 과거여행을 맛보게도 한다.
431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더 빼앗기고, 더 나아가 유럽인을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른 현실로 옮겨 놓는다. / 우리가 사하라로 들어갈수록 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 시간이 거꾸로 가도록 위협당하고 있는 듯 했다.
여행지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상대속도. 속도가 느려지는 것만이 아니라 방향까지 달라지는 체험.
433 늘 그러하듯 밤중에 개들의 웅장한 협주곡이 한차례 지나간 후 쥐죽은 듯한 적막이 깔렸다.
부탄에서 제대로 개들의 협주곡을 들었다. 진짜 시끄러워서 잠 못자겠던데 한 편으로는 언제 이렇게 밤 중의 개소리를 들어봤던가 싶더라. 야성의 소리. 도시에서는 개소리 듣기 힘들지. 닭소리도. 새벽엔 닭소리. 밤에는 개소리.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강렬함이다.
434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해하고 싶은 의식, 표현하고 싶은 무의식. 갑돌이와 갑순이.
435 그것이 내가 쓴 ‘나의 책’이라는 느낌은 가지고 있었다.
436 야곱의 천사와의 격투
그것은 마치 우리가 빠져나왔다고 착각하는 어린시절의 낙원과 같아서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또다시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에덴동산만 생각할 게 아니다. 우리의 유년이 낙원이었지. 융은 그의 낙원에서 돌을 갖고 놀았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나의 낙원에서 무엇을 하고 놀았더라? 그 놀이를 기억해내야 창조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437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오늘 나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이 있었는데, 나는 우리 아이들이 요새 아이들같지 않게 ‘아이답다’는 것이 좋다. 되바라지게 똑소리 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다운 무구함과 영특함을 갖고 있다.
438 유럽인은 합리적은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원시적 인격부분이 국부적인 지하존재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우와 표현 봐라. 약 잡수셨다. 역자인 조성기가 소설가인 것도 한 몫 하려나?
439 외견상 전혀 다르고 낯선 아랍의 환경이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나 익숙한 선사시대에 대한 원초적인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440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미래의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441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모든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어딜 가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사람이 있다. 날카로워지는 것까진 아니라도 거슬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보니까 나름의 ‘유형’이 있더라. 내가 왜 저런 유형의 사람을 싫어할까 생각해봤는데 아직 이유를 모르겠다. 여하튼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이 있다는 것은 나의 그림자의 반영이건 뭐건 분명 이유가 있겠지.
442 그 무렵 좀 더 깊은 문화수준으로 내려가서 역사적 비교를 계속해보리라는 소원이 무르익었다.
좀 더 ‘높은’ 문화수준으로’ 올라가서’가 아니라 ‘깊은’, ‘내려가서’라는 표현에 주목하게 된다. 융에게 있어서의 탐험은 ‘하강’이다. 미래보다는 과거를 ‘거스르는’ 것을 좋아하고.
밀집된 가운데 서로 겹쳐 세워놓은 집들이 ‘도시’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고, 그들의 언어와 전체적인 생활양식도 그러했다.
이거 이미지 찾아보고 싶은데.
443 우리는 그들이 넋이 나간 사람들이라고 확신하오. /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진짜 통찰력 쩐다. 머리로 생각한 걸 말하다니 저 사람들 넋이 나갔군! 뭐 이런 뉘앙스.
445 우리의 대화는 5층 주건물의 지붕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인디언들이 담요를 덮어쓴 채 다른 집 지붕 위에 서서 맑은 하늘로 날마다 떠올라 운행하는 태양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 이 장면 상상하니 너무 아름답다. 지붕 위에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태양을 바라보는 모습이라니.
가옥들은 부락의 중심을 향해 겹겹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기묘하게도 마천루를 중심으로 한 미국 대도시의 조망을 미리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이미지 찾아볼 것
447 내가 옥비에 비아노와 지붕 위에 앉아 있을 때 눈부신 태양이 점점 더 높이 떠올랐는데, 그가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어지는 대화는 생략. 다만 지붕 위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키며 옥비에가 흥분하며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니 너무 아름답다.
448 갑자기 내 등뒤에서 왼쪽 귀에 들려왔다.
엄마의 ‘제 2인격’이 말했다는 표현을 봤을 때의 느낌과 유사하다. 보통은 내 등 뒤에서 들렸다고 할 터인데 등 뒤에서 & 왼쪽 귀에서. 아 진짜 남달라. 외계인이다.
450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한씨가 이번 주 칼럼에서 기계의 ‘제조공정’과 사람의 ‘성장과정’에 대해 쓴 것이 인상 깊었다. 복제인간의 존엄성을 다루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 연상되었는데, 복제인간에게 있어서의 삶의 이유란 ‘장기기증’을 위한 것이었다.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삶의 의미의 빈약함과 각박함이라는 차원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의미를 풍요롭고 기름지게 하려면? 신화나 무의식에 주목하자! 나의 신화와 나의 무의식.
451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52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또는 자기 자리로 돌아온 사람.
455 이 광경을 보고 나는 마법에 걸린 듯 했다. 그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모습이었으나 동시에 강렬한 기시감을 주었다. / 오천 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검은 남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도 이미지 찾아보자. 저 멀리 나를 내려다 보는 남자.
456 나는 단지 그의 세계가 까마득한 수천 년 전부터 나의 세계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18세기 마차 보고도 자기 세계라 하더니. 융이 소유한 세계는 장구하다.
457 그럼으로써 우리가 인생과 존재를 정확하게 계산된 기계, 즉 인간정신과 함께 예지되고 예정된 법칙에 따라 무의미하게 계속 가동되는 기계라고 여기고 있음을 생각지 못한다. 그와 같이 암담한 태엽장치식 환상에는 인간과 세계와 신의 드라마가 없다. 단지 계산된 황량한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앞서 이야기한 공정과 과정.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내가 요새 소설을 쓰고 싶다는 로망이 생겨서인가. 이런 말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는 나만의 세상을 창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려면 시간과 공간을 정해야 하고, 그 시공간에서 움직일 캐릭터, 그리고 그들을 이을 인연의 끈 등을 구상해야 한다.
460 열병에 대한 반주로서는 그 이상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463 성격감정가/ 그들의 직관적인 인식방법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말씨, 몸짓, 걸음걸이를 기가 막히게 흉내내면서,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 데 놀랐다.
또 성한씨 생각나네.
464 삼위일체의 원형이 드러났고, 이러한 원형의 역사에서 언제나 반복하여 나타나듯이, 그것은 네 번째를 불러들였다. / 우리의 일방적인 남성성에 대하여 유익한 보상이 되어주었다.
보상으로서의 그녀. 앗! 그러고보니 얼마 전 셋으로 이루어진 팀에 내가 들어가서 넷이 되었다. 정식조인은 아닌데 예외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466 개울에서 돌아오는 그녀들의 쇠발목고리가 나지막하게 짤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곧이어 그녀들이 무게있는 걸음걸이로 머리에 물통을 안정되게 이고 키 큰 누런 코끼리풀들 사이로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매일 아침 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비주얼이다. 이것도 이미지로 찾아봐야지. 물통을 이고 우아하게 걸어오는 그녀들 주위로 아지랑이가 필 것만 같다.
467 ‘여성의 평등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동반관계가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원시사회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여자가 바라는대로 무의식적으로 충분히 잘 조절되고 있다.
음..이거 멋진 통찰인데. 페미니즘의 흐름과 관련하여 할 말이 많아져서 여기서는 생략한다.
469 나는 그녀의 행동거지에서 우러나는 확신과 자부심이 거의 대부분 그녀의 분명한 전체성과의 동일시에 근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전체성은 아이, 집, 작은 가축, 샴바,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나머지 요소인 그녀의 매력적인 몸매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상품화라고 할 대목이 아니다. 매력적인 비주얼도 자본이다.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암시적으로만 언급될 뿐이었다. 그는 잠깐 있다가 없다가 하는 존재같았다. 현재 그는 미지의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공공연히 아무 문제 없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자, 즉 남편의 진정한 ‘임시 처소’였다. 문제는 그가 여기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전체성 속에 존재하면서 짐승떼와 함께 돌아다니는 남편의 ‘자기장’의 중심이 되고 있느냐 하는데 있는 것 같았다.
통찰력과 표현에 감탄.
나는 백인여성의 남성화가 그녀들의 전체성(샴바, 아이, 작은 가축, 자기 집, 그리고 부엌의 불)의 상실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여성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그리고 백인 남성의 여성화는 여성의 남성화에서 야기된 후속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보았다. 가장 합리적이라는 국가들이 성의 차이를 가장 많이 소멸시키고 있다.
계속 고개 끄덕이고 있지만 코멘트는 생략.
470 나와 나의 여행 동반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고통을 동시에 지닌 아프리카 원시세계를 문이 닫히기 전에 체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우리의 야영지 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중 하나였다. 사업에서 멀리 떠나 인생살이에 오염되지 않고 죄책감도 없이, 나는 아직도 원시 그대로인 땅에서 ‘신의 평화’를 만끽했다. 나는 헤로도토스가 말한 ‘인간과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일찍이 그와 같이 관찰한 적이 없었다. 온갖 마귀의 어머니인 유럽과 나는 수천 킬로미터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귀들이 이곳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전보도, 전화도, 편지도, 방문도 없었다! 그것이 ‘부기슈 심리학 탐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였다. 나의 해방된 정신력은 큰 기쁨을 안고 태고의 광대한 곳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여행하는 것처럼 설레이며 읽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처럼 융의 아프리카 여행기도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그 흔한 유럽 한번 가지 않고 몽골이나 티벳을 각각 두 번이나 갔던 이유는 유럽은 언제든 유적, 유물을 볼 수 있으나 몽골, 티벳과 같은 자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질 것만 같은 예감때문이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잘 다녀왔다.
472 예전에 라이본들은 꿈을 감득하고 그 꿈으로 전쟁이 일어날지, 질병이 생길지, 비가 올지, 사람들이 어디로 가축떼를 몰고 가야 할 지 알아맞혔소.
감득(感得)한다는 표현에 눈이 간다. 득괘(得卦)한다는 표현처럼. ‘득’한다면 어디에서 득하는 거야? 무의식? 다른 차원?
473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세계의 몰락을 생생하고 아주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475 그들은 이런 행위에서 아무런 의미도 파악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도 또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밝힌다든지 부활절 달걀을 숨긴다든지 할 때처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의식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제사도 그렇지. 시댁 사람들이 엄격하게 제사를 지내면서 왜 그렇게 하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에 한다는 것이 나는 이해가 안가더만. 그런데 오히려 융의 책을 읽고 나니 제사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나는 내가 하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라니까 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니까 한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에 놀랐던 것 같다.
오직 그 순간에만 신이고 다른 때는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만나’가 생각난다. 밤이슬처럼 내렸다는 만나. 찰나. 순간. 때. 도루묵, 시절인연 등의 단어가 연상된다.
476 그러다가 일출과 함께 아무런 내적 모순 없이 낙관주의가 다시 돌아온다.
483 새로운 인상들을 받아들이고 한없는 생각의 바다를 포용하는 나의 능력이 쉽게 바닥을 보인 것은 괴롭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든 관찰과 체험의 내적 연관을 확인하기 위해 그것들을 다시 한번 검토해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기록했다.
두어 달 전. 칼럼 밑천이 떨어지며 내 글의 퀄러티도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에 한 편 쓸만한 글감조차 없는 일상인가 싶어 내가 사는 모습도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되었다. 어떤 선배 왈, 밑천이 빨리 떨어지는 것이 좋다고, 그래야 더 일찍 글쓰기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하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능력의 바닥을 봤다면 덮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개선점을 찾아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러한 가정은 인상깊었던 외부사건조차 분명히 의도적으로 제외되고 있는 사실로 인해 자연히 성립된 셈이었다.
칭찬이 의도적으로 제외되는 경우도 있고, 질책 역시 의도적으로 덮어지는 경우도 있지. 말해지지 않는 것, 그러나 드러나는 것을 잘 캐치해야 한다.
미국의 흑인! / 나에게 위협적인 흑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미국에서 내 머리를 손질해준 흑인 이발사에 대한 12년 전의 오래된 추억이 동원된 셈이었다. 그것은 결코 현재를 떠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외부의 인상들에 대한 정신적 저항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516 그곳에서 나는 마침내 나 자신 또는 나의 인생이 어떤 것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어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리라 또한 확신했다. 나는 무엇이 내 이전에 있었고 왜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이 어디로 계속 흘러갈 것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나도 그것이 알고 싶다. 적어도 나의 아이들은 그들 전에 누가 있었는지 나보다는 더 많이 알았으면 한다. 4대(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는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나는 친지 인터뷰와 기록을 통해 이 작업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나의 유산이다.
517 그는 옛날부터 존재해온 원형이 그 시대에 성육신한 그 왕의 화신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는 이제 자신이 원형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 원형은 어떤 모습일까?
518 그 의사가 심연에서 형상으로 떠올라 나에게 이르러 내 앞에 서자 우리 사이에 소리 없는 생각의 전달이 이루어졌다. 그 의사는 이를 테면 지구를 대표해 나에게 어떤 통지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 내용은 내가 지구를 떠나려고 하는 데 대해 항의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구를 떠나서도 안되고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 통지를 받는 순간, 나의 환상은 끝나고 말았다.
이건 SF도 아니고, 환상이라 하기엔 이미 현실이기도 하여(결국 그 의사는 죽었으니) 신기하면서도 소름이 끼친다.
521 나는 우주공간을 떠다니며 우주의 성 안에서 보호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허공이지만 가능한 모든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지복이었다. ‘이건 너무 멋지다!’고 나는 생각했다.
말 그대로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을까?
523 내적 상태가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거기 비하면 이 세상은 아주 하찮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이생에 다시 다가감에 따라, 환상상태는 첫 환상 후 3주 가까이 지나고 나서 종료되었다.
마약 환각이 이런 느낌일까.
526 병을 앓은 후에 나에게는 왕성한 연구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많은 주요저작이 그후에 비로소 출간되었다. 만물의 종말에 관한 인식 내지 직관으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나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리하여 문제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무르익으면서 형상화되었다.
억지로 쥐어짜는 글쓰기가 아니라 넘쳐 흐르는 글쓰기. 쓰고 싶어서 좀이 쑤시고 간지러운 글쓰기 소양증.
532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시대에 답하기 위해서, 시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단 시대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떤 시대병을 앓고 있을까. 병을 알아야 처방이 나온다. 나의 글쓰기는 처방이 될 수 있을까.
536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이것 역시 조건부이긴 하지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539 아무튼 나는 무의식의 암시를 기초로 얻을 수 있었던 견해가 나에게 빛을 밝혀주고 예감의 영역을 내다보는 눈을 열어주는 것을 경험했다.
무의식의 암시는 ‘득괘(得卦)’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 바다를 보며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득괘를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짐을 꾸리며 ‘시초’를 넣었다. 득괘를 통한 명상, 무의식과의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기대된다.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 내적 감동 / 보상적 환상
보상적 환상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재미있는 동시에 과학적이다.
541 죽은 자들은 죽은 사람이 가지고 오는 인생경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갓 죽은 사람’이 가지고 오는 인생경험이라. 이거 완전 새로운 생각인데.
이를 테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그는 이에 답해야 한다. 그가 죽음에 관한 신화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탄생신화’만이 아니라 ‘죽음의 신화’를 가져야 할 이유라. 새롭네. 나도 조만간 죽음의 신화를 써봐야겠다. 내가 ‘갓 죽은 영혼’이 되었을 때 선배 영혼들에게 들려줄 이승에서의 이야기 보따리를 갖고 가려면. (이거 소설로도 좋겠는데. 일단 표시)
542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무’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개하는 노년의 비결=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543 그 두 환상은 그동안 무시간성이라 말해도 좋을 무의식으로, 그 자신 속으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자아나 자아의 변화하는 상황과 아무런 접촉 없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의식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정신의 냉장고라 해야 할까.
545 나는 답을 얻기 위해 연구해야만 했다. / 하지만 내 책의 연구를 통해 나에게 던져진 질문에 답하리라는 막연한 예감은 지니고 있었다. /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꿈 속에 등장한 지난 세기의 고귀한 혼령들의 모임에서 현실의 책이 나올 수 있게 된다. 조창인 작가도 소설을 구상하다 잠에 들면 꿈 속에서 줄거리의 실마리를 찾기도 했다던데. 지난 오프 수업 때 저자와의 인터뷰가 바로 이런 꿈과 비슷한 것 아닐까. 영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걸 뭐 특별하게 볼 게 아니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저자가 남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위대한 영혼과의 대화이다. 융처럼 꼭 유별난 꿈을 꾸지 않아도 평범한 사람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독서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적절한 시간의 상황에서만 의식에 의해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아마 여러 해 동안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을 품고 지내다가 나중 어떤 순간에 그것이 참으로 깨달아질 것이다.
조창인 작가를 만나 어쩌다 가시고기와 같은 소설을 쓰게 되었냐고 물었다. 아픈 아들을 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마음 속에 심어졌고 어느 날 서서히 그 씨앗이 잎을 틔우더란다. 아이디어, 예감, 정신, 사상 등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씨앗의 단계가 있고 햇빛과 물, 흙이 계속 공급되는 와중에 ‘때가 이르면’ 활짝 꽃 또는 열매를 피게 되는 것이다.
546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관점이다! ‘제 2의 인격’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사후의 영혼도 융에 의해 인격화 되고 있다.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모르니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한다니.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 뒤에 살아남아서 계속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얻는 것이 아닌가 싶다. /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즉,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547 많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미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생존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생전에 습득하지 못한 의식성 부분을 죽음에서 얻으려고 요구하게 된다.
548 그 은자는 서로 보충하고 서로 높여주는 여러 발전단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융 정도 되면 독서량이 엄청났을 터인데, 자서전에 파우스트가 이렇게 자주 언급되다니. 이번 북리뷰 하는 내내 내 책상 위엔 전성수 약사님의 파우스트가 놓여져 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닌겐가. 올 해는 ‘필사의 해’였다면, 내년에는 ‘암송의 해’ 또는 ‘명상의 해’가 될 것 같다. 매일 1페이지씩 파우스트를 독일어로 외워 봐야겠다. 347페이지이니 1년이면 되겠다. 서로 보충하며 높여주는 발전단계라. 우리 부부가 이런 단계를 만들어가는 관계이길.
549 아내가 사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정신적 발전에 종사하고 있다는 생각은 내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리하여 그 꿈은 나를 안심시키는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한(恨)과는 좀 다르지만 여하튼 사후에도 정신적 발전에 종사한다.
550 그러므로 4라는 수의 ‘필수적인 진술’은 그 수가 선행된 상승(수의 증가)의 정점인 동시에 종점이라는 것이다. 그밖의 모든 단위에서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새로운 수학적 특성이 생기므로 더 이상 공식화될 수 없을만큼 진술은 복잡해지고 만다.
나에게 수학책이 온 까닭? 전성수 약사님의 수학책에 적힌 ‘신은 항상 수학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갑자기 떠오른다. 도대체 최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우연이라 하기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느껴진다.
끝없는 수의 계열은 개별적인 피조물의 끝없는 수에 해당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수의 계열은 개체로서 이루어진다. 수열의 첫 묶음인 10이라는 수의 특성만 보더라도, 어쨌든 단자로부터 시작된 추상적 우주진화론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수의 특성은 또한 물질의 특성이기도 하므로, 어떤 방정식은 질료의 반응을 예측할 수도 있다.
‘수열’과 ‘예측’에서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원소 주기율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주기율표를 만든 사람도 그걸 꿈에서 봤다던데. 수열 공부할 때 다음 수는 무엇일지 푸는 수학문제가 있었쟎아. 발견되지 않는 원소를 주기율표에서 짐작할 수도 있고. 여기에서의 예측과 ‘조짐을 통한 미래 예측’이 다를 바 없지 않나. 예언, 계시라는 것이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요새 이런 시각을 자꾸 주역과 연결하여 생각하려는 버릇이 생겼다.
551 수학 방정식이 어떤 물리적 현실에 해당하는지 우리가 모르듯이, 신화적 현실 또한 어떤 정신적 현실에 해당하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아주 오랜 옛적부터 어떤 잠재의식적 과정의 진행을 표현하는 신화소가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증명/ 체험/ 내적인 시각영상
어릴 때엔 꿈을 꾸면서 어떤 시각영상이 천연색으로 뚜렷하게 떠오른 경우가 많았다. 안과에서 시력검사 할 때의 영상 같은.
555 그 대극은 죽음이 한 번은 자아의 관점에서, 또 한 번은 영혼의 면에서 표현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재앙으로, 악하고 무자비한 힘이 한 인간을 때려죽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파우스트 지상 vs 천상
556 사람들이 오래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인간은 삶의 한가운데서 저승으로 끌려가고, 쓸모없는 인간은 늙도록 살아남는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이다. 죽음의 야만성과 전횡성은 사람들을 비통하게 만들어,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느님도 없고 정의나 선도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느낌표를 여러 번 그렸다. 융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시니컬한 고모가 친지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좋은 사람들은 다 가버리고 지독한 사람들만 오래 살아 남으니, 여기가 지옥이고 저기가 천국인거야.”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557 26년의 공백 끝에 아버지가 내 꿈에 나타나 심리학자에게 결혼생활의 갈등에 관한 최근의 견해와 인식을 물어왔으니 말이다. 그로서는 그 문제를 다시 받아들여야 할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무시간적인 상태에서 아마도 더 좋은 통찰을 얻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변화하는 시간조건에서 몇 가지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던 살아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웃으면 안되는데 여기서 엄청 웃었다. 26년간 저 세상에서 잘 사시다가 이승에서의 아내가 올 때가 되자 꿈 속에서 상담을 받고자 하셨다니! 세상에..이거 완전 판타지 소설감이다. 제목은 영혼상담심리소. 요새 소설을 쓰고 싶다는 로망과 욕망이 있다. 그건 그렇고 융의 꿈은 정말 남다르다.
561 고통스러운 사건들의 원인과 작용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욱 유익하리라고 여겼다.
내가 왜 여기에 밑줄 긋고 小說이라고 썼을까? 며칠 전에 읽었는데 어쩜 이렇게 새로운 지.
내가 살아가면서 감당하고 있는 카르마가 내 전생의 결과인지, 혹은 내 속에 유산을 모아 남겨준 조상의 소산인지
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이 이미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융의 질문도 스케일이 크다. 거대한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수준이 아니라 우리(내 안의 조상을 포함하는)는 누구인가. 부와 빚만 대물림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질문도 대물림 된다.
또는 내가 전생에 반항하는 기질의 중국인이었어서 그의 동양적인 영혼을 유럽에서 발견해야 하는 벌을 받고 있다고 한 빌헬름의 농담 같은 추측이 옮았던 것인가?
빌헬름의 농담이 예리하다.
565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늙은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있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내 인생을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이끌었고 다시 이 세계에서 밖으로 인도하는 그 줄(노선)을 보려고 시도한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왕년’을 자주 이야기 한다. 내적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라. 글쓰기 역시 마음 속 이미지를 먼저 그리고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의 글을 읽는 사람도 글에서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되는. 독자로 하여금 ‘그림감상 같은 독서’를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어찌하여 사람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 그와 같이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이 있단 말인가?
그러게요. 나도 궁금하네. 오늘 꿈에는 융 할배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소통이 단절되었을까.
566 어찌하여 신들에게 인간과 창조가 중요했던가? 그리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니다나사슬의 연속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부처가 존재의 고통스러운 환각에 대하여 그것의 ‘공’을 설파하고, 기독교인이 임박한 세계의 종말을 바라는 것인가?
훌륭한 질문이다. 나도 매달려봐야 하는 질문.
570 ‘자기’가 삼차원의 존재가 되기 위해 인간의 형상을 취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것은 마치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수복을 입는 것과도 같다.
좋은 비유다. 융의 글은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거 같다. 왜 이런 형상을 하고 태어났을까라는 생각도 종종 하는데. 어떤 세상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 이러한 옷을 줬을까. 누군가에겐 바다를 체험하라며 잠수복을 주고, 누군가에겐 하늘을 체험하라며 날개를 주고.
571 무의식의 표상들은 의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현실과 자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일종의 주변현상으로만 보고 있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만 봐도 여러 차원의 현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가 이인화씨가 생각난다. 소설가는 자기의 세상, 자기의 현실을 창조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인지 게임의 스토리를 짜는것도 어렵지 않은 거 같다.
578 구약의 신혼관념과 거기에 따른 내용들을 성취하게 위해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거 뭔가 중요한 말인데, 아직은 내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매우 중요한 말이라는 예감만 들어 일단 기록해둔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618 내게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한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 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 자체의 진수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느님은 사랑이다”라는 구절에 관한 현학적인 해석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 문구는 신성이 ‘복합대극’임을 입증하고 있다.
아, 너무 귀한 말인데 지금 시간부족으로 파우스트를 묘사한 렘브란트의 그림(좌측)으로 대신한다. 파우스트. 바울. 렘브란트. 융. 이 글귀는 나중에 다시 곱씹어봐야 한다.
619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결코 언급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언어도 이 모순을 감당할 수 없다.
음양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627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순간이다. / 복된 모순
복된 죄악
629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 마치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와 갈라놓았던 저 생소함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나 자신에 대한 예기치 않은 낯설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 분석
자서전인만큼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 등 시간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것은 무난하고 자연스럽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 시기를 거쳐 정신의학자가 된 융이 만난 환자들과의 만남, 프로이트와의 만남 등 타인과의 교류와 집단무의식의 발견. 다시 본인의 내면탐구로서의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연금술의 발견>을 거쳐 어린 시절의 놀이를 통해 볼링겐 탑에서 마주하는 죽은 자들과의 소통은 죽음을 준비하는 정신적 과정으로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과정이라 하겠다. 여행을 통해 유럽 밖에서 유럽인을 바라보고 원시 시대로의 과거여행을 한 후 환상, 사후의 삶, 만년의 사상을 통해 인생을 완성할 준비를 한다. 내면과 타인, 여행과 임사체험 등 여러 공간과 차원을 넘나드는 내적사건에 적합한 목차였다고 본다.
2 보완이 필요한 점(독자의 눈으로 – 이런 내용은 아쉬웠다. 이런 부분은 이해가 안됐다)
상징, 이미지가 보완이 되었으면 좋았겠다. 융의 자서전인만큼 융이 그린 만다라 그림이나 스케치 등이 삽입되었다면 그의 내적 이미지를 엿보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상징과 이미지를 꾸준히 이야기 하는데 융과 볼링겐의 돌기념비 등의 사진이 들어가 있어 자서전의 의도와는 좀 다른 거 같다.
3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다른 차원에서의 탐험기다. 그와 함께 내면, 무의식을 탐험할 수 있었다. 체질과 기질 등이 DNA를 타고 흐른다는 생각은 해왔어도 조상의 질문도 대물림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타임머신으로서 혼령과의 통번역기로서의 ‘꿈’에 대한 환기도 나로서는 큰 소득이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주역을 30년이나 공부한 융이었지만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말했을 때의 심정처럼 주역에 대한 강조는 다소 조심스러웠던 걸까. 그의 8개 성격유형은 8괘로도 설명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4에 대한 강조 역시 그렇고. 내가 융이었다면 연금술에 대한 설명처럼 주역에 대한 연결고리를 언급했을 것 같다.
외향/직관형: 천
내향/직관형: 뢰
외향/감정형: 화
외향/사고형: 풍
내향/사고형: 수
외향/감각형: 산
내향/감각형: 지